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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군주 광개토태왕,국가지원으로 출산장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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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1 윤*현 조회수 340 |
[자료]중원을 호령하고 백성을 사랑했던 위대한 코리아 임금 광개토太王,고구려를 침략하여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을 끌고 간 모용선비을 제후국으로 삼다. 어릴적 역사와 학문을 닦으면서 다물정신(고토회복과 홍익인간이념 회복)에 확고했고, 정신력과 시력을 집중하여 날아 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 내는 훈련을 했을 정도로 광개토태왕은 먼저 백제와 모용선비 등 주변나라들로부터의 침략을 막아낼 강력한 국방력을 세계 최대 철생산 국가였던만큼 세계 최강의 찰갑 기마군을 조직하였다.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점은 고구려를 침략하여 국내성과 국토를 유린하고 할아버지 미천태왕의 무덤을 훼손하여 유물을 도굴하고 시신을 도적질하고, 왕후와 함께 고구려 백성들을 끌고 간 모용선비족이 세운 후연을 5만의 기마군을 동원하여 공격하여 멸망시킨 일이다. 침략과 도발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용선비족은 마치 6.25기습남침을 통하여 서울과 국토를 유린하고 수 많은 백성들을 끌고 간 김일성 흉노집단과 부합된다. 고로 작금의 대한민국에 필요한 통치자가 바로 광개태왕의 리더쉽인 이유다. 태왕의 즉위 당시 고구려의 서변 정세는 고구려에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지나대륙은 361년 서진 멸망 이후 대흥안령 지역에서 남하한 선비족이 득세한 '5호16국', '남북조시대'로 불리는 혼란기의 시대에 있었다. 이 혼란은 30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백제를 굴복시킨 후, 드디어 광개토태왕은 401년 동안 기다려 왔던 고구려의 철천지 원수나라인 후연 공격을 시작했다. 첫 목표는 후연의 평주자사가 있는 숙군성. 이곳은 후연의 수도인 용성과 멀지 않은 곳으로 현재의 조양시 부근이다. 광개토태왕이 숙군성을 공격하자, 후연의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후연의 왕 모용희(慕容熙)는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 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다음해 모용희는 후연의 북쪽에 위치한 거란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고구려군과 거란군에게 3천 리나 쫓겨나갔다. 이후 광개토태왕은 후연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407년에 5만 대군을 동원하여 거란과 함께 사방합전(四方合戰)으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이 때 고구려군은 유주성 전투(柳州城戰鬪)에서 후연의 10만 대군을 격퇴시키고 적군의 갑옷 1만여 벌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빼앗는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이렇게 되자 후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고구려 사람인 '고운'이 왕으로 추대되게 된다. 고운은 모용선비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끌려 온 고구려 왕실의 자손이었다. 고운의 할아버지 고화는 모용황이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끌고 간 고구려 백성 5만 여명의 포로 중 한 명이었다. 고운은 자신이 고구려계임을 드러내고자 원래의 고씨 성을 되찾았다. 408년, 광개토태왕은 고운을 고구려의 제후로 인정하고 그 지역에서 철수한다. 광개토태왕은 후연 지역이 한족과 선비족 등 이민족이 많은데 다가 중원의 여러 나라와 자주 다툼을 벌여야 하는 특성이 있는 만큼 직접 지배를 하지 않고, 고구려에 복종하는 제후국으로 세우고 철수한 것이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 광개토태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주위의 그 어떤 민족도 고구려를 넘보지 못했다. 장수가 선봉에 서서 위태로운 곳에 먼저 이르면 모든 병사는 더없이 막강해진다고 하였다. 광개토 태왕은 위태로운 형세에 이르렀을 때도 피하라는 부하들의 권유도 뿌리치고 선봉에서 병사들과 더불어 싸웠다. 그것이 고구려의 상무정신이기도 하였다. 광개토태왕은 해땅(배달)국에 도전한 공손헌원을 응징하기 위해 지나대륙을 휩쓸고 다닌 치우천왕의 화신이나 마찬가지였다.소수의 정예 병력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공격하는 그의 전격전 모습은 구천지상(九天之上)에서 벼락치듯 했다고 한다. 또한 말의 머리까지 갑옷을 씌운 철기 기마군단과 개마무사, 그리고 당나라 화살의 한계가 500보임에 반해 무려 1000보, 즉 약 500미터까지 날라 갔던 활, 맥궁은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을 더욱 높여 주었다. 전쟁 후에는 나라의 부강에 전력을 기울였다. 백성들을 위해 모내기를 할 때, 집을 지을 때 태왕은 군사들이 직접 백성들을 돕게 하였고 성을 쌓아야 할 때는 농사기를 피하게 했다. 출산을 장려하여 임산부는 나라에서 돌봐 주었고 아들을 낳으면 개 한 마리와 술을, 딸을 낳으면 돼지 한 마리와 술을 주었으며 쌍둥이를 낳으면 한 명의 양육비를, 세 쌍둥이를 낳으면 둘의 양육비를 나라에서 부담할 정도였다 한다. 마니산 제천단에서 하나님께 제천하며 나라의 안전과 평안을 빌였던 태왕은 평화가 계속되자 아들 거련(이후 장수태왕)을 데리고 백두산에 오른다. 백두산에는 환웅성조께서 풍백과 우사를 거느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던 제천단이 있다. 태왕은 태자 거련과 함께 신단수 아래에서 선조들께 제사를 지냈다. "우리 고구려는 천손, 하늘의 후손이다. 선조들이 가꾸고 다스린 이 땅을 대대손손 물려 주어야 한다." 413년 10월. 광개토태왕은 남쪽지방을 순찰하고 돌아와 병상에 누운 지 2달 만인 제위 22년, 39세의 나이로 서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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