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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라이브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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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0윤복현 조회수 364


한민족 정통사서인 [환단고기]는


신시배달국의 천왕이였던 치우가


공손헌원을 사로 잡아 항복을 받고


신하로 삼아 예법을 배우게 했다 한다


공손헌원은 황하에서 고향을 그리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사마천은 공손헌원이 승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공손헌원이


승리했다면 유방과 제갈량이 전투에


앞서 제사지낸 군신이 치우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사마천 기록은 말 그대로 사기다!



지나땅의 배달국 제후였던 소호씨는


공손헌원씨와 연합하여 치우천왕에 대항하였다!


중동에 소호씨가 슈메르문명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은 공손씨가 치우천왕에게 패하자


서진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소호씨가 남긴


산동의 대문구 문화와 유사한


트로이.그리스 등 지중해문명의


주역은 소호씨라고 해야 맞다!

산동성 대문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삼족기는 단군한국의 대표적 제기 유물이며,


비파 청동검은 단군한국의 대표적인 권력 도구다!


이러한 삼족기와 비파 청동검이 트로이 유적지에서


발견된다면 이는 트로이 사람들이 서진한


단군한국인들이라는 의미가 된다!그리고


트로이 사람들이 로마를 건설했다면 로마제국의


주역 역시 단군한국인들이 되는 것이다.


지중해 문명의 주역이 서진해 온 동방 사람들이라면


서양문명의 뿌리는 동방 한국인 것이다!


참고로 지나문명의 뿌리가 되는 산동지역의


대문구 문명의 대표적 아이콘이 바다에서 해가


떠 오르는 산의 땅을 그린 아사달 문양인데,


산동성 지역의 선사유적지에서는 거석문화를


중심으로 바위에 해와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고,


봉황을 토템으로 삼았다. 이는 산동지역의 대문구


문화의 주역이 동이족이였음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한다.

산동성 대문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들 대문구 문화인들은 중동에 슈메르문명을 건설한


슈메르 문화와 유사한데, 대문구 문명이 슈메르문명보다


200년이 앞선다. 산동지역의 고대인들은 강강술래 문화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서남해 마고한국의 문화이다!

산동성 대문구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따라서 1만년전 육지였던 서남해 마고한국 문화인들이


바다가 되자, 정착한 땅이 산동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압록강.요하지역으로 이주하여 마고문명을 건설했다.


따라서 산동.요하.압록강.송화강으로 이주해 간 마고인들이


북-서진하여 바이칼.중앙아.중동.유럽.아메리카문명을


건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슈메르족의 일부가 인도의


인더스강 지역에서 인더스문명을 건설했는데, 그들의 언어가


1만년 이상이 된 드라비다어인데, 80%가 전라도 사투리다.


이것은 서남해 마고한국인들의 언어가 전라도사투리였다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마고한국인들이 바다가 되자,


가장 가까운 영산강지역으로 이주하여 마고한국어를 사용하니


오늘날의 전라도 사투리가 된 것으로 봐야 정확하다./동방의인(윤)



[고고학 자료]트로이의 정체, 이럴수가?


독일의 하인리히 슐리만은  1870년에 트로이의 발굴을 시작하였는데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트로이 등의 위치



슐리만이 1890년 죽은 뒤에도 그의 동료 빌헬름 되르펠트(1893~1894년)가 계속 발굴작업을 진행했으며, 이어서 신시내티 대학교 원정대(1932~1938년)가 발굴작업을 계속 수행하였다.


하인리히 슐리만과 빌헬름 되르펠트는 사람들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살다가 마침내 파괴되어 버린 트로이 지역에서 깊이에 따라 유적 층을 차례차례 발굴할 수 있었는데, 모두 9개의 유적 층이 나타났으며,  아홉 기(紀) 각각의 시대별 특징과 정체를 밝힐 수 있었다고 한다.


가장 깊은 곳에 남아있는 제1~7기 유적은 요새로서 트로아스의 수도, 왕의 가족·신하·노예들이 살았던 왕의 거주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제1~5기 유적은 청동기시대 초기(서기전 3,000~1,900년경)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는데, 이 시기에 살던 사람들은 에게해(Aegean Sea) 키클라데스(Kikladhes) 제도, 미노아 문명의 크레타(Crete) 섬, 헬라도스 문화기의 그리스 본토에 살던 사람들의 선조였을 것이며, 아나톨리아(Anatolia) 남서부 또는 시리아로부터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각 지명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또 제6~7기 유적은 청동기시대 중기와 말기(서기전 1,900~1,100년경)에 해당하는데, 제7a기는 불과 한 세대 동안 지속되다가 서기전 13세기경에 화재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즉, 제7a기 유적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Iliad)』에 묘사되어 있는 프리아모스 왕의 도시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 파괴된 이후, 약 400년간 이곳은 사실상 버려졌다가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제8기이며,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의 일리온(트로이)은 제9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트로이 지역 발굴현장의 모습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2] 트로이 현장의 모습


마치 정교한 고구려 성곽 같지 않는가?




트로이는 서기전 3,000~2,000년경에 번성한 문화 중심지로서, 트로아스 지역의 농업 공동체들을 지배하던 왕권의 수도였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서기전 1,100년경에 트로이가 멸망하면서 버려졌다가 서기전 700년경에 그리이스 사람들이 트로아스 지역을 차지하면서 트로이에 다시 사람들이 살게 되었으며, 일리온이라는 이름으로 4세기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서기전 6세기말부터 이 지역은 페르시아인, 알렉산드로스 대왕, 아시아 남서부의 셀레우코스 왕조, 페르가몬 왕국, 로마인들에 의해 차례로 점령당했다고 한다.


서기전 85년에 로마인이 약탈하였으나, 같은 해에 로마 장군 술라가 부분적으로 복구시켰으며,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다른 황제들이 많은 애정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러나 324년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 건설되고 나서 일리온(트로이)은 망각 속으로 사라져갔다고 한다.


그런데 독일 베를린 신박물관에 하인리리 슐리만이 발굴한 트로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3] 독일 베를린 신박물관 슐리만 트로이 유물 전시실 




상기한 전시물에서 유난히 관심이 가는 것은 삼족기이다.


[그림 4] 산동성 대문구문화 유물들


왜냐하면 현재의 산동성 지역으로 중심으로 발굴된 대문구 문화(서기전 4,300~2,500년경) 유물들과 매우 유사한 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즉, 대문구 문화에 속하는 유물들의 모습은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다.


삼족기 등 유물들의 특징을 좀더 연구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특히 트로이 동검이 비파형 동검과 비슷하게 생겼다면, 청동의 성분 검사를 통해 결정적인 근거가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트로이에 살던 사람들의 선조가 그리이스 선조였는가, 아니면 동쪽에서 이주해간 사람들인가? 


또 트로이가 멸망하면서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이 현재의 로마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과연 트로이 유민들이 로마를 중심으로 로마제국을 건설한 것인가?



[그림 1] 트로이성 상상도



[그림 2] 트로이 유적


또 트로이 유적과 미케네 유적의 위치는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3] 트로이 유적과 미케네 유적 등의 위치


그런데 단군시대(서기전 2333년 이후)의 유적으로서 현재의 산동성 장구(章邱)시 용산진에서 발굴된 성자애유적을 비롯하여 용산문화(서기전 3,000~2,000년 경)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용산문화에 속하는 유적들은 산동성을 중심으로 강소성 북부, 안휘성 북부, 하남성 동부, 하북성 남부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대략  100여 군데 발굴되었다고 한다.

용산문화의 하층에도 마치 트로이 지역의 유적들이 층층이 발굴되었듯이 용산문화의 이전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대문구·북신·후이 문화의 유적들이 층층이 계층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대문구(大汶口) 문화의 시기는 서기전 4,100~2,600년 경 신석기시대 후기로 추정하고 있는데, 1959년에 산동성 태안(泰安)시 대문구(大汶口)에서 발견되어 1962년부터 발굴되었다고 한다.

대문구문화의 대표적인 유물의 모습은 [그림 4]와 같이 삼족도기인데, 대문구문화에 속하는 유적들에서 총 1,097개의 도기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또 도기에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도편에 새겨진 문자들의 모습은 [그림 5]와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4] 대문구문화 삼족도기



[그림 5] 도기에 새겨진 문자

    


[그림 6] 도편에 새겨진 문자들의 모습


북신(北辛) 문화의 시기는 대문구(大汶口) 문화보다 이른 서기전 5,300~4,100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하는데, 1964년에 등주(滕州)시(당시는 등현) 북신(北辛) 가도에서 발견되었다. 북신문화는 대문구문화(서기전 4,100~2,600년 경)의 유적 아래에 있으며 1978~79년에 일부를 발굴하였다고 한다.

북신문화 유적에서는 황갈도(모래가 섞인 흙을 낮은 온도로 구운 도기) 또는 홍도(치밀한 진흙을 높은 온도로 구운 도기)로 만들어진 솥 등 조리기구가 발견되었고, 일부는 보다 더 높은 온도로 구운 회도 또는 흑도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 돌도끼나 돌낫 등 마제석기, 타제석기, 골각기 등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북신문화는 채집이나 수렵 외에 잡곡을 재배하는 원시적인 농업을 경영하였으며, 돼지·소 등을 사육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북신문화에 속하는 유적지의 위치는 [그림 7]과 같으며, 그 당시 신석기인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산동성 치박시 기원(沂源)현 편편동(扁扁洞) 동굴유적의 모습은 [그림 8]에서 보는 바와 같다.

또 발굴된 대표적인 유물들은 [그림 9]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7] 북신문화에 속하는 유적지




[그림 8]  산동성 치박시 기원(沂源)현 편편동 동굴모습



[그림 9] 북신문화의 유물들


후이(後李, 허우리) 문화는 서기전 6,500~5,500년 경의 신석기 초기 문화로서 산동성 임치시 제릉가도(斉陵街道) 후리관촌에서 발견었는데, 고속도로 건설에 앞서 1986~1990년에 발굴되었다고 한다.

후이 문화는 방형의 수혈식 주거에 살면서, 개와 돼지를 기른 것으로 추정되며, 홍갈색 도기와 각종 석기·지하저장고·무덤 등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후이 문화에 속하는 유적들은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북신문화와 연계된다고 한다.

후이문화에 속하는 유적들의 위치는 [그림 10]과 같으며, 대표적인 유물들의 모습은 [그림 1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0] 후이문화에 속하는 유적들의 위치



[그림 11] 후이문화에 속하는 유물들


그런데 산동성박물관은 중화인민국 내에서 가장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신석기시대 문화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소개되어 있다.


"During the Neolithic Age, “Eastern Yi-barbarians”, the aboriginal inhabitants of Shandong Peninsula, created an uninterrupted lineage of cultures; Houli, Beixin, Dawenkou, and Longhsan. These innovative people made great achievements is technologies of stone tool manufacturing, jade working, pottery, metallurgy, textile, wine brewing, sculpture and inlaying, writing, divination, Bagua, calendar, and medicine. When they began to construct walled settlements during the Longshan period, they crossed the threshold of civilization and state. These early states took birds as their totems, and their leaders, such as Tai Hao, Chi You, Shao Hao, Da Shun, became the subject of heroic epics of later times."


즉,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에 '동이(東夷)족'이라고 불린 산동반도의 거주민들은 후이(後李, Houli), 북신(北辛, Beixin), 대문구(大汶口, Dawenkou) 및 용산(龙山, Longshan) 문화 등으로 이어지는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들은 매우 혁신적이어서 석기제작, 옥기제작, 도기, 금속, 섬유, 술, 조각과 상감, 글자(陶文), 점(亀卜), 원시팔괘(八卦), 역법(曆法), 의술 등 분야에서 어마어마한 성과를 이루어내었다.

이들은 용산문화 시기에 성곽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도시화와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초기 국가들은 를 토템으로 삼았으며, '태호(太昊, Tai Hao)', '치우(蚩尤, Chi You)', '소호(少昊, Shao Hao)', '대순(大舜, Da Shun)' 등과 같은 지도자들이 영웅적인 서사시의 주인공이 되었다."


최근에 지은 산동성박물관과 진열된 유물 일부의 모습은 [그림 12]와 같다.<계속>


[그림 12] 산동성박물관과 진열된 유물 일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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