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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돌이킬수 없이 신라가 망해 가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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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5 윤*현 조회수 309 |
주어진 기회를 포기하고 쇠퇴의 길로 들어 서면 망하고 만다! 망국의 필수 조건=안보부재+권력층과 정치권의 부패와 수탈,패거리 분열정치+민생도탄 신라의 망국을 예견한 최치원,관직을 버리고 세속을 떠나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다. 그러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해 890년에 대산군(大山郡 :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 :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 :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가지 못하고, 그 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10여 년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즉위한지 11년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 최치원은 퇴위하고자 하는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해 대리 작성한 각각의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을 박진감 나게 묘사하였다. 이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 : 지금의 경상북도 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 : 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해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모형(母兄)인 승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 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 말까지 생존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뒤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으나, 물외인(物外人)으로 산수간에서 방랑하다가 죽었다고도 하며 또는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주장도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의하면, 고려 왕건(王建)에게 보낸 서한 중에는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실제 왕건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가 송악(松岳)지방에서 새로 대두하고 있던 왕건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은거하고 있던 해인사에는 희랑(希朗)과 관혜(觀惠) 등 두 사람의 화엄종장(華嚴宗匠)이 있어서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즉, 희랑은 왕건을 지지한 반면, 관혜는 견훤(甄萱)의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 때에 최치원이 희랑과 교분을 가지고 그를 위해 시 6수를 지어준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최치원은 희랑을 통해서도 왕건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나아가 고려의 흥기에 기대를 걸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경주에서 송악지방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사람이었다. 비록 그 어느 편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미 잔존세력에 불과하던 신라인으로 남아서 은거생활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문인(門人)들이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해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을 형성함으로써 신흥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최치원이 살던 시대는 사회적 전환기일 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정신계의 변화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정신계의 변화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학문의 기본적 입장은 자신을 ‘부유(腐儒)’·‘유문말학(儒門末學)’ 등으로 표현했던 것으로 보아, 유학(儒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유학을 단순히 불교의 부수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왕자(王者)의 권위수식에만 이용하던 단계를 지나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골품제도라는 신라사회의 족적 편제방법(族的編制方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 업적은 뒷날 최승로(崔承老)로 이어져 고려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확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서 역사를 정리하였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 帝王年代曆≫이다. ≪제왕연대력≫에서는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 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은 모두 야비해 족히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왕(王)으로 바꿨다. 그것은 유교사관에 입각해서 신라문화를 이해하려는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최치원의 유교사관은 유교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는 김부식(金富軾)의 그것에 비해서 냉정한 면이 결여된 만큼 모방적인 성격이 강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제왕연대력≫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야를 포함해 삼국, 통일신라, 중국의 연표가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나 <상태사시중장 上太師侍中狀> 등에서 나타난 발해인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보아 발해사(渤海史)는 제외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상태사시중장>에서는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로 발전한 것으로 인식하고,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건국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로 보아 그가 인식한 한국고대사체계는 삼한-삼국-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져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 자신의 시대에 와서 통일신라 자체도 이미 붕괴되고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인 역할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문학사(漢文學史)에 있어서의 업적이다. 그의 한문학은 중국문학의 차용(借用)을 통해서 형성되었다. 신라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성립된 향가문학(鄕歌文學)과 대립되는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하였다.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다. ≪동문선≫과 ≪계원필경≫에 상당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으며, 평이근아(平易近雅)하여 당시 만당시풍(晩唐詩風)과 구별되었다. 최치원은 그 자신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관계의 글들을 많이 남기고 있었다. 불교 중에서도 특히 종래의 학문불교·체제불교인 화엄종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서 비판하는 성격을 가진 선종(禪宗)의 대두를 주목하고 있었다. 지증(智證)·낭혜(朗慧)·진감(眞鑑) 등 선승들의 탑비문(塔碑文)을 찬술하였다. 그 중 특히, <지증대사비문 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선종사(新羅禪宗史)를 간명하게 기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신라의 불교사를 세 시기로 구분해 이해한 것은 말대사관(末代史觀)에 입각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그러나 불교 중에서 주목한 것은 선종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종래의 지배적 불교인 화엄종이었다. 화엄종관계의 글을 많이 남기고 있어서 오늘날 확인되는 것만도 20여 종에 이르고 있다. 특히, 화엄종 사찰인 해인사에 은거한 뒤부터는 해인사관계의 글을 많이 남겼다. 화엄종관계의 글 중에는 ≪법장화상전 法藏和尙傳≫·≪부석존자전 浮石尊者傳≫·≪석순응전 釋順應傳≫·≪석이정전 釋利貞傳≫ 등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로 보아 신라화엄종사(新羅華嚴宗史)의 주류를 의상(義湘)-신림(神琳)-순응(順應)-이정(利貞)-희랑으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이해하지 않았는가 한다. 그리고 화엄학 외에도 유식학자(唯識學者)인 원측(圓測)과 태현(太賢)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화엄학과 함께 신라불교의 양대 조류를 이루었던 유식학(唯識學)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주목된다. 유교와 불교 외에 기타 사상으로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도교(道敎)와 노장사상(老莊思想)·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다. 당나라에 있을 때 도교의 신자였던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도교에 관한 글을 남기고 있었던 것을 보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계원필경≫ 권15에 수록된 <재사 齋詞>에서 그의 도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귀국한 뒤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진골귀족의 배척을 받아 관직을 떠난 뒤에는 현실적인 불운을 노장적(老莊的)인 분위기 속에서 자족하려고 하는 면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현실도피적인 행동이 뒷날 도교의 인물로까지 잘못 전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찬술한 <대숭복사비문>에 의하면, 예언적인 도참신앙(圖讖信仰)과 결부되어 국토재계획안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회적 전환의 추진력이 되고 있었던 풍수지리설에도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적인 위치가 선승(禪僧)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道詵)과 비슷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유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유교 외에 불교나 노장사상, 심지어는 풍수지리설까지도 아무 모순 없이 복합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면이 <난랑비서문 鸞郎碑序文>을 비롯한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상적인 복합화가 중앙의 진골귀족들의 독점적인 지배체제와 그들의 고대적인 사유방식에 반발하던 6두품출신의 최치원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신라고대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말년에 와서의 소극적이며 은둔적인 생활은 시대적인 제약성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적인 전환기에서 중세적 지성의 선구자로 머물다간 아쉬움을 남겼다. 1020년(현종 11) 현종에 의해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다음해에 문창후(文昌候)에 추시(追諡)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해안현(解顔縣)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20권, ≪금체시≫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사륙집 四六集≫ 1권, 문집 30권 등이 있었다. 사서(史書)로는 ≪제왕연대력≫이 있었다. 불교에 관계되는 저술로는 ≪부석존자전≫ 1권, ≪법장화상전≫ 1권과 ≪석이정전≫·≪석순응전≫·≪사산비명 四山碑銘≫ 등이 있었다. 오늘날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법장화상전≫·≪사산비명≫뿐이고, 그 외는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에 기(記)·원문(願文)·찬(讚) 등 그 편린만이 전한다. 글씨도 잘 썼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으로는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유명하다. 그리고 전해오는 많은 설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시대 김집(金集)의 ≪신독재전집 愼獨齋全集≫에 실린 <최문헌전 崔文獻傳>이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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