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 라이브쇼 프로그램 이미지

교양

박종진 라이브쇼

진부함을 거부하는 시사토크의 끝판 왕
트릭 없는 쇼맨 ‘박종진’의 날카로운 시선
‘사실’보다 ‘진실’을 보여주는 버라이어티 토크쇼!!






라이브쇼 - 시청소감

라이브쇼 - 시청소감
군인과 충직의 표상-고구려 명장 부분노
  • 페이스북
  • 트위터
  • 이메일보내기
  • URL복사
2016.09.05윤복현 조회수 491

고구려 국시는 단군한국의 회복=다물

 

단군한국(대한민국)의 직할영토

 

 북-지나 국경조약를 통하여 간도를 중공에 귀속시키고 한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분할시켜 버린  김일성은 한민족이 아닌 반민족 흉노족이다


고구려 부분노의 상무정신으로 궤멸해야 할 김일성일당


군인과 충직의 표상-고구려 명장 부분노





고증통하여 정사로 인정된 한민족 정통사서 [환단고기]통한 올바른 고구려 건국사


[고구려 남생비문에서 연개소문 아버지 이름과 환단고기 기록과 일치.장수왕의 연호가 건흥이라는 충주 고구려비문과 환단고기 기록과 일치한다]


5호16국의 주역 선비족을 고구려 초기에 굴복시켜 속민화한 용장 지장 덕장의 고구려 명장 부분노

 

부분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고구려 선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재위 11년, 서기 9년이다. 그해 4월에 유리명왕이 여러 신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선비족이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 앉아 지키므로

우리나라에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소. 만일 이 선비 오랑캐들을

무찌르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큰 상을 내리겠소.”

 그러자 부분노가 나서서 말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튼튼한 나라로서 사람들이 용감하지만 미련한지라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계략으로써 굴복시켜야 합니다.” 유리명왕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부분노가 이렇게 대답했다.




“첩자로 하여금 적의 성안에 들어가게 해 거짓말로 우리 고구려는 땅이 좁고

군사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감히 선비를 치지 못한다고 하면 놈들이 틀림없이

우리를 만만히 여겨 수비를 게을리 할 것입니다. 소장이 그 틈을 타 정병을

거느리고 지름길로 가서 산속에 숨어 적의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때 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오랑캐의 성 남쪽으로 보내시어 싸움을 걸게 하신다면 놈들은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 올 것입니다. 이 때 소장은 정병을 이끌고

놈들의 성으로 쳐들어 가고, 왕께서는 날쌘 기병을 거느리시고

놈들을 양쪽에서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유리명왕이 부분노의 전략에 따라 선비족 토벌군을 일으켰다.

선비족이 고구려 군사를 얕잡아 보고 성문을 열고 출전하자 부분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군사를 거느리고 성문 안으로 쳐들어 갔다.




그러자 소수의 고구려 군사를 추격하던 선비족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다시

성으로 되돌아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부분노가 성안에서 수많은 적군을

목 베어 죽이고, 유리명왕은 강병들을 거느리고 성 밖에서 달려드니

선비족은 앞뒤로 협공당하게 되자 마침내 항복하고 고구려의 속민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 유리명왕은 전공이 으뜸인 부분노에게 상으로

식읍을 내리니 부분노가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모두 대왕의 빛나는 무위(武威) 때문이지 제게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유리명왕은 식읍 대신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부분노에게

상으로 주었다. 이 기록을 보면 부분노는 용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병법에도

통달한 지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건국 수도 홀본성. 부분노 장군은 이 시기에 추모성왕을 도와 제국의 토대를 다졌다.

삼실총 벽화의 고구려 무사도. 부분노 장군도 이처럼 늠름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부분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MBC사극'주몽'에서 부분노 역


부분노(扶芬奴)는 고구려 개국성조 추모왕(고추모)과 제2대 태왕인

유리명왕(琉璃明王)을 보좌해 건국 초기 대제국의 기틀을 다진 장수였다.

그의 대표적 공은 추모왕의 명에 따라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해

고구려의 영토로 만들고, 유리명왕 때에는 선비족(鮮卑族)을 토벌해

고구려의 속민으로 삼아 고구려의 정벌 때 용병으로 활용한 것이다.

5호16국 시기에 선비족이 지나북부를 차지하게 된 배경도

고구려의 용병생활을 통하여 고구려의 기마술을 익혔기 때문이다.


 특히 선비족을 토벌할 때에는 처음부터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탁월한 지략으로 적군을 공략, 단순히 용맹만 빼어난 장수가 아니라

병법에도 통달한 지장이라는 사실도 보여 줬다.


 부분노는 [삼국사기]에 겨우 두 차례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기록만으로도 그는 탁월한 장수였고, 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가

매우 컸음을 알게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추모왕 재위 6년(서기전 32년) 조에

이렇게 나온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를 시켜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행인국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고을을 만들었다."

 부분노와 함께 행인국을 정복한 오이는 추모성왕·鄒牟聖王이 동부여에서

골본부여로 망명할 때 그를 수행한 세 사람의 심복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머지 두 사람은 마리(摩離)와 협보(陜父)라고 기록은 전한다.

 고구려 고추모는 부여말로 ‘활 잘 쏘는 이’ 또는 ‘우두머리’를 가리킨다고 한다.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 있던 중국 길림성 집안시의 광개토태왕 훈적비는 이렇게

시작된다.

 “예전에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를 세우실 때 북부여로부터 나오셨는데,

천제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시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셨는데, 나실 때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으셨다.”

 추모성왕이 뒷날 고구려의 국모로서 여신으로 신격화된 유화부인(柳花夫人)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서기전 58년 음력 5월 5일. 그 지난해 어느 여름날, 유화는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解慕漱)의 차남인 고진의 손자인 고모수(북부여 옥저 후)와

정분을 통하여 임신하게 된다.
부분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유화가 임신하자 아버지 하백은 가문의 망신이라면서 유화를 집에서 내쫓아 버린다.

유화는 출산한 고추모를 데리고 동부여 금와왕의 후비가 되어 동부여 궁궐에서

고추모를 키우게 된다.

 추모는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또 골격이 튼튼하고 외모가 영특하게

생겨 보는 사람마다 장차 왕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금와왕이 뒷날 자신과 자기

아들의 왕위가 위태로울까 두려워해 일찌감치 죽여 후환을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여러 유력자, 곧 부족장들이 한결같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혈육이라는 이처럼

비범한 아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므로 죽이지 못 하고 유화부인에게

돌려주어 기르도록 허락했다.
부분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유화의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활을 매우 좋아했고 잘 쏘았다.

나이 일곱 살이 되자 스스로 활을 만들어 궁궐 안팎을 돌아 다니면서 무엇이든

보이는 대로 쏘는데 백발백중의 신궁(神弓)이었다. 신궁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적이나 짐승을 명중시킬 수 있는 활의 명인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부분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 때 금와왕에게는 아들이 일곱이나 있었는데 무엇을 하고 놀아도 추모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부왕에게, “아버지! 저 과부의

자식 추모를 하루빨리 죽여 없앱시다. 일찌감치 후환을 없애자고요!” 하고 졸랐다.

하지만 중앙집권도, 절대 왕권도 확립되지 않은 부여시대에는 왕이라도 부족장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추모처럼 비상한 인물을 마음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금와왕은

기회를 보아 무슨 구실이든 붙여서 죽여 없애려고 추모에게 왕궁의 마구간에서

말먹이는 천한 일을 시켰다. 그때 추모의 나이 19세였다.

 아마도 부분노는 추모가 이처럼 동부여 왕국에서 매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위태로운 젊은 시절을 보낼 때의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추모의 목숨을 노리는

금와왕과 왕자들의 의도가 갈수록 노골화하자 하루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차 왕자들이 너를 해코지할 터이니 일찌감치 방도를 마련해둠이 좋지 않겠느냐?”

 추모가 부여에서 망명한 것은 21세 때인 서기전 38년. 그 지난해에 혼인한 아내

예씨(禮氏)는 임신 중이었다. 추모는 오이·마리·협보 세 명의 심복만 이끌고 동부여의

도성을 빠져 나와 엄리대수를 건너 마침내 골본부여, 오늘날 길림성 환인에 이르렀다.

 고추모의 망명 집단은 비류수 강변에 마을을 이뤄 근거지를 마련한 뒤 새로운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고, 자신의 성을 고씨(高氏)라고 했다. 하지만

부여에서 쫓겨 온 젊은 망명객에 불과한 추모가 이들 소수의 추종세력만으로

고구려 건국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이룩했다고 볼 수는 없다.
고구려 초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고구려 선비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조는 이 대목에서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매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고, 왕이 죽으매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말도 있다."고 덧붙였다.

 당시 주몽의 나이 22세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건국이 맨주먹의 추모가 새장가를

잘 간 덕분에 식은 죽 먹듯이 손쉽게 이뤄졌을 리는 만무하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고추모집단이 고구려를 건국한 비류수 하류의 골본부여 땅. 왼쪽 뒤편에 골(홀)본성이 있었다.  

골본성 동문터. 지금은 오녀산성으로 이름이 바뀌고 중공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동부여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도망쳐 온 불과 21세의 젊은이가 아무

밑천도 없이 그저 인물 하나만 잘난 덕에 아들 없는 골본부여 왕의 사위가 되고,

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해 아무 문제도 없이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고 시조가

되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어찌 믿을 수 있는가?
부분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사실 고추모는 골본부여의 고무서 단제의 둘째 공주인 소서노(召西奴)를

부인으로 맞았던 것이다. 21세의 고추모가 소서노를 처음 만났을 때 소서노는 29세.

나이도 8세 연상이요, 게다가 비류.온조라는 두 아들까지 딸린 과부였지만,

정치세력이 없던 고추모가 소서노를 만난 것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다.

 고추모가 동부여에 본부인이 있는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밝혔는지 총각이라고

속였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혼인을 했고, 결과적으로 후계자 아들이 없던

골본부여 단제의 후계자가 되어 왕에 올라 권력을 장악하고, 국호도 선조의 나라이름인

'고려(고리)'로 바꾸고, 수도성도 환인 서쪽의 험준한 홀본산에 성벽을 쌓으니

그 때가 기원전 37년 10월이었다.

 단군한국의 황족으로 부여를 건국한 해모수의 직계손자인 고추모라는 걸출한

젊은 영웅이 골본부여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라는 새 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수많은 씨족과 부족이 찾아와 신민으로서 보호받기를

자청했을 것이고, 수많은 용사와 재사도 찾아와 태왕의 신하가 됐을 것이다.

어쩌면 부분노도 이 무렵 추모태왕의 장수로 발탁된 것은 아니었을까?

 연호를 '다물'로 정한 추모왕은 건국 직후부터 자신이 오래 전부터 품어 보고

키워 온,단군한국의 회복'이라는 원대한 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바로 단군왕검의 한국과 해모수의 부여를 잇는 천손(天孫)의 나라,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단군한국의 유민들이 여기저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세운 수십 개의 나라를 합쳐 다시 하나의 대제국으로 아우르고자 했다.

 즉위 원년에 추모왕은 군사를 이끌고 가장 가까운 말갈(여진)족을 쳐서

멀리 북쪽으로 쫓아 버리고, 그 다음에는 비류수 상류의 송양국을 복속시켰다.

추모왕과 활솜씨를 겨뤄 상대가 되지 않자, 송양왕이 항복하고 나라를 바쳤던 것이다.

왕이 망명 동지인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령해 태백산(백두산) 동남쪽에 있는

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영토에 편입시킨 것은 재위 6년째인 서기전 32년의 일이었다.

 또 재위 10년 11월에는 장수 부위염(扶尉厭)을 보내 북옥저를 쳐서 없애고

영토로 삼는 등 쉴 새 없이 국토를 확장하고 백성을 늘려 힘차게 부국강병의 길을

달렸다. 이러한 정복사업에 오이·마리·협보·재사·무골·묵거 등 개국공신들과 더불어

부분노 장군의 활약도 컸을 것으로 추측된다.

 추모왕은 서기전 19년 9월에 재위 19년 만에 세상을 떴다. 그 때 그의 나이 불과

40세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재위19년 조에 이르기를, "여름 4월에 왕의 아들

유리가 동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돌아 오니 왕이 기뻐해 태자로 삼았다."

고 했는데, 그 5개월 뒤에 추모왕이 세상을 뜬 것이다. 이렇게 유리명왕이

고구려의 왕위를 이었고, 부분노 장군은 2대째 유리왕을 섬기게 됐다.

부분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부분노가 다시 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재위 11년, 서기 9년이다. 그해 4월에 유리명왕이 여러 신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선비족이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 앉아 지키므로

우리나라에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소. 만일 이 선비 오랑캐들을

무찌르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큰 상을 내리겠소.”
부분노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러자 부분노가 나서서 말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튼튼한 나라로서 사람들이 용감하지만 미련한지라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계략으로써 굴복시켜야 합니다.” 유리명왕이 말하기를,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부분노가 이렇게 대답했다.

 “첩자로 하여금 적의 성안에 들어가게 해 거짓말로 우리 고구려는 땅이 좁고

군사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감히 선비를 치지 못한다고 하면 놈들이 틀림없이

우리를 만만히 여겨 수비를 게을리 할 것입니다. 소장이 그 틈을 타 정병을

거느리고 지름길로 가서 산속에 숨어 적의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때 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오랑캐의 성 남쪽으로 보내시어 싸움을 걸게 하신다면 놈들은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 올 것입니다. 이 때 소장은 정병을 이끌고

놈들의 성으로 쳐들어 가고, 왕께서는 날쌘 기병을 거느리시고

놈들을 양쪽에서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유리명왕이 부분노의 전략에 따라 선비족 토벌군을 일으켰다.

선비족이 고구려 군사를 얕잡아 보고 성문을 열고 출전하자 부분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군사를 거느리고 성문 안으로 쳐들어 갔다.

그러자 소수의 고구려 군사를 추격하던 선비족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다시

성으로 되돌아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부분노가 성안에서 수많은 적군을

목 베어 죽이고, 유리명왕은 강병들을 거느리고 성 밖에서 달려드니

선비족은 앞뒤로 협공당하게 되자 마침내 항복하고 고구려의 속민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 유리명왕은 전공이 으뜸인 부분노에게 상으로

식읍을 내리니 부분노가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모두 대왕의 빛나는 무위(武威) 때문이지 제게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유리명왕은 식읍 대신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부분노에게

상으로 주었다. 이 기록을 보면 부분노는 용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병법에도

통달한 지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진에 간첩을 들여보내고,

아군이 약한 듯이 보이는 허허실실의 전법 등이 모두 손자병법 등에 나오는

전략전술에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부분노 장군은 이렇게 삼국사기에 딱 두 차례만 등장하고 기록에서 사라져 버렸다.

 부분노 장군이 선비족을 토벌할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왜냐하면 부분노 장군의 나이가 40세에 세상을 떠난 고추모와 비슷하다고 보면

유리명왕 11년에 그의 나이가 50세가 약간 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그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부분노는 백전노장으로서 유리명왕을 도와 고구려 창업기의

부국강병책을 추진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

댓글 0

(0/100)
  •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