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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밝혀준 고구려.백제/바람이 된 광개토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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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5 윤*현 조회수 273 |
[삼국사기/최치원 열전]을 보면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관리 생활을 할 때 당나라 관리에게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강성할 때 백만이었으며 북으로는 유,연(지금의 하북성),제,노(지금의 산동성)를 소란케 하였고, 남으로는 오,월(지금의 양쯔강 일대)을 정벌하여 중국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한 대목이 있다.
당시 최치원이 고구려.백제의 강성기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아마도 당나라에 있던 고구려.백제 관련 사서들을 읽고 숙지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식민사학에 갇힌 강단사학자들은 부정하고 거부하는 역사적 내용일지 모르나, 최치원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나문헌들이 사료적으로 고증하고 있듯이 한반도 서남부 지역의 마한의 제후국에 출발한 백제는 마한의 선박제조술과 해양술을 기반으로 동아시아 해양강국이였기 때문에 장수태왕 이전까지 지나 동남부 지역을 차지했던 나라였기 때문에 넘어 가기로 하고, 고구려 영역만 사료적으로 고찰해도 최치원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글을 보면 고구려가 강성할 때 남으로는 저 멀리 양쯔강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또한, 평양에 덕흥리 고분벽화가 발견되었는데 그 고분의 주인이 유주자사 벼슬을 지낸 진이라고 합니다. 일본측에서는 이 고분을 보고 고구려가 북경까지 진출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영토는 현재 작게 나와 있지요 지나문헌 『진서』를 보면 고구려가 수군으로 후연의 수도 연군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이 기사 이후 진서 등 다른 지나사서에는 후연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후연이 사라지고 고구려 유민 고운을 왕으로 세워 고구려의 제후국이 되는 북연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광개토태왕이 이 때 기마군과 수군으로 당시 화북지방에 잇던 후연을 멸망시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황하 이북지역을 다스리는 유주자사를 임명하여 직접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이는 단군한국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겠다는 고구려의 다물 국시를 광개토태왕이 실현했다는 의미가 되며, 단군한국의 직할영토가 황하이북까지였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됩니다.
398년이라면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시절로 당시 고구려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했습니다. 북위가 고구려인 56만명을 포로로 잡아 왔다면 고구려를 멸망시켜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때 고구려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그건 고구려가 만리장성을 넘어 산서성 태원까지 진출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중국의 역사부도를 보면 고구려가 전성기일 때 지나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했다고 그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광개토태왕 시기는 [환단고고기/고구려국본기]기록대로 동방의 어떠한 나라들도 고구려 기마군을 이길 수 없는 "해동(고구려)의 최강성기"였습니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은 38세에 조기 붕어하지 않고, 가묘를 만들어 자신의 유물만 넣어 300인의 수묘인으로 지키게 아들 장수태왕에게 명하고, 북위수도인 업에 이주시킨 고구려인 56만 중에 지원자들만 데리고 기마군을 형성하여 서진하여 유럽으로 말을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56만에서 20만명만 따라도 어마 어마한 기마군입니다. 게르만족을 몰아 로마를 멸망시킨 주역은 훈족으로 한-고리(고구려)를 세운 고구려인들이였습니다. 서로마를 굴복시키고 동로마를 굴복시킨 아틸라는 한자어로 광개토태왕을 부르는 이름(안)입니다. 아틸라는 성품과 기질과 군사적 전략전술이 광개토태왕과 동일합니다. 로마를 굴복시키고 조공으로써 황금을 바치게 한 당시의 최강 기마군과 리더는 고구려 기마군과 광개토태왕 말고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틸라가 고구려의 소머리 투구그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결정적으로 입증합니다.
광개토태왕이 이주시킨 54만의 고구려인들은 이후 유라시아 초원사를 바꾸는 케레(코리아)족이 됩니다. 몽골의 징기스한이 코리아족의 칸이라면 징기스한을 키운 부족도 고구려(케레이트)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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