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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국민정치인 소크라테스-너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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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7 윤*현 조회수 263

짧은명언 소크라테스'철학의 숲, 길을 묻다' 철학의 숲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프랑스인들이 휴가길에 앞다퉈 찾았다는 이 책,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추구한 소크라테스는

정치적으로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궤변를 거부하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추구한 소크라테스는 당시 기득권 집단인 궤변론자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며 돌직구를 날렸다. 그래서 미움을 받아 독배사형에 처해졌다.

 

소크라테스는 공정하고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철인정치를 추구하였다. 고로 국민과 대중을 속이고 능멸하고 갈취하는 부패비리.독식.차별주의자들의 정치를 거부한 것이다.

 

 

키케로가 말했듯이 그는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다". 즉 소크라테스는 이오니아와 이탈리아 우주론자들의 자연에 관한 사변에서 인간생활의 성격과 행위를 분석하는 데로 철학의 초점을 옮겼다. 그는 도덕적 가치가 침식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혼란기에 살면서 "너 자신을 알라"는 충고와 도덕적 용어의 의미에 대한 연구를 통해 윤리생활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철학·기하학·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생애

 

아버지 소프로니스코스는 아테네 제국을 세운 델로스 동맹의 창설자 아리스티데스(Aristides the Just) 가문의 친구였다.

 

신비의 조각가 다이달로스가 소크라테스의 선조였거나 조각이 가업이었다는 플라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아버지가 조각가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였다. 회고록 작가인 키오스의 이온은 전쟁중이던 BC 441~ 439년에 소크라테스가 사모스에서 아낙사고라스의 제자 아르켈라오스와 사귀고 있었다고 전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 테오프라스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아르켈라오스의 제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BC 423년 아리스토파네스와 아메이프시아스 등이 희극의 주인공으로 삼을 정도로 아테네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크산티페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크세노폰은 그녀의 기질이 불 같았다고 전하지만 그녀가 바가지 긁는 여자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의 참을성은 대단했다. 그는 군에 있을 때 어느 여름날 아침 일찍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사색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공직이 자신의 원칙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보고 정치적으로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BC 406~405년에는 500인회(불레) 회원으로 있었으며, 아르기누사이의 승전자들을 재판할 때 처음에는 동료 회원들과 함께, 나중에는 혼자서 온갖 협박에도 불구하고 참주들의 위헌적인 유죄판결을 끝까지 거부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기소되었다. 소송을 제기한 자는 권력자 아니토스로서, BC 403년 반혁명을 통해 복위한 민주주의자의 두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명목상의 기소자는 별 볼일 없는 멜레토스였다.

 

기소 이유는 2가지, 즉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도시가 숭배하는 신들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사실상의 이유는 당시 30인 참주의 공포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적인 민주정을 시행하고 있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반민주주의적인 알키비아데스와 30인 참주의 우두머리였던 크리티아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혐의였다. 그는 배심원 투표에서 약 280 대 220의 비율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기소자는 사형을 요구했다.

 

항소가 받아들여져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변론했다. 그는 당당하게 자신이 도리어 국가 공헌자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법정의 배심원들을 흥분시켜 501명 가운데 361명의 요구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아테네 규칙에 따르면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24시간 이내에 '독배를 마셔야' 했는데, 델로스로 신성한 배를 보내는 기간에는 형을 집행하지 않기 때문에 형집행이 1개월간 미루어졌다. 그는 친구들을 매일 만나면서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 크리톤이 탈출계획을 꾸몄으나 소크라테스는 거절했다. 판결이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 판결은 법정의 판결이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독배를 마셨다. 그의 최후에 관한 이야기는 플라톤의 〈파이돈 phaedon〉에 잘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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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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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V CHOSUN 안*환 2016.01.28 01:32

    大哲 쏘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현상계적 철학이 아닌 천상계[이데아]를 중시하는 철학-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가 兩者를 아우르는 철학이었습니다. 본질 핵심은 진정성 眞實 正義입니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란 말은 비철학적 말이되고 實用主義 언어라고 봅니다. 보인는 것 이익 기득권보호차원의 붕당정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한 엄격히 말하면 정의는 실종된 것이고 나만 있고 너는 없다라는 편견적 마인드이고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짙어 집니다. [정치란 우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고 말한 어느 정치인의 말이 다가서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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