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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사는 한국사/진시황은 한국인.청은 고구려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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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9 윤*현 조회수 229 |
[자료]1만년 천손족 대한민국 국민과 군대 정신교육용 지나사는 한국사/지나대륙 통일한 진시황은 한국인.최대 영토를 마련해준 청은 고구려 태왕들에게 제사지낸 고구려 나라 1만년 전부터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조상들은 동아시아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무리를 이루어 정착하였는데, 지금의 만주와 동부내몽고를 지리적 머리쪽으로 하여 지금의 황해(당시는 사람 살던 육지)를 중심으로 동으로 한반도와 일본열도, 서와 서남으로 화북, 화중, 화남일대의 저지대와 평지평원에 광범위하게(세월이 흐르면서 마제형-馬蹄形을 이루었다) 분포하여 주로 농사 - 현 동부내몽고와 서북만주일대는 半狩半農 - 를 지으면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 * 류제헌의 「중국 역사 지리」 45쪽, 井上光貞 외 2인의 「日本史」 8쪽, 문정창의 「한국고대사(상)」)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환한 하나님께서 환인천제의 후손인 환웅에게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가르침을 주어서, 이미 천손(天孫)으로 점지해 놓았던 우리민족에게 내려 보내어 백두산에서 우리민족국가를 개천(開天)하고, 신의 도시(신시)를 열였다. 신의 도시라는 지명은 환웅족이 천신 하나님을 숭배한 부족임을 의미한다. 환웅천왕은 군림과 다스림이 아닌 재세이화사상(在世理化思想)을 기조로 360여 가지의 소박한 주민생활편의수단(불, 의복, 그릇, 칼 등등)개발과 계몽(啓蒙)에 주력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환웅의 자손들과 현자들에 의하여 ‘성현(聖賢)왕들의 시대’(The Sage King's Era)가 이어지면서 우리민족의 원시공동체사회는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 5800여년전 우리 치우대왕(蚩尤大王)이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다 1만여년전부터 시작된 해빙(解氷)은 약 6000여년전에 이르자 드디어 안보전략환경의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하였다. 우선 지금의 황해가 저지대(수평최하 140미터밖에 안 된다)로부터 바다가 되기 시작함으로서 대륙과 현 한반도와 일본열도 방향으로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런가하면 현 섬서성 감숙성 이서와 이북지대 즉 서방(현 내외 몽골과 서역)이 크게 건조해 감으로서 그곳 주민 또한 동으로 향하여 대륙 평원평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안으로도 사회계층의 형성과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국가적 통제의 필요성에 의하여 우리의 환웅왕조가 성립(BC3898 ; 임승국역 「한단고기」와 여운건․오재성의 「우리 고대사」의 74쪽 등)되였다. 이는 중국의 고대전설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그들의 선조격인 황제(누를 黃자 黃帝 : BC2692)시대에 비해서도 1000년이 앞서고, 그들 전설상의 요순 왕조시대보다 무려 1500년이 앞선 사건이다. 그런데 이 환웅왕조 제14대에 치우대왕이 집권하였는데 이 시점에서 우리한민족(韓民族)역사테두리 안으로 중국사 시조전설의 얘기가 생겨나게 된다.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우리 심학균의 「규원사화」 그리고 임승국(역)의 「한단고기」를 참고하여 중국사의 시작과 치우대왕의 ‘동아시아 패권얘기’를 간추려 보기로 한다. 우리 환웅왕조 통치하의 산동반도 곡부지방에 살던 헌원(軒轅)이 위와 같은 안보환경변화에 따라 시국개조를 내세워 반란을 도모하였다. 그러자 우리의 치우대왕은 분노하여 수도를 백두산지역에서 요서지역으로 이전하여 반란을 토벌하고 헌원을 항복받아 중원일대를 장악한 뒤에 이 헌원일당을 멀리 황토고원 변방으로 축출하였다. 그 후로 이 헌원일당이 황토고원을 중심으로 서방민족 등을 규합하여 중국전설의 오제(五帝) 중 첫머리의 황제(황토고원지방 제왕이란 뜻의 누를 黃帝 ; 중국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전설의 ‘사람 머리에 뱀의 몸’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그때만 해도 중국사람들은 미개했다는 뜻도 된다)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사마천의 중국전설 역사는 곧 우리 전설역사의 한 부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단군한국의 제후국인 은제국(殷帝國)이 황하 이남의 지나대륙을 지배하고 서방민족을 흡수동화하여 공동조상을 가진 광의의 우리민족으로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BC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안보환경이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동아시아의 기상기후는 지금의 조건보다 2~3도 올라간 상태에서 과우기(寡雨期)를 맞이하여 황해는 매년 1미터씩 바다높이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자 특히 저지대주민들의 고지대로의 이동과 서방민족들의 동방평원으로의 이동이 속도가 붙고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특히 우리평지평원주민들의 안보불안이 가중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BC2333년에 환웅왕조를 대신하여 좀더 강력한 단군왕검 왕조를 설립하였고, 황하와 회-대지방에는 대륙분국(大陸分國)으로 남국(藍國)을 두었다. 그런데 이 분국에는 BC2000경부터 홍산지역에서 남하한 새 토템과 알신앙의 고리족이 상(商)을 건설하여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유명한 용산문화(龍山文化)의 주인들로서 우리민족문화의 전승자들이었다. (중국사학자 부시년-傅凘年의 논문『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 이들은 삼신(三神)을 받들어 제사지내고, 흔히 신인공식(神人共食)으로 술에 취해 신의 경지를 즐겨하는 습성을 가진 우리민족이었다(지금 우리가 바로 그러하다). 특히 상(商)은 삼신원리종교국가화하여 중원을 정복하고 나아가 서방으로 멀리까지 진출하여 전설상 같은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진 하(夏 : 諸夏라고도 하며 중국의 최초국가로 기록되어 있다)를 정복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점차 알려지는바에 의하면 전설상의 하의 수도 언사(偃師 ; 낙양주변)에는 앙소문화(이리두․이리강문화)보다 용산문화가 더 밑에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음으로서 중국의 최초 국가 ‘하’의 실존조차 의심스럽게 되었고, 그래도 있었다면 미미한 존재였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烏越憲三郞의 「古代中國と倭族」의 75~77쪽, 이근명편역의 「중국역사(상)」의 56쪽) 다시 말하면 이때 것으로 쓰여진 중국역사는 바로 우리역사를 빌려가서 쓴 역사로서 우리역사의 일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우리 평지평원 원주민족(즉 東夷族)이 중국의 원조(元祖) 서방민족을 흡수 동화하였다 바로 그 우리민족국가 상(商)은 서방 깊숙한 변방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이 때 상(은)의 한 번국(蕃國)이었던 서방민족의 주(周)가 점차 계몽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월이 흘러 BC1100년경에 이르자 이 주가 강대하게 발전하여 서방민족들을 규합, 쇠퇴하는 은(殷 ; 후기에 은으로 불리게되었다)을 공격하여 타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크게 잡아 통 털어 100여만의 서방민족(중국민족의 원조)이 3000여만의 우리 평지평원 원주민족 속으로 이민해 들어 왔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이들을 흡수동화하여 광의의 우리민족 즉 조상을 공동으로 하는 우리민족으로 발전시켜 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본적으로 그 이후에 이들 광의의 우리민족이 활동한 중국역사는 곧 우리한민족사(韓民族史)의 일부인 것이다. ◎ 춘추․전국시대, 광의의 우리 민족끼리 패권 전쟁하였다. 이어서 중원중국에서는 춘추시대가 계속되는데 이는 다른 표현으로 ‘5국의 패권시대’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패권전쟁은 모두가 ‘광의의 우리민족’끼리의 전쟁이었다. 첫 패권자인 제(齊)는 우리평지평원 원주민족의 중심지인 산동성에 봉건된 국가로 짧은 기간내 용이하게 우리 원주민에게 흡수 동화되었고, 특히 원주민 출신의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강대국이 되었다. 두 번째 패권국인 진(晉)은 주초(周初)에 산서성 황토고원지대 분수(汾水)에 봉건된 주의 동족국가였다. 그러나 주변에는 중국사서에 융적(戎狄)이라 불리는 반수반농(半狩半農)의 원주 우리 민족(즉 부여)이 있었는데 조기 국력배양을 위해 스스로 혼혈정책을 실시하여 흡수동화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 패권자인 초(楚) 또한 우리민족의 한 갈래인 묘족(苗族) 출신으로, 특히 이들은 원주회인(原住淮人)으로, 주초 ‘삼감의 난’(三監之難)에 동조했다가 주 왕실의 공격을 받아 남으로 피난하여 현 무한(武漢)지방에 초국(楚國)을 설립(BC8세기경)하였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어느 다른 후국보다 우리 원주민색이 농후한데다 입국지역 일대 우리원주민까지 포섭하여 오히려 우리민족특성의 강국이 되었다. 네 번째의 송(宋)은 주지하는바와 같이 주가 우리 민족국가 상(商)을 멸망시킨 뒤 왕자인 녹부(祿父 즉 武庚)를 정략적으로 상의 수도에 남겨 종묘사직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녹부가 ‘삼감의 난’을 주도함으로서 처형되고 또 다른 왕자를 멀리 현 하남성으로 이주시켜 송후(宋侯)로 봉하였는데 이 후국 즉 상왕실(商王室)의 나라 송이 강대국으로 발전하여 한때 춘추시대의 패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후대 또 하나의 송은 우리 고려와 선린우호했다) 다섯 번째 패권국인 오(吳)는 주왕실의 형제 중 일부가 오태백의 지휘로 남하하여 태호북안(太湖北岸)에 이르러 주변의 왜이(倭夷=東夷)의 도움으로 자리잡고, 19대를 지나면서 거의 원주민에 흡수동화되어 우리민족국가(BC585년)를 성립시켰으며 북으로 진출하여 우리민족들의 지지하에 제(齊)와 노(魯)를 제압하면서 패자가 되었다. 한편 바로 그 남쪽 즉 화남의 우리 원주민이 단결하여 월(越)을 세웠는데 패자인 오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양자강 일대를 장악한 뒤에 북으로 진출하여 이 또한 한때 패권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춘추시대의 5패국가 모두가 우리 원주민족에게 흡수동화된 민족국가들이었음으로 그 시대의 역사 또한 광의의 우리민족 역사임과 동시에 우리 한국역사(韓國歷史)의 일부라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닌 것이다. ◎ 우리민족국가 진 (秦)의 통일과 우리 진시황의 산동반도 추억 BC221년에 진은 중원제국 즉 광의의 우리민족국가들을 최초로 크게 통일하여 통일지나(支那 : 차이나)제국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이 진과 진시황이 우리 민족출신이요 우리 민족국가라는 사실을 중국 자신의 역사가 부시년(傅凘年 :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의 논자)에 의해 들어보기로 한다. “진은 원래 영성(嬴姓)이다. 회이(淮夷)는 본래 동해상(東海上 ; 필자 주-황해의 중국식 옛이름)의 거주지에서 회수지역으로 이주해 온 종족으로서 동부평원 원주민족의 일부이며 ‘상제국(商帝國)의 구성종족’이었다. 상제국이 서북방 깊숙이 영토를 확장했을 때 주후(周侯)를 봉하고, ..... , 영성국(嬴姓國)으로 현재 고증이 가능한 것은 상 말기의 엄(奄), 회이의 서(徐), 서방의 진(秦), 조(趙), 양(梁), ... 정도다. 동방의 서(徐)와 진조(秦趙)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증거다, .... .” 서(徐)국과 진조(秦趙)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면, 모두 만주족이라는 의미다. 즉,[환단고기/단군세기]에서 23대 이홀 단제 때 은나라를 정벌할 때 동원된 만주 영고탑족이 서국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이 만주족이라는 주장을 최근 지나국 사학자들이 주장한 배경이라 할 것이다. 이러하기에 진시황은 통일 후에 산동성과 회계(會稽 : 양자강지역)어간을 빈번히 순시하면서 동녘바다 속의 미지의 판타지랜드, - 즉 옛날 자기 조상이 살았을 것으로 믿어지는 - 봉래산(蓬萊山)을 그리워하였으며 수시로 그곳에 있는 태산에 올라 자신의 조상이요 그 곳 원주민 즉 우리민족 조상들에게 제사하고 추억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끝내 그 지방 순시도중에 죽어갔다. 다시 말하면 중국이 자랑하는 이 통일 진과 진시황의 역사 또한 곧 우리 한민족역사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민족국가출신 항우와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의 역사는 우리 한국역사의 일부이다. BC209년, 독재국가 진왕조에 대한 진승․오광의 반란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별종(別種)이더냐’라는 단순한 세상뒤집기 민란이었기에 수도방위부대에 의해 즉시 진압되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서 초와 옛날 제(齊)․노(魯) 그리고 오월의 소주(蘇州) 지역 등 우리 원주민족특성이 짙게 배어있는 광의의 우리민족주민지역인 회대(淮岱)지방에서, 그곳 소주출신의 항우(項羽)가 주도하는 통합반란군이 역시 그곳출신의 유방(劉邦)군단을 전위부대로 하여 서안(西安 : 關中咸陽)으로 진격하였다. 그리하여 이 평지평원출신통합반란군이 진왕조를 멸망시키고 항우와 유방이 소위 초한전(楚漢戰)이라는 주도권전쟁을 치른 뒤에 유씨왕조의 한제국(漢帝國)이 성립되었다. 이 한제국의 민족구성 즉 민족특징은 바로 광의의 우리민족을 통합한데 이어 우리평지평원민족의 특성을 더 보탠 우리민족이 되었다. 이로서 중국의 기본적 민족구성은 일단 완성되고 이들을 일컬어 한민족(漢民族)이라 한다. 그러기에 거듭 강조하거니와 중국의 한민족(漢民族)은 우리조상을 공동조상으로 가진 우리민족으로서, 곧 광의의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일부이고, 그들이 엮어낸 중국역사는 바로 우리한민족역사의 일부인 것이다. ◎ 우리종주민족 대표국가 고구려의 중국(中原國家)지배역사 ○ 고구려의 건국역사 BC2333년에 개천된 단군조선이, 성립된 지 1205년만인 1128년에 문을 닫았으나 뒤이어 상당수의 우리 종주민족 열국들이 지역을 분할하여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개념상) 현 만리장성 안으로는 청구국(靑邱國 : 환웅왕조시대의 화북, 중원지역의 분국)의 후예들 - 광의의 우리민족보다 우리평지평원원주민특색이 여전한 남(藍)과 상(商), 서(徐), 엄(奄) 그리고 고죽국 등 - 이 할거하였다. 한편 그 북으로는 남국의 영역에다 신조선, 번(불)조선, 말조선, 부여 등이 할거하여 종주민족(宗主民族)국가의 역사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BC280년경에 있었던 소위 ‘조(朝)-연(燕)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삼조선열국 중의 하나인 번조선은 멸망의 위기에 처해지고 우리 고조선의 영역은 오늘날의 대능하(요하보다 서쪽에 있는 강)까지 후퇴하였다. 그러나 BC210년경 진(秦)이 연을 토벌할 때 우리 신조선(辰朝鮮)은 다시 불, 말조선과 연합하여 연을 동에서 서로 샌드위치공격을 실시, 한 많았던 실지를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강성 중인 흉노와 국경을 마주하였는데 당분간은 ‘힘의 균형’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BC200년경에 역시 영토문제로 모돈(冒頓)이 지휘하는 흉노의 반격을 받아, 앞서 진출해 있었던 우리 신조선 연합군과 주민들은 부득이 철수하였다. 이때 이들 중 일부는 철수 도중에 선비․오환산(鮮卑․烏丸山)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고향인 부여로 가고 그리고 그 일부가 고주몽의 지휘하에 남으로 내려와 졸본(卒本)을 근거지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 * 고구려 건국은 통설인 BC 37년 설과 그 보다 약150년 앞선 BC200년경 설이 있다. 필자는 BC200년 설을 지지한다) ○ 우리 종주민족국가, 신라, 백제의 성립과 선비(鮮卑)오환(烏 丸)과의 국가 민족 관계 서기전 2세기경의 우리민족열국들에는 대표적인 것이 만리장성 남북의 고구려를 필두로 발해만 연안에 위만조선(번조선계열), 중북부만주에 부여, 만주와 한반도북부에 최씨 낙랑국, 한반도에 마한이 있었고 일본열도에는 우리민족이 건너가서 이제막 ‘야요이문화’를 일으키는 중이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직도 이웃을 돌볼 겨를이 없을 때인 BC109년부터 한(漢)은 우리 위만조선을 침략하였다. 4~5차에 걸친 치열한 방어전 끝에 위만조선은 군사전략․전술적으로 완전한 승리(漢은 戰後에 역사상 유레없는 군법회의로 패전을 자인하였다)를 쟁취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국가분열을 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대체적으로 현 남만주 발해연안지대에 4~5개의 자치국(自治國 ; 중국역서는 이를 소위 한사군(漢四郡이라 하였다)으로 분열하였다. 그런가하면 선비․오환에서 같은 이름의 우리 고조선계 국가가 성립, 점차로 발전하여 155년경에는 도전해 온 남북 흉노를 멸망시키고 동아시아 초원지대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인접하는 고구려와 동족지유대(同族之紐帶)를 다짐하면서 대외진출을 시도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대륙 황해연안의 고대한국평지평원원주민지역을 수복하고 세계화전략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다물전략(多勿戰略)을 국가안보전략 즉 국시로 정하고, 온조와 비류를 남으로 내려보내 근거지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산동반도와 하남성, 강소성, 섬서성, 안휘성일대에 양백제(兩百濟)와 그리고 그 보다 먼저 신라가 건립되었다. 고구려는 국가성장의 동력과 기상(氣象)을 살려 서기 32년에는 먼저 후방의 우리 최씨 낙랑국을 합방하고 곧 이어서 자치공국들을 합방하였으며 나아가 한의 본토를 공격하여 49년에는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 요동지역 일대를 점령하였다. - 고대한국의 고토를 수복하였다고도 말 할 수 있다 - 그 후 105~121년간에 있었던 요동패권전쟁(17년전쟁)에서도 완승하여 고구려는 우리 종주민족국가로서 광의의 우리민족 중원국가인 한(漢)과의 대결에서 이니시어티브를 쥐게되었고 따라서 지역패권자가 되었다. 특히 17년전쟁 중 118년에서 121년 어간에는 본격적으로 우리민족인 선비(鮮卑), 오환(烏丸)과 동맹하여 한(後漢)을 공격, 122년에 번조선의 위만정권의 단절을 가져왔던 자치지역 고토(소위 한사군)를 완전히 수복하였다. 이때부터 고구려와 선비․오환은 더욱 굳은 혈맹의 동족이 되었다. ○ 열국화된 선비족과 애증의 갈등, 강대국이 된 백제와의 모욕전쟁 몇 백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선비족은 낙랑근방에 모용부(慕容部), 동몽고 열하의 단씨(段氏), 그 북방의 우문부(宇文部) 그리고 내몽고 치치하얼 남부와 귀완(歸緩)의 탁발부(拓跋部) 등으로 열국화하여 경쟁적으로 5호16극시대 패권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특히 모용부가 337년에 연(燕 : 즉 前燕)을 세워 화북의 패권을 노림으로서 고구려와 갈등하였고, 우문부는 전연을 고구려와 함께 연합공격이후 모략에 빠져 고구려와의 대외관계에 중립을 지키다가 더 뒤에는 수, 당 건국의 주체세력이 되었고, 탁발부는 고구려와 더욱 굳은 동족동맹으로 고구려의 의지와 함께 북위가 되어 중국(중원정권)을 지배하게된다. 한편 백제는 이 지음 국력이 정점에 도달하였다. 심지어 백제의 근초고왕은 북진하여 고구려를 공격, 전연(前燕)과도 유화정책으로 흔들리던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한반도 서부연안지대를 포함하여 환황해(環黃海)제국을 건설하였다.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159쪽) 이러한 수모를 소시적부터 경험한 고구려의 소수림왕은 심기 일전하여 국가개혁(학문장려, 율령반포, 공무원제도 혁신 등)을 통해 고구려 부흥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구려의 전통적 다물사상을 세계화사상으로 승화시켰다. 때마침 티베트 계 저족(氐族)의 부견이 중원의 패권자가 되고 그의 세계화이상과 사해혼일사상(四海混一思想)을 앞세워 고구려와 동맹을 제의하자 즉시 이에 응하여 그로부터 불교(大乘佛敎)를 전달받고 이를 국가부흥의 구심사상으로 삼았다. ○ 광개토대왕의 서역정벌, 장수대왕의 동족동맹 탁발부북위 적극지원 중원이 5호16국시대로 복잡해지자 고구려는 소수림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이러한 국제안보환경을 최대로 활용 다물전략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 말기에 고구려는 빛나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시대를 맞이하였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백제응징을 위한 서전을 일차 마무리하고 격변하는 국제정세를 적시적절하게 활용하고자 395년에 고구려군의 공격방향을 역회전시키고 탁발규의 북위와 연합하여 북서방으로 진격하였다. 우선 쇠망 중인 북연을 우회하여 거란( 중 일부인 나려)과 흉노를 토벌하고 잔적을 추격하여 서역방향으로 전진하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서역정벌전쟁이 되었다. 광개토대왕은 태행산맥서부의 평성(平城), 성락(盛樂)을 점령하고, 음산산맥을 따라 나 있는 고래로부터의 서역-적봉지역간 실크로드를 통하여 현 감숙성 서방 즉 내몽고의 서방 끝 지역인 와룡지역의 파부산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까지 진출하여 고구려 아니 한국 최대의 판도를 그렸던 바 있다. 그리하여 미래 중원을 포함한 가능한 최대지역의 세계화를 위해 광개토대왕은 탁발부선비들을 주력으로 낙랑지역의 고구려인들- 탁발부족들과 낙랑의 고구려인들은 이미 혼혈되어 한민족이 되어 있었다 - 을 이미 점령했던 성락(盛樂)지역으로 식민지 개척을 위해 대이동하는 것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북위는 신종(臣從)관계를 뛰어넘은 거의 완전히 세계화전략사상으로 결속된 동족동맹국관계가 되었다. ○ 통일 북위를 통한 고구려의 실질적인 중국중원 지배경영 북위는 고구려의 적극지원으로 439년에 화북통일을 완성하여 그 후 150년간 중원정부를 유지하면서 남북조시대를 영위하였다. 그 동안 고구려 장수대왕은 북위와 외손의 나라 그리고 사돈의 나라로 돈독한 친족혈맹관계를 다지면서 중원중국의 세계화를 도모함으로서 실질적으로 중국중원을 지배경영 하였다. 특히 낙랑지역고구려출신인 북위의 문명태후(文明太后)와 그의 딸 마태후(溤太后)에 의해 세조, 태무제, 선무제( 이때는 고구려인 외척 高肇의 활약), 효문제와 친족관계가 되었고, 특히 효문제의 낙양천도를 계기로 고구려는 중국과 선비 그리고 고구려의 사해혼일(四海混一)로 세계화하고, 돈황일대의 불교예술발전을 위해서도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문정창의 「한국고대사(상)」, 진순신의 「중국오천년(상)」, 의 324~5쪽) 이와 같이 이 시대 북위와 고구려관계사만 보드라도 중국사는 우리 한국사의 일부임이 잘 나타나 있다 하겠다. ◎ 광의의 우리한민족(漢民族)이 우리민족 선비계열의 수(髓) 당(唐) 거란(契丹 : 즉 遼)을 흡수 동화. ○ 광의의 우리 한민족(漢民族)이 수와 당을 흡수동화하다 550~7년에 고구려의 동족혈맹 탁발부선비의 북위가 고구려의 세계화전략사상에 동감하는 개화된 중앙정권의 전통계승자 북제(北齊)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선비 우문부(宇文部 ; 고구려의 옛혈맹, 그 후 중립)의 북주(北周)로 분열하였다. 그리하여 패권전쟁결과 북주가 승리하였는데 동시에 이 정권을 탈취한 양견이 수(隋)를 수립하고 선비족의 세계화를 적극 지원한 고구려에 대해 적대하였다. 한편 수와 당은 남북을 통일한 이후 사상과 학문 그리고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특히 통일국가유지전략면에서도, 광의의 우리민족인 한민족(漢民族)에게 흡수동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민족 선비와 혼혈선비족인 수와 당은 광의의 우리민족인 한민족(漢民族)에게 거듭 흡수동화되어 역사활동을 계속하였다. ○ 걸안(요)이 요서지역(灤河 : 난하 이서지역)의 고구려 유민(주로 숙여진)을 동원, 중원을 점령 지배하다. 한편 걸안(契丹 : 후에 遼 또는 大遼 그리고 다시 걸안)은 분열된 선비부족 중 단씨계열이 주축을 이룬 부족이다. 다시 말하면 이 또한 우리 고구려와 같이 부여계 동족으로서 번조선(東胡)의 한 갈래인 것이다. (문정창의 「한국고대사(하)」의 290쪽) 그런데 이 걸안은 그 동안 소규모로 산발적으로 고구려와 중원정권에 대해 귀속과 침탈을 계속하다가 907년에 ‘야루아보기’에 의해 거란국이 세워지고 926년에는 주지하는바와 같이 부여성을 공격하여 우리 후고구려(발해)를 멸하였다. - * 참고 ; 바로 다음해 918년에 한반도에는 왕건의 고려가 성립되었다 - 그리하여 계속 성장한 걸안은 또다시 분열된 중국중원지대를 공격하여 946년에 화북을 통일하고 우리민족 후예국가인 남방통일국가 송(宋)과 한 때 남북조로 양립하여 중국을 지배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 또한 중국사가 한국민족사의 일부임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 우리고구려민족의 후예 여진이 세운 금국(金國)의 중원중국 지배 ○ 우리민족 여진족의 금국 건립역사 고구려의 후예 후고구려(발해)가 거란에 의해 망하자 주민의 일부는 고려로 피난하고 남은 주민들 중 대체적으로 혼돈강 이서 유민들(숙여진으로 분류)은 거란에 협조적이었으나 그 외 대부분의 유민들(생여진)은 부흥운동을 끊임없이 계속하였으며. - * 요태조 야루아보기가 907년에 후고구려를 공격하면서 후고구려 전체 주민들을 여직(女直)으로 부르면서부터 여진의 이름이 탄생하였다. - 1040년경에는 걸안이 강점한 부여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후 8대 조선(祖先 ; 황해도 평산지방의 김함보가 직접 만주로 건너 갔음)이 고려사람인 ‘아골타’는 후고구려 부흥군을 결집하여 1115년에 부여를 공격점령하고 금(金)을 세우면서 칭제(稱帝)하였으며, 그 10년 뒤 걸안을 멸망시켰는데 고려를 대국(大國) 또는 부모지방(父母之邦)이라 하였으니 이는 두말할 여지없이 고구려의 후예로서 우리종주민족국가의 하나이다. (문정창의 「한국고대사.(하)」 의 318쪽). ○ 고구려후예 우리민족 금(金 ; 女眞)과 몽고의 중국지배 드디어 걸안을 합방하고 바로 이어서 1127년에 중원중국을 침략하여 북송을 멸망시키고 피난정권 남송과 병립하면서 화북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234년 몽고에 의해 멸망할때까지 120여년간 중국중원을 지배하였다.그 뒤를 이어 세계지배와 험께 중국을 지배한 몽고족의 주축 또한 걸안이고 걸안은 곧 우리 선비족이요 선비족은 곧 우리 부여계 단군조선족이요 우리 고구려민족의 형제들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 또한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중국을 지배한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우리 고구려 후예 여진이 다시 청국을 수립, 고구려 태왕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중국을 다스렸다! . 명(明의) 명장으로 우리 고려출신인 이성량(李成梁)은 만주지역 총감으로 만주지역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고구려유민들(여진족 중심)의 부흥운동을 통제하는 가운데 ‘뜻이 있어’(필자가 보기에는 고구려부흥의 뜻) ‘누루하치’ - 고구려부흥운동의 지도자로 명(明)에 의해 처형된 ‘아구’의 손자 - 에게 병력을 지원해 주면서 그를 여진족지도자가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누루하치는 그 지역 우리민족의, 예나 지금이나, 정통 토산품인 고려인삼과 모피산업을 성장동력으로 크게 발전하여 1616년에 ‘대금’(大金)을 세워 명에게 자립을 선언하였다. 그의 건국정신은 고구려의 ‘다물사상(대륙의 조선고토수복과 세계화사상)’을 국가안보전략기조로하여 동아시아를 사해혼일(四海混一)하는 연합국가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의 아들은 1636년에 세계화의 첫걸음으로 나라이름 여진을 버리고 청(淸)이라 개명하고 천하통일을 향해 남으로 내려갔다. 그리하여 우리민족 단군조선의 후예요 고구려의 후예 그리고 후고구려(발해)의 후예인 여진족은 이후 1912년 신해혁명에 이르기까지 268년간, 중국대륙에서 대청제국(大淸帝國)을 경영하였다. 이 청국(금)의 민족적 특성은 바로 그 아들 황태극(皇太極)이 일지감치 우리에게 민족 종주권을 이양하라고 요구(陳舜臣의 「中國五千年」의 289쪽)할 정도로 그들은 바로 우리민족의 후손들이었다. 우리 민족국가 개천이래 우리 천손의 宗主權은 언제나 우리 민족에게 있었고 오늘날도 우리 대한민국에 보존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역사는 우리한민족(韓民族)역사의 일부라고 거듭 말해도 결코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한국민은 우리역사에 자부심을 가져 마땅한 것이리라. ◎ 결론 ○ 중국 당국과 중국 역사가들은 ‘동북공정’보다 더 넓은 동아시아의 미래 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 글은 중국사가 한국사의 일부임을 굳이 강조하려는데 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바르게 본 동아시아 역사를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과 관계되는 중국(인)이나 이에 관심을 가진 한국(인)에게 공개함으로서 역사관의 문제인 ‘자국우월주의역사관’으로부터 일단 우리 모두를 해방시켜 보려는 뜻에서 시도한 것임을 먼저 밝혀둔다. 지금 중국은 한국을 염두에 두지 않고 소위 ‘동북공정’에 몰두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동안 ‘호혜평등’과 ‘선린우호’를 세계만방에 선언 또 선언해 왔던 ‘새 중국’이 현 시점에서 중화전략(中華戰略)으로 복귀하지나 않을까 우리 한국민은 한결같이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중국당국과 역사가들은 혹시 4세기중반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시대 불교배척운동과 함께 소위 ‘국사사건(國史事件)’이 있었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홍위병에 의한 소위 ‘문화대혁명’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다시 쓰여졌는지 그 사실 또한 모른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려는 것은 우리 일반민간인들이 보드라도 무리라고 생각됨을 어찌하랴. 중국은 공동조상을 가진 ‘광의의 우리 민족’끼리 더 이상 갈등과 패권으로 가는 길로 나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 한국당국과 역사가들은 동북공정에 지금은 대응하면서 동시에 뿌리 깊은 우리역사를 중국보다 더 많이 중국과 세계에 알려야 한다. 사실상 중국의 ‘고구려역사왜곡작업’은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그리고 수치스런 중국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될 것이다. 보통 상식수준에서 보드라도 이 세계에 이미 발간된 역사책이 수백만 권도 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내용들을 모두 지우고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도 세기를 뛰어넘는 착각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독도를 거론할 때마다 일본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 이유는 장차 어느 때를 위해 유리한 역사적 근거를 남기려는 것이고 동시에 양국민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정부당국과 학계는 ‘동북공정’에 대해 지속적인 외교적 반응과 동시에 우리역사에 대한 국민교육을 강화하고, 고구려사 연구발표 등 현실적 대응조치를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 ○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기회에 강단계와 비강단계 모두 머리를 마주하여 새로운 역사관으로 자랑스런 우리역사통사(通史)를 재정립하여야 할 것이다. 알다시피 일본은 ‘만세일계의 역사관’을 가지고, 중국은 ‘중화사상’을 가지고 각각 자국우월역사를 기록하여 이를 자랑하며 자국민의 긍지로 삼고 있다. 우리는 강단학계의 ‘실증사학론’ 고집(?)으로 ‘삼국사기’이상의 천손민족국가역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기에 일본역사책에 의해 해마다 자존심에 홍역을 치르고, 최근에는 중국에서조차 ‘변방국이네, 또는 신종관계국이네 하는 모욕도 듣게되었다. 그러기에 거듭 강조하거니와 이제는 강단학계와 비강단학계가 합심하여 우리의 ’일만년 천손국가의 역사‘를 펴내야만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에 완벽하게 ’폴승‘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앞으로 동아시아 종주국민족다운 우리한국민족의 긍지로 동아시아연합운동을 전개할 수 있고 그래서 영구적인 동아시아평화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당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우리국사를 세계에 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홍보해야한다. 특히 전세계 대학 도서관과 국회도서관(물론 일반도서관에도)에는 번역된 한국사서지가 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해 일본과 중국사서는 풍족하게 나열되어 있어 관심있는 사람들은 저절로 중국과 일본역사에 편중되게 마련이다. 바라건대 한시바삐 한국사서지 들이 최소한 키 높이에 길이 5미터 서가하나이상 차지할 정도의 자료는 제공되어야한다. 이 사업이야말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진정하고도 완전한 대응책이 되는 것은 물론 결과적으로는 한국학의 자연스런 붐을 기대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 소위 ‘한반도 토끼깃발’도, 역사문제 고려없는 ‘서울남천’도 재고해야 한다 그리고 결코 소홀히 이 할 수 없는 일로, 우리의 확고한 의지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는 그 동안 남북단일깃발이라고 흔히 사용했던 한반도깃발을 사용하지 말아야한다. 잘 생각해 보자. 중국과 일본 그리고 전세계가 그 깃발을 보고 ‘한국은 고래로부터 한반도 국가’로 오해하기 쉬울 것이다. 특히 중국은 ‘현재 한국이 사용하는 한반도 깃발은 곧 고구려가 한국역사밖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현 정부여당이 서울을 남천(南遷)하려는 문제도, 물론 북한과의 현실적 국가안보문제로 보아서도 마땅히 재고해야겠지만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과 연관해서도 재고해야한다. ‘세계로 선진국으로’를 외치면서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우리민족의 기상을 대표하는 서울이 지금 만일에 평양에 가 있었다면 중국은 감히 고구려를 함부로 다루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만일에 서울이 남천한다면 중국은 드디어 ‘한국이 움츠려들 때까지 움츠려드는구나’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민족은 더 이상 그들의 조상의 고지인 북방에 관심이 없다고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는 그들이 한술 더 떠서 거침없이 우리 낙랑국(樂浪國)의 우리 옛 땅인데도 불구하고 그들 한사군의 낙랑지방이라고 우기면서 우리의 평양조차 자기네 변방으로 취급하려할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움츠려 들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북으로 뻗어나갈 기상을 보여주어야 할 때인 것이다. 이것은 비단 중국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아시아로 세계로 진출해 나가려는 우리의 기상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서울을 남천하는 것은 우리국가안보전략에 불리함으로 재고해야 마땅한 것이다. ○ 공동조상을 가진 중국, 일본, 한국민족은 ‘동아시아 우리민족연합’ 을 결성하여 역내 무궁한 평화번영은 물론 세계인류평화번영에 기여 하자. 때는 바야흐로 21세기가 아닌가. 제국주의도 가고 공산주의도 가고 자유민주주의가 된 이 세상에서 너나없이 이제는 모두같이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가 된 것 아닌가. 이제 우리 동아시아 3국은 더 이상 중화사상이나 제국주의적 패권을 추구하지 말고 역사적인 공동조상의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여 공동체로 연합함으로서 지역집단안전보장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먼저 확보하고 그리고 세계평화에 기여하면서 우리 공동체 주민의 최대행복을 추구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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