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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통령은 부여왕족/김일성은 흉노왕족/일본왕가는 백제왕족/당 왕족은 선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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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9 윤*현 조회수 185




국통과 황통맥에서 한국의 정통성/마고.황궁.유인.환인.환웅.환검(단군왕검)


=>부여=>고구려=>대진국=>고려=>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북한  포함)


단군한국=부여=고구려(대진국-고려-몽골-헝거리)=백제(일본.불가리아)=인디언


고구려 왕가는 단군한국의 황족/박근혜 대통령은 부여왕족


김일성은 흉노왕족/일본왕가는 백제왕족/당 왕족은 선비족


고구려의 속국들/선비(북위=수.당),거란(요).말갈(여진=청)


흉노(돌궐=터키)=단군한국의 제후국/단군한국에서 분가함


흉노는 단군한국의 통치제도인 좌-우현왕제를 모방하였다


유럽의 불가리아(부여+고리),헝가리(한+고리)는 부여(고구려) 나라들이다


유라시아를 지배한 징기스한의 몽골=고구려 왕가의 나라


아메리카 인디언 나라들은 만주의 부여(고구려) 나라들



한반도는 세계의 심장으로 단군한국(부여)을 계승하여 대륙과 해양을 지배한 고구려.백제도 수도로 삼았다!

단군한국의 지방관이였으나 다스림이 흉폭하여 고비사막으로 유배를 당한 색정이 왕노릇한 흉노(신라.가야)는 단군한국을 섬기고 조공을 바친 제후국이였다!

선비족의 경우 단군 대통령의 동생이 왕으로 임명되어 단군왕검의 피가 섞여 있다.그러니까 선비족

이씨가 지나대륙을 지배하는 당을 세우고 왕노릇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고,조선을 세워 왕노릇할 수 있었다.

박대통령은 부여왕가의 후손이고 이고,북한 김일성일가는 흉노신라왕가(경순왕)의 후손이고,일본왕가는 부여의 핏줄을 이어 받은 백제왕족이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와 완도에 청해진을 세운 해상왕 장보고는 고구려 보장왕의 후손으로 밝혀 지고 있다



정말 고구려.백제는 100만 대군으로 지나대륙을 휩쓸고 다녔나?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인가?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당나라에서 벼슬하던 신라의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관리에게 말하기를“고구려, 백제가 한창 강성할 때는 100만 대군을 보유하였으며, 남쪽의 오(吳), 越(월)과 북쪽의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공격하여 지나국의 골칫거리가 됐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고구려.백제가 100만 대군으로 지나대륙을 휩쓸고 다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아마 그 시기는 초원을 지배하고 남하한 선비족들이 지나대륙을 분열하여 여러 나라로 난립하던 5호 16국 전후 시기가 될 것이다. 고구려로는 광개토태왕시기이후 이고, 백제는 근초고 대왕 이후부터일 것이다.


고구려는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낸 광개토태왕을 기점으로 지나대륙과 만주.몽골.한반도.열도를 완전히 복속하여 장수태왕 시기에는 한성백제까지 멸망시켜 누구도 넘 보지 못한 세계최강국으로 성장하였다. 고구려보다도 먼저 고이왕 때 중앙집권국가를 실현한 이후 단일대오 시스템으로 근초고왕과 근구수대왕시기에 지나대륙 동남부지역과 일본열도을 차지하였고,


한성백제가 멸망한 이후 잠시 주춤하다가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동성대왕 시기에 다시 백제를 부흥시켜 고구려부터 상실한 지나대륙의 동남부 지역을 회복하고 북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고구려와 더불어 지나대륙을 호령했던 것이다. 지나대륙 동남부지역은 본래 단군3조선 중 번조선지역으로 기자조선을 끝으로 연나라 장수 위만과 한나라에게 상실한 땅이였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번조선지역에서 주로 접전하며 패권을 다투였다.


 


신라 최치원 진술대로 고구려.백제가 100만 대군으로 지나대륙을 휩쓸고 다녔을 최전성기 추정영역


선비족의 나라들인 5호16국 혼란시기를 평정한 북위(지나북부 차지)와 남제(지나남부차지)였어도 북위는 군사강국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 못하여 상국과 모국으로 섬겼으며, 남제 역시 백제의 군사적 지원없이는 존재할 수 없어 백제의 제후국이나 마찬가지였다.


북위는 백제때문에 지나남부를 차지하는 남제를 공격할 수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지나대륙을 통일하지 못하고 백제와의 10년간 전쟁에서 패하여 멸망하였고, 북위를 이어 지나대륙을 통일한 수나라도 섬겼던 고구려를 300만 대군으로 침략하여 멸망시키려다가 도리어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강인한 유전인자인 것이다.


한국의 식민사관에 찌든 강단사학자들이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백제의 지나대륙 정벌과 경영은 지나문헌들의 기록이 증언하고 있다. 고대 지나인들이 기록한 문헌기록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사학자들이라면 역사를 날조하는 지나국이나 일본의 간첩들이 틀림없거 광우병 걸린 정신병자들이 틀림없다.


백제와 북위의 전투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서기 488년 위 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라고 한 구절만 볼수 있는데 그 이후의 전투 상황은 알수 가 없다. 고구려본기 에는 한 구절도 보이지 않는다.

백제담로지역인 일본에서 돌아 온 백제 동성왕<이름:부여 모대>가 고구려 최전성기에 해당하는 장수왕 시기에 즉위하여 장수태왕의 손자인 문자명태왕과 지나대륙에서 붙게 되였다. 동성왕은 서기483년 한산성을 복구하여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한 이전의 영토를 확보 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따르면 <483년 왕이 사냥을 나가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을 위문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서기486년 동성왕은 훗날 자신을 시해한 <백가>를 위사좌평(경호대장)으로 삼았고, 그 해 남제로 사신을 보냈다. [남제서 백제전]을 보면 "백제왕 모대가 표를 올려 말하길 신이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장사인 신 '고달'과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사마 신 '양무', 행선위장군 겸참군 신 '회만'등 3인을 사신으로 보내니 뜻과 행동이 맑고 충성스러움이 분명합니다. '태시'중에 '송조'에 사신으로 가고, 이제 신의 사신으로 험한 바다를 무릅쓰고 그 지극함으로 찾으니, 마땅히 작위를 내리시어, 삼가 먼저의 법칙대로 각각 행직을 수여하시옵소서!" 라고 되어 있는데,


동성왕이 남제에 사신을 보낸 것은 남제왕에게 군사를 지원하여 북위와의 전쟁에 대비하라는 요구다. 백제 동성왕이 남제왕에게 군사지원을 요구할 정도면 남제가 백제에게 상상히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동성왕은 이해 우두산성을 쌓았고 군병을 조련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북위>와의 전투를 대비한 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서기488년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라고 했으며 [위서 고조기]에 의하면 "태화12년(488년) 소색의(남제 무제)장군 진현달 등의 외적이 침입해 왔다. 예주자사 원근을 시켜 외국인 부대를 막도록 했다." 라고 하여 백제본기와 달리 남제와 외국인부대(중군)백제가 선공 한 것으로 되어 있고, 누구의 승리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고구려사초]에 의하면 "서기488년 모대는 위와 단교하고, <위>의 악행을 <남제>에 까발렸다. 그랬더니, <등주>를 지키던 북위 장수 이연(훗날 당나라 고조:당 태조 이세민 아버지)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섬 중에 있다가 <모대/백제 동성대왕>가 사냥하러 왔음을 듣게 되어, 그를 사로 잡고자 하였다. <모대>는 이를 알아 차리고 군병을 보내서 맞서 싸웠더니, <이연>은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되돌렸고, <모대>는 점차로 땅을 되찾으며 북진하였다."라고 하였다.


지나문헌[자치통감(資治通鑑)] 제기(齊紀) 세조(世祖) 상지하(上之下) 영명(永明) 6년(서기 488년)조 기록이다.


"북위(北魏)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배했다.백제는 진나라 때부터 요서(遼西), 진평(晉平) 2개 군(郡)을 차지하고 있었다."[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남제서(南齊書) 제58권]백제와 북위간에 벌어진 큰 전쟁에 대한 기록이다. "이때 위(魏)의 오랑캐가 (다시) 기병 수십만을 발하여 백제 경내에 들어왔다. 백제 국왕 모대(牟大 동성왕 이름)가 장수(將帥)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를 파견했는데, 이들이 백제군을 이끌고 적을 격퇴시켰다."[時歲 魏虜又發騎數十萬, 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大破之]


이 전쟁은 경오년(庚午年) 즉, 490년의 전쟁으로 [삼국사기]와 [자치통감]에 기록된 488년의 전쟁이 있은 후 2년 뒤에 벌어 졌다.


북위는 2차전쟁 패배후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고 전열을 재정비해 서기494년 설진도 유창,원연,유조 등 대군으로 양양,의양,종리,남정지역을 공격한다. 초기에 남제의 영주자사 동만과 수천명이 포로가 되면서 밀리지만 백제군의 반격으로 위군은 종리에서 쫒겨 달아나고 <위>의 장군 풍탄이 전사하면서 총 퇴각을 하게된다.


그 뒤에도 서기497년과 서기498년 다시 침공하지만 참패한다. 서기488년부터 498년까지 10년 동안 무려 5회에 걸친 전쟁에서 북위는 모두 패했다. 위서 고조기에 의하면 태화22년 왕실과 궁중의 모든 경비를 절반으로 줄이고 근위대의 1/3을 축소했다. 라고 했듯이 북위는 모든 국력을 소모하여 벌인 전쟁에서 남제가 아닌 백제에게 패배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적어도 국사, 세계사 시간 때 배우기론 북위는 2세기 초원을 지배한 북방 선비족이 지나대륙으로 들어와 만든 5호16국의 대혼란을 종식시킨 선비족이 세운 국가이고, 백제는 최전성기 근초고왕 때 요서를 잠시 경략했을 것이라는 추정으로 해동의 작은 소국이었다고 배웠을 것이다.


동북공정.식민사관에 찌들어 위서로 온통 매도당하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기록도 아니고, 백제와 북위의 전쟁! 이 충격적 사건은  지나25사 중에 엄연히 남아있는 기록이다.


그런데 소중화사대주의자이면서 신라사관론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대륙백제의 실체에 대해 전면부정했고 고작 딱  1줄 북위와 백제의 전쟁을 마지못해 적어 뒀다. 고구려와 백제의 지나대륙 진출이나 정벌관련 내용들은 거의 배제되고 신라우월주의적인 내용들로 채워진 사서가 삼국사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만을 의심없이 무조건 맹신하는 국사학자들의 논거대로라면 유목민족이던 선비족 북위가 해동 남쪽의 작은 나라 백제에게 뭐 탐낼만한 꺼리가 있다고 크게 수군을 일으켜 쳐들어 왔을까? 북위와 백제와의 전쟁은 바로 백제가 산동지역 거발성에 총독부를 두고서백제를 경영하고 있던 지나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이였던 것이다.


동아시아 바다를 매개로 동남아까지 경영하면서 인도까지 해양무역을 했던 22담로의 백가제해는 어디로 숨기고 한반도 서남해 지역국가로만 국한시켜 껍데기만 가르쳤단 말인가! 정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단군조선과 부여를 계승하여 지나세력으로부터 강탈당하고 분열된 단군조선의 영토와 동족을 회복하고 통합시키겠다는 다물(담로)을 국시로 삼고 끊임없이 추구했던 고대 고구려.백제의 웅대한 기상과 진취성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역사교과서에 기술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국사편찬위원회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일제의 민족사 말살작업에 부역했던 이병도 논리나 내세우는 식민사관론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문헌들과 고고학 자료 비교분석을 전제로 공정하면서도 객관적인 인식론을 가진 주체적인 민족사학자들로 구성되야 할 것이다.

[고고학 자료]세계와 교류하고 무역했던 대백제

백제는 약소국이 아니었다. 놀라운 해상능력을 바탕으로 국제무대를 누볐던 강국이었다.


아아시아 정치외교의 주역이었으며, 아프리카와 연결되는 인도까지 무역으로 국부를 쌓았던 백제. 백제인들은 세계인들이였던 것이다. 그 백제인들의 영역은 한반도의 경계를 넘어서 상상할 수 없도록 거대한 영토를 경영한 대국이였다. 그 가능성을 여는 열쇠가 바로 담로다. 백제가 다스렸다는 땅 22개의 담로.

지나사서인 [양서]는 백제담로제에 대하여 "왕족을 파견하여 백제 고유의 담로를 다스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
백제 왕성은 '고마', 큰 성은 '담로'라여 22개의 담로를 모두 왕의 자제나 종족으로 하여 다스리게 했다.' 일본 내의 백제 담로. 그곳은 백제의 왕족의 마지막 도피처가 되기에 적합했을 것이다.

백제는 담로라는 독특한 지방 통치제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백제의 왕은 수 많은 담로의 왕들을 거느린 제왕의 위치에 있었다는 얘기다.

백제의 영토를 알려줄 담로들은 과연 어디에 위치해 있었을까?
우리는 일본 신화시대의 '일향'이라는 지명이 오늘날 까지 남아있는 예를 보았다. 지명의 생명력이 놀랄만큼 길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담로라는 지명 또한 어딘가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법하다. 그 흔적을 찾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먼저 담로란 말의 뜻부터 알아보자.

<김성호 박사>
담로의 어원을 추적하자면 고구려에서부터 시작한다. 고구려에서는 빼앗은 땅, 점령지 다모리라 했다. 백제인들의 정착지도 다모리라했다. 이 다모리 다물, 담라, 담로로 변천했다. '담'은 담장 또는 경계를 뜻하고 '로'는 나라는 뜻한다. 이 말은 백제의 행정구역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물이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담의 유래를 다물에서 찾는다면 타당한 것일까. 이점을 시사해주는 단서가 있다.







전남 해안이나 도서 지방에는 밭두렁에 돌담을 쌓아놓는데 이것을 다모리라고 한다. 여기는 백제의 옛 영토였다. 이 다모리가 다물로 바뀌고 현재는 담으로 변했는데 다물은 성을 뜻하기도 하는데, 새로 개척해서 담을 두른 영지(정복지)를 다물이라고 한다.

한반도에는 담로를 뜻하는 여러 지명들이 제주도까지 걸쳐 남아 있다.
일본 열도의 가당도는 백제 무령왕이 태어난 곳이다. 여기에도 다마나라는 담로계 지명이 남아 있다.큐슈 다마나시. 다마나는 탐라, 담로와 같은 전형적인 담로계 지명이다.

부근에
구마모토, 구마 즉 곰을 뜻하는 지명은 백제 왕성을 뜻하는 말이다. 곰은 백제의 상징이었다. 백제와 관련된 유적에는 곰과 관련된 지명이 발견된다. 한국의 금강의 어원은 곰강이다. 이곳에 구마천(곰강)이 흐르고 있다. 한반도 금강 상류에는 곰나루를 뜻하는 웅진이 있고, 그 하류에는 또 다른 곰마을 웅포가 있었는데 모두 왕급의 유물이 발견됐다.











구다라, 이것은 일본에서 백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 마을에는 구다라기라는 국민학교가 있다. 그 이전에도 이 학교는 구다라기 국민학교였는데 소리만 두고 한자를 바꾼 것이었다. 가장 오래된 이름은 백제래였다. 즉 백제가 왔다는 뜻이다.








이 마을에 온 것은
백제 달솔 일라였다. 달솔은 지금의 장관급으로 본토 백제의 고위 관리가 이 마을에 파견돼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본토백제의 통치력이 직접 미쳤다는 얘기다.
후나야마 고분(전방후원분)은 다마나 일대를 담로로 추정할 수 있는 강력한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한다.








이 고분은 5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일본 최고 최대의 유물들이 발굴됐다. 무덤의 내부는 백제의 대표적 묘제로 알려진
횡혈식 석실 구조이다. 여기서 나온 유물들의 주인이 극히 고귀한 신분임을 말해준다.

명문이 새겨진 대도
은상감의 명문이 새겨진 이 큰칼은 지배층만이 가지는 권력의 상징이다.후나야마 출토품은 백제의 왕릉급 출토품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이 고분의 주인은 백제 왕족이 분명한 것이다. 이 무덤은 전방후원 형태를 위하고 있는 이 무덤 양식의 초기 원형은 한반도 일대에서 찾을 수 있다.혼슈의 아스카 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전방후원분 밀집지역이다.








<강인구 교수> 한반도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것보다 더 초기형이며, 그 기원은 한반도이다. 한반도에서 큐슈로, 큐슈에서 아스카 지역으로 건너간 것이다.아스카베 신사는 곤지왕을 모시고 있다. 곤지왕은 백제 개로왕의 동생으로 5세기의 인물이다. 일본땅에서 곤지는 신으로 추앙되고 있다.








아스카베 신사는 곤지를 일컬어 아스카를 이룬 일족의 조상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통일 국가가 있기 전에 먼저 곤지의 일족이 아스카를 개척했다는 뜻이다. 곤지왕의 신사는 아스카 지역이 백제의 담로였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이곳은 백제인과 백제의 왕이 있었던 곳이며, 후에 백제 24대, 25대 왕(곤지의 두 아들:동성왕과 무녕왕)을 배출한 곳이다.








백제 25대 사마왕, 그가 바로 무령왕이다.
무령왕은 곤지가 왜 열도로 가던 도중 낳은 아들이었다. 24대 동성왕은 무령왕의 동생이다. 아스카는 이 두 왕이 성장한 곳이다. 이것은 본국 백제와 담로가 하나의 정치체제 속에 통합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담로는 백제의 일부분인 것이다.

미네가즈카 고분(
아스카, 전방후원분). 이 고분은 전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미네가즈카 고분은 천황릉인가?
여기서서 출토된 유물들은 미네가즈카 고분의 주인공이 백제인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무령왕의 유물과 재질, 형태까지 똑같은 유물들이 출토됐다.

일본서기에는 이것에 관한 해답이 될만한 천지장조 신화가 적혀있다.








신화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음양 두 신이 결합하여 부부가 됐다. 자식을 낳을 때에 이르러 맨 처음 담로를 모태로 하여 여러 땅을 낳았다. 그런데 기분이 나빠 담로의 이름을 미와지시마로 했다.'일본의 천지창조는 담로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즉, 일본이라는 나라가 있기 전에 일본 땅에는 이미 백제인이 담로를 형성하며 진출해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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