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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3윤복현 조회수 325




대한민국의 국제적 국호는 코리아,즉 고구려(corea=핵.중심)다!







 

신용하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1961년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졸업
△1964년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하버드대 역사학 및 극동어 박사과정 수료
△1975년 서울대 문학박사(사회학)
△1975∼2003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사회사, 사회사상사)
△현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한성대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은 세계 속 명칭이 코리아(Corea, Korea)이다. 코리아의 명칭은 고구려에서 나왔다.
고구려를 중국에서는 당시에 대부분 고려(高麗)라고 불렀다.
‘이십오사’ 같은 정사에도 고구려를 3분의 2는 ‘고려’라고 쓰고 3분의 1만 ‘고구려’라고 기록했다.
고려의 현재 중국어 발음은 ‘카오리’지만 고대 발음은 ‘코리(Kori, Kor~ee)’이다.

 

돌궐(투르크)민족이 중국 북방을 지배하다가,
서방으로 이동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 등 유럽에 진출했는데,
투르크족에 의해 서방세계에 육로로 ‘코리아’가 먼저 알려졌다.

 

8세기 전반기에 세워진 오르혼 돌궐비문에 ‘맥(밝)코리’라는 나라가 나온다.
이것은 ‘맥족(밝달족) 고구려’의 준말로서,
투르크족은 서방으로 이동하면서 고구려를 ‘코리’로 서쪽세계에 알렸다.

 

이어 10세기 초에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수도를 송악(개성)으로 정하고
후고구려(後高句麗)를 건국했다가, 이를 줄여 고려(高麗)로 바꾸었다.
고려는 해상무역을 발전시켜 남송을 거쳐 동남아와 아랍세계와 무역을 했는데,
이때 ‘코리아’가 해상무역로를 통하여 다시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므로 ‘코리아’의 명칭은 고구려나 고려가 ‘코리아’로 변천된 것이며,
코리아의 명칭 기원은 ‘고구려’이다.

 

민족적 계보와 언어·문화는 물론이요,
국가와 민족 명칭에서도 고구려는 한국민족의 고대국가임이 불을 보듯 명백한 것이다.

 

한국 국민과 정부는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주장이
‘코리아’의 기원까지 빼앗으려는 ‘역사침략’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장래 가공할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역사침략에 당당하고 강력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다.

 

중국 당국은 종래 마오쩌둥(毛澤東)이나 저우언라이(周恩來) 시기에도 없었던
이 무지몽매한 동북공정 및 일부 중국 역사학자의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침략사관 망상과
‘역사침략’을 반드시 폐기해야 할 것이다.


○ 중국 正史도 “고구려는 외국”… 동북공정은 자기부정

 

중국 사회과학원이 2007년 2월 ‘동북공정’을 마무리하면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결론을 만들고
이제는 이 주장을 학교교육, 관광사업, 대중교육 등에 확산시키고 있다.

 

이는 1차적으로 고구려의 민족적 계보 문제이다.
중국문헌 ‘후한서’ 예(濊)전은 “예, 구려 및 옥저는 모두 본래 조선(朝鮮)땅이었다”고 기록했다.
고구려를 고조선 계열로 기록한 것이다.

 

중국 25개 왕조의 정사인 ‘이십오사(二十五史)’는
고구려를 외국이라고 반드시 ‘외사(外史)’에 넣어서
동이(東夷)나 북이(北夷)편에서 간단히 외교관계만 기록했다.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는 망상하지 않고 완전히 ‘외국’으로 간주한 것이다.

 

한국 고문헌도 모두 고구려를 고조선과 부여 계열 국가로 기록했다.
‘삼국유사’ 왕력편은 “동명왕은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기록했다.

 

고조선(단군 조선) 왕의 독특한 호칭인 단군(檀君)은 뜻으로 풀면 ‘밝달 임금’이고,
음을 취하면 천왕(天王), 천제(天帝)의 뜻이다.
단군은 제1대 단군에게만 고유명사처럼 쓰였고, 나머지는 천왕·천제란
뜻의 보통명사였다.

‘삼국유사’에서 “동명왕은 단군의 아들이다”라고 것은

“주몽은 고조선 왕족의 후예이다”라는
이다.

 

가장 명백한 증거자료는 고구려 당시의 기록과 유물이다.
당시의
‘광개토대왕(호태왕)비’ 비문에는 시조 주몽은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라고 했다.
이때 천제는 단순한 하느님(上帝)이 아니라 고조선의 단군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주몽이 고조선의 왕족 계보임을 밝힌 것이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남하할 때 엄리대수 강을 만나자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라고 울부짖으며 구원을 호소했다고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도 주몽이 고조선 왕족계보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북부여 사람들이 주몽을 천왕랑(天王郞)이라고 불렀다고 했는데,
번역하면 그 뜻은 ‘고조선 왕족 청년’이라는 뜻
이다.

 

종래 주목하지 않았던 고고유물의 증거도 있다.
필자가 10여 년 전 답사 때,
장수왕릉(장군총)의 정면에서 후미 우단 측에 당시 원형대로 만든 고인돌이 남아 있어
장수왕(고구려왕)이 고조선 후예임을 밝혀 주고 있었다.

 

 

 

[중국에선 천자(天子)만 독점했던 ‘하늘의 후손’이라는 제왕관과 중화질서와 차별되는 독자적 천하관을 보여 주는 고구려의 역사 기록이 적힌 동양 최대의 비석 광개토대왕비. 동아일보 자료 사진]

 

 

광개토대왕릉은 광개토대왕비의 근거리에 폐총이 되어 있었는데,
관을 넣는 왕릉 정상은 꺼져 내려앉아 허리를 굽혀 간신히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광개토대왕릉에도 후미 우단에 별도로 당시의 고인돌이 남아 있어서,
광개토대왕이 고조선 왕족 후예임을 밝혀 주고 있었다.
고인돌이 고조선의 독특한 무덤 양식임은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고구려는 강성하여 중국 고대국가들도 두려워했던 당당한 독립국가였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고구려가 수나라에 신복(臣服)하지 않는다고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을지문덕에게 완패하여 수나라 병사 수십만이 죽고 1만여 명이 고구려에 포로로 잡혔다.
수나라는 이 패전이 주원인이 되어 멸망했다.

 

뒤를 이은 당(唐)의 고조(高祖)는
서기 662년 고구려 영류왕에게 공식 편지를 보내어 포로송환을 요청했다.
이때
당나라는 고구려를 자기의 지방정권이라고 간주했을까?
그와 반대다.
‘구당서(舊唐書)’에 수록되어 있는 당 고조의 공문편지에는
“이제 두 나라(고구려와 당)가 화친을 통하게 되었으니(今二國通和)”라고 시작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때 당 고조가 고구려를 당나라의 일개 지방정권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당과 고구려가 대등한 두 개 독립국가로서 화친을 하게 되었음을 공문으로 기록하고,
이것을 ‘구당서’에 수록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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