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민의 시사탱크 프로그램 이미지

시사

장성민의 시사탱크

세상을 듣는 귀!
세상을 보는 눈!
시사토크의 새로운 장이 열린다!
























장성민의 시사탱크 - 참여 게시판

장성민의 시사탱크 - 참여 게시판
폐족(친노) 모용선비족을 응징한 광개토태왕
  • 페이스북
  • 트위터
  • 이메일보내기
  • URL복사
2016.02.01 윤*현 조회수 231

국민과 호남을 능멸해 온 친노는

 

 

스스로 폐족을 자칭한 집단이다!

 

 

폐족은 폐기처분해야 할



쓰레기족이라는 의미다.

 

 

    전한군현지역인 요서를 차지한 모용선비(연)는 부여.고구려를 유린했으나 광개토태왕시기에 궤멸   안철수 후보,전 방위태세 강조/모용선비에게 유린당한 고구려의 교훈     고구려 이야기 -제2부 왜와의 전쟁 그리고 최고의 숙적 모용선비와의 최후의 결전

  안철수 후보,전 방위태세 강조/모용선비에게 유린당한 고구려의 교훈    고구려 이야기 -제2부 왜와의 전쟁 그리고 최고의 숙적 모용선비와의 최후의 결전

 모용선비=전연=후연=북연=토욕


삼국 시대 때 지금의 허베이 성의 우북평(右北平) 서쪽 상곡(上谷)에 이르는 지역에 목연(木延)이라는 이름의 대인(大人, 혹은 大酋長)이 인솔한 선비계 부족이 출현하였는데, 선비족은 부족명과 부족 구성원들의 성씨를 대인의 이름으로 정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라 부족명을 모용, 성씨를 모용씨라 정하였다. 2세기 경은 모용서비가 활약한 시기라 추측된다.

5호16국

3세기에는 주거 영역을 대릉하(大凌河) 하류 지방으로 옮겨 유목 생활 외에 농경도 하였다. 3세기 말에 당시의 추장 모용외(慕容廆)는 스스로를 선비대도독(鮮卑大都督)이라 일컬었고, 서진에서 영가의 난을 피하여 투항해온 한족 사람들을 임용하여 정무를 맡게 하였다. 또한 한족풍의 예법과 제도를 채용하였으며, 동진으로부터 평주목(平州牧), 요동군공(遼東郡公) 등의 관작을 받았다.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은 스스로를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수도를 용성(龍城)에 정함으로써 전연을 건국하였다. 모용황은 이후에도 세력을 확장하여 황제로 즉위하였고, 화북 지방의 동부를 지배하였다. 전연이 멸망한 뒤 후연남연이 건국되었다. 5세기북위의 화북 통일로 북위에 병합되었다.


모용선비의 일부는 티베트계의 현지인을 제압하고 토욕혼을 세웠다.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토욕혼중국의 남북조와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635년당나라에 항복하여 예속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663년 티베트계의 토번(吐蕃)에게 멸망하였다.


현재 경주의 거대한 적석목곽분은 한나라가 흉노를 정벌할 때 모용선비에 흡수된 흉노족의 무덤으로 고구려 침략 때 고구려에 패하여 동해안을 타고 내려와 신라왕조를 세운 모용선비의 흉노기마집단의 무덤군이다.

 .



모용선비(전연)는 고구려를 침략하여

 

국내성과 국토를 유린하고, 미천왕

 

무덤까지 파헤치고 부장품과 시신까지

 

도굴해간 천인공노할 짓과,


왕후와 백성들까지 인질로 끌고


갔는데,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았던

 

광개토태왕은 즉위하여 철천지 원수의 

 

모용선비족을 5만의 기마군으로 포위하여

  

철저히 응징해서 궤멸시켰다. 비로소  

 

동아시아 공존을 추구한 고구려 중심의  

 

세계가 열린 것이다.

댓글 0

(0/100)
  •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