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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일당과 종북세력의 맥아더와 이승만 증오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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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3 윤*현 조회수 188 |
동방 한국은 인류의 대제사장족이고 지구촌의 천제국 한국의 대통령은 반드시 제천해야만 하는 지구촌의 천제 양심과 공의의 하나님은 자유-민주-시장-복지-공존의 신이다!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공-과는 역사평가에 맡기고 미래로 나가야 합니다!
김구,"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반공 자유민주주의자 이승만없는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승만과 김구는 반공과 반탁운동에 손을 잡고 앞장섰으나,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민주당계가 이승만을 비난하지만, 귀국하여 정치세력이 없던 이승만을 도운 정당이 바로 민주당의 전신인 한민당입니다. 그래서
8.15이후 정국상황 인식과 각 계파간의 치열한 싸움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당시 철저한 반공자유민주주의자였던 동아시아
미사령관 맥아더와 친분이 있던 이승만이 유리한 상황이였지만, 당시 미.소 냉정상황에서 이승만의 반공자유민주주의 선택과
종북극좌세력 진압이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가능케 하였던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평가라 할 것입니다. 북한 김일성
집단이 맥아더와 이승만을 증오 협오하는 결정적 이유는 바로 6.25남침전쟁을 통한 한반도 적화통일을 가로 막은 장본인들이기 때문!
따라서 김일성일가 세습독재체제에 동조하거나 종노릇하는 소위 종북주의 세력이 맥아더와 이승만을 증오하거나 혐오하고 있습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11월 30일 이승만을 방문한 뒤 번복하여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김구의 방문을 받고 한시간여 요담을 한 후,
김구는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김구의 성명 발표 후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서북청년단 1주년 기념식에 참석회 훈화를 하였다.
그러나 협력관계가 강화되어 가던 12월 2일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승만이 대세인 상황에서 이승만을 라이벌로 생각해 버린 나머지, 권력욕에 눈이 멀었던 김구는 역시 흉노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이승만은 반공주의적인 발언을 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자신의 정치노선을 분명히 드러내게 된다.
이러한 그의 과감한 발언으로 그는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로부터 '늙은 보수꼴통'이라고 비난받기도 하였다.
1946년 6월 11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땅에 발못붙이게 하자,"고 역설하면서, "최고사령부라고나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함을 맹세"할 것을 요구하였다.그러자 김구는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화답하였다.
8.15이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이 남기고 간 시라고 북한에서 선전하네 ㅋㅋㅋ
영상증거[북한의 김일성 선전 영상물]
김구.김규식이 홍보선전에 적극 이용되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74et5ujFK0
김구는 유엔이 결의한 한반도 총선거 실시를 통한
한반도 통일국회 통일정부 수립에 이승만과 함께
정치의 뜻을 같이 했으나, 결국 한국 민주당의 이승만지지자였던
장덕수가 암살을 당한 사건을 계기로 주범으로 김구가 지목되어
검찰조사를 받자, 김구는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침묵했다.
이기붕 일가의 부패와 독재로 결국 국민이 하야요구를 하자, 하야해 버린
확고한 민주주의자였던 이승만이 검찰수사를 막을 수는 없지 않는가?
김구는 이에 크게 삐진 나머지 소련군정하에서 남북연석회의를 내세워
김일성헤게모니 장악에 혈안이 된 김일성을 찾아 방북을 하고 말았다.
결과는 결국 지금
북한체제유지에 악용되는 홍보선전물의 인물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자고로 정치를 하겠다고 한다면 인류보편적 가치로써
국민에게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있는 무기명 투표권을 전제로
자유.민주.복지.공존이라는
홍익적 가치를 신념으로 삼아야 한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11월 30일 이승만을 방문한 뒤 번복하여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김구의 방문을 받고 한시간여 요담을 한 후, 김구는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김구의 성명 발표 후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서북청년단 1주년 기념식에 참석회 훈화를 하였다. 그러나 협력관계가 강화되어 가던 12월 2일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가게 되었다.
1947년 12월 2일 김구는 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되어 미군정에 소환당했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배신감에 크게 분노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이승만의 민족대표단은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 결별하게 되었다.이승만은 장덕수의 암살범을 김구라고 확신했고, 경교장 측에서 지원, 구명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절한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함께 했던 김구와의 우정에 금이 간 후 이화장을 찾아온 비서 박용만과 대화하던 중
라며 말끝을 흐리고 눈물을 흘렸다. 박용만에 의하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이박사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머뭇거렸으나 슬픔이 북받쳐 오르는 바람에 아무 말도 더 못했다고 했다. 이날 흘린 이승만의 눈물은 김구선생과 갈라선 이승만 한 사람의 눈물이 아니라 한국의 앞날을 걱정한 온국민의 눈물이기도 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1910~)의 회고에 의하면 김구가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라며 조롱하였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또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을 비난했다. 김선에 의하면 '이박사는 밤낮으로 하지 중장을 욕한다.'고 회고했다. 그에 의하면 '자기(하지 중장을 지칭) 집에 가면 행랑살이 밖에 못할 것이 총선 하는거 자꾸 연기하자 그런다고' 하는 것이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을 제1대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은 윤보선을 자신의 국회의장 비서로 채용했다.
한민당에 의해 내각 책임제가 언급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하며 6월 16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하였다.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직전인 8월 11일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장면 등을 대표로 지목, 한국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때 장면을 선택한 이유는 영어에 능한 몇 안되는 인사임과 동시에 로마 교황청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에서였다. 5·10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패배한 윤보선(尹潽善)을 특별히 채용하여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삼기도 했다.
1949년 친이승만계 정당 대한국민당 창당 이후 독립촉성중앙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직계 정당인 자유당이 1952년 창당되었다. 그는 반공·반일적 정치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철저히 반일외교 노선을 지향하였다. 북한의 도발을 우려한 이승만은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했으나 미 국무성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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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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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 2016.01.03 22:15
20대 윤봉길 의사의 상해폭탄 의거가 없이는 김구 임시정부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하겠다고 한다면 안중근 장군과 윤봉길 의사의 멸사봉공 정신이 전제되야 하지요. 상종말아야 할 기득권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 때문에 부패하고 나라가 망하고 분열하기 때문이지요!
안*환 2016.01.03 22:08
스캔들 사건으로 현정부 출범시 물러났던 윤창중이란 사람은 안철수의원을 두고 말 하기를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고 비유하며 안철수가 문재인 민주당과 합당하는 것을 두고 문철수라고 실날하게 비판을 가하였었다. 필자는 백범 김구야 말로 남의 둥지에 알을 낳기를 즐겨하시던 인사는 아니었을까? 의구심을 가집니다. 백범이 암살된 경교장은 광산왕 최창학이 빌려준 집이었고 또한 조선일보 방응모사장의 많은 정치자금을 받아서 쓴 사람이었다.이철승의원 장준하선생 강원용목사등 우국지사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김일성이를 만나고 좌우합작이 실패하고 오자 방응모사장은 김구와 인연을 끊었었다...백범이 남긴 것은 일기장뿐이다. 도산선생이나 이승만박사는 저서와 논문,학교를 남기었다.
안*환 2016.01.03 21:51
백범 김구란 분을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바로 도산 안창호선생의 천거로 상해 임정의 경무국장자리에 올라서 경찰권을 가지니 밀정들을 소탕한다는 목적하에 일본군 밀정 아버지의 심부름을 했던 17세 소년 김도순을 즉결심판으로 총살한 일이 있었고 또한 105인 사건으로 함께 징역살이를 한 옥성빈,옥관빈,옥승빈 삼형제를 암살한 잔인했던 점이 문제고 또한 구쏘련 레닌의 정치자금 40만루불 사건에 공산당 자금을 김립이란 사람이 받아서 착복했다고 암살 했던 일 특히 안창호선생이 상해임정의 국무령[주석 前명칭]에 오르자 기호파인들과 합세하여 임정을 해산하고 도산선생을 쫓아내었던 엄연한 사실이 있다. 은혜를 원수로 되갚은 사람. 장덕수 암살사건 이전 여운형의 암살사건에도 백의사암살단의 주동자 염동진이와 각별한 사이였다.,해방후 여운형이 안창호계보를 이어서 뜨자, 정적으로 여긴 김구였고 김구는 도산선생이 상해 임정요원 아들 생일선물을 사러 시장을 나갔다 체포되었는데 다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몸을 피신하라고 연락을 주고는 안창호에게 기별을 하지 않았다.윤봉길의사 투척사건으로 독립운동가들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을 당시였다. 이승만정부 쿠테타를 꾀한 김구는 어떤점에선 일면 반역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