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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오입으로 이승만을 몰락시킨 이기붕의 패가망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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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5 윤*현 조회수 671

인물

이기붕
이기붕 전 정무직공무원
생몰
1896년 (서울) ~ 1960년 4월 27일
학력
연희전문학교
경력
1960 3.15부정선거,
부통령 당선 
 
출생1896년 12월 20일(1896-12-20)
조선 조선 충청도 괴산군
사망1960년 4월 28일 (63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무대
사인총살
국적대한민국 대한민국
본관전주
별칭호:만송(晚松)
학력아이오와 대학교 철학 학사
직업정치인
종교개신교[1]
배우자박마리아
자녀아들 이강석, 이강욱
딸 이강희
친척사촌 형 이기룡[2]

 

 

이기붕(李起鵬, 1896년 12월 20일 ~ 1960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정치인이다. 이승만의 비서, 국방부 장관, 서울특별시 시장, 국회의장직을 역임하였다.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18대손으로,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었다가 임오군란에 연루되어 처형된 이회정의 증손이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충청도 괴산군 출생이며 한성부에서 성장하였다.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닦이 등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아이오와데이버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의 창당을 주도하였고 1951년 김성수 등 한민당을 야당으로 차던진 이승만이 새롭게 자유당을 결성할 때 그것을 도와서 신당의 중앙위 의장에 추대되어 당의 실권을 잡았다. 1954년에는 국회의장이 됨과 동시에 자기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후계자로서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보냄으로써 이승만의 뒤를 이어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고, 그의 거처가 서대문 경무대라 불릴 정도로 권력을 쥐게 되었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에 실시한 1960년 정부통령 선거로 당선되었으나 부정선거임이 밝혀지면서 사퇴하였다. 그해 4월 28일 아들 이강석에 의해 권총으로 살해되었다.

 

 

 

자유당 활동과 국회부의장

1951년 이승만의 지시로 이범석, 장택상, 전진한, 박용만 등과 정당 창당 작업에 착수, 이범석 등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자유당 창당 초기, 부당수에 피선된 원외자유당의 이범석과 경쟁관계에 놓였다. 그러나 부당수 이범석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승만과, 이승만의 곁에서 이범석, 윤치영 등 강경파를 분리시키려는 미국의 움직임 등에 의해 이범석이 평당원으로 격하당하면서 그는 자유당의 2인자로 부상하였다.

 

 

1953년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면서 이범석의 족청계(族靑系) 세력을 축출하였고, 1954년 6월부터 제3·4대 민의원 의장을 지냈고, 1955년부터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초대 의원에 피선되었다.[4] 이러면서 그는 권력의 '제2인자'로 등극하였고, 1954년에는 이승만대통령 장기집권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여 가결시키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지시한 것 보다 그의 하수인들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반론도 있다. 이 무렵 그의 집은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고 있었다.

 

제1공화국 후반기에서의 이기붕 권력은 막강했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서 혁명 직전까지만해도 이기붕에 대한 찬양하는 내용의 서적이 자주 출간되기도 하였는데 그 중 '민족의 해와 달'이란 책을 들을 수 있다. 여기서 '민족의 해'는 대통령 이승만을 지칭, '민족의 달'은 이기붕을 지칭한다. 이책에 나오는 내용은 두 사람의 전기와 사상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만큼 이기붕은 제1공화국에서 영향력이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보여준다. 1955년 11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은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 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다' 고 평가하였다.

 

 

그는 실제로 매우 병약했는데, 권력욕이 강해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깡패들과 연계, 주먹의 힘을 빌어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키웠다.

1956년 5월, 부통령 선거에 자유당 공천으로 출마하였으나 민주당장면(張勉)에게 패하여 낙선하였다. 이기붕 계열 인사에 의한 견제에 반발한 이승만의 다른 측근인 장택상, 윤치영, 이윤영이 모두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 없는 부통령 후보로 나섰는데, 이들의 출마 때문에 그의 표가 분산되었다.[12] 그해 제3대 민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뒤 1960년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다시 출마한다.

 

 

56년 10월 13일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했다.

 

 

1957년에는 자기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승만양녕대군의 15대손이고, 그의 아들인 이강석효령대군의 17대 손이므로 손자 항렬로서 촌수가 맞지 않으나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된 것이다. 또한 같은 해인 1957년 장택상의 초대를 받고, 장택상경기도 시흥 별장에서 조병옥과 여야 영수회담을 하였다. 1957년 가을 장택상, 민주당장면 등과 선거법 협상을 벌여 후보난립을 막기 위해 출마자의 기탁금제를 신설(40만환)하고 선거비용 제한, 선거관계자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게 하는등 법을 대폭 손질하고 의석(선거구)도 203개에서 233개로 늘렸다.

 

 

서대문구에서 경기도 이천으로 선거구를 옮긴 이기붕은 1958년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제4대 민의원의장이 되었다. 자신의 정치적 텃밭을 이기붕에게 빼앗긴 이정재는 이로 인하여 이기붕의 곁에서 떠나 한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민주당 후보 연윤희는 당과 사전에 협의도 없이 느닷없이 입후보를 사퇴한 후 잠적했다가 5일 만에 국회기자실에 나타나 "이기붕씨와의 대결에서 승산이 없기때문에 사퇴했다"고 말했다. 11월 순국선열추념회 회장이 되었다.

생애 후반

장면과의 갈등

3대 부통령 선거 이후에는 9·28 사태를 계기로 이승만의 측근이었다가 민주당으로 간 장면 역시 적으로 만들었다. 11월 이기붕은 피격 후 입원중인 장면에게 병문안을 갔는데, 장면은 9·28 사태의 배후를 이기붕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응급 치료를 받고 즉시 집으로 돌아갔는데, 30분도 못 되어 이번에는 이기붕 씨가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저격을 당한 나(장면)를 위로하러 온 것은 감사했지만 어딘가 조작된 각본 같아서 불쾌했다. 내가 천연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만송(晩松)에게 “여보시오, 정치라는 건 이렇게 해야 한단 말이오?” 하고 쏘아붙였더니, 그는 잠시 아무 말도 못했다. 평소[17] 같으면 여유 있는 농담으로 이 말을 받아넘겼을 것이다.

 

만송은 한참만에 “장 박사,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이렇게 겨우 얼버무리는 그의 얼굴은 어쩐 셈인지 몹시도 창백했다. 한마디로 제대로 할말이 없었던 모양이다. 워낙 다급했던지 변명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저격을 받고 난 나의 심경은 담담한 것이었다. 이왕 각오한 바를 당했으니 올 것이 왔나보다 하였을 뿐이다. 세상에서 떠든 대로 사건은 매우 복잡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1960년 3월 17일동아일보. 3.15 부정선거 개표결과 이승만 대통령 4선 당선,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보도한 기사.

장면1956년 9월 28일에 발생한 시공관 저격 사태(9·28 사건)의 배후로 이기붕을 지목했고, 1960년 재수사 결과 이기붕의 측근들이 개입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몰락의 전조

이기붕은 이승만의 측근 및 자유당 내에서도 많은 적을 양산하였다. 윤치영을 적으로 만들었고, 자유당 경선 과정에서는 이범석과 라이벌이 되었으며, 이승만의 다른 측근이자 월남 청년을 대표하던 이윤영도 적으로 돌렸다. 윤치영 등은 그의 낙선을 위해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고, 이윤영은 노골적으로 이기붕을 낙선시기키 위해 부통령에 출마한다.[ 고 언급하기도 했다.

 

 

윤치영은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나는 만송이 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면 그를 에워싼 아첨배들의 극성으로 나라의 장래를 그르칠 것이라고 염려가 되었고, 그러한 그들의 파당책 작폐를 예방하려는 뜻에서 내가 속해 있는 대한국민당의 부통령 후보로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당선되리라는 예상 보다는 내가 고약하게 보고 있는 무리들에 업힌 이기붕 후보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낙선시켜야 한다는 하나의 사명감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59년 이윤영은 나라의 운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승만에게 진언을 하러 경무대로 찾아갔다.[19] 그러나 이기붕이 못만나게 해 놓아서 결국 이윤영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다. 대통령 면회를 거절당하자 이윤영은 다시 부통령 후보에 입후보하였다. 주위에서 부통령 입후보는 해서 무엇하느냐고 말리기도 하였다.[19] 그러나 이윤영은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서 출마한다고 하였다.

씨름판에 나가는 사람이 꼭 이기려고 나가느냐? 씨름에 져도 잠뱅이나 찢으려 나가는 거지! 이기붕이를 떨구기 위해서다.

이기붕은 사람을 보내 이윤영에게 돈 1억원을 보내드릴터이니 사퇴하고 자기를 밀어 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윤영은 크게 나무라고 해서 되돌려보냈다.[19] 이승만의 측근들 중에서도 적을 만들었던 이기붕은 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이기붕에게 호의적이었거나 동정심을 보인 인물은 장택상민주당조병옥허정 등이 있었다.

만년

 
수도육군병원으로 옮겨진 이기의 시신

1959년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다.

 

1960년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경쟁자인 민주당장면(張勉)과 경합을 벌였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으나[21], 4·19 혁명으로 사임하고 자유당, 국회의장직마저 제명되었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의 3.15 부정선거는 임기를 마칠 가망이 없는 고령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기키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대통령 유고시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의 지위에 이기붕을 앉히려는 것이었다.

 

 

4월 28일 새벽, 경무대 별관에서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이강석(李康石)이 권총으로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李康旭)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하여 그의 일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사후

그들 내외가 살던 집은 제2공화국 당시 국가에 환수되어 집터에 4·19혁명기념도서관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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