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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정몽주-이방원/유약한 자들에게는 권력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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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6 윤*현 조회수 298 |
할아버지 고추모 때부터 아버지 유리왕에 이어 자신이 왕위에 즉위한 후에도 계속해서 고구려에 항복의 굴종을 요구하며 침략한 동부여의 대소왕을 고구려 3대 대무신 태왕인 고무휼이 막아 내고 정벌하여 죽여 버림으로써 고구려가 동아시아 중심국가로 부상할 수가 있게 되었다. 당나라가 주변국들을 굴종시키고 반드시 고구려를 침략할 것이라며 대비하자던 연개소문은 자신을 제거하려는 친당노선의 정치세력을 과감히 숙청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정몽주와 손을 잡고 고려를 개혁하려고 하였다.그러나,정도전은 새로운 건국을 꿈 꾸었다. 정도전은 고려를 유지한 상태로 개혁을 꿈 꾸었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생각이 달랐다. 중간데서 이성계는 괴로와 하였다. 이성계와 정몽주의 생각처럼 정도전도 같았다면 조선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가 생각이 다르다면 결국 과감히 행동하는 자가 권력을 잡는다! 정몽주는 잠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이방원을,고려를 무너뜨리려는 정도전을 정치적으로 제거하지 못하여 헤게모니에 패배하였다! 그래서 유약한 자들에게는 절대로 권력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고추모는 부여(卒本夫餘)로 망명하였다. 부여공주인 소서노와 결혼하고, 아들이 없었던 부여 고무서 단제의 후계자가 된 고추모가 기원전 37년에 부여 단제에 즉위하고 수도성을 오녀산성으로 삼고 국호를 선조의 나라로 바꾸니 고리(고려)다. 고추모는 비류국과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고, 기원전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다. 고추모는 환인.환웅.환검을 모시는 3성조 국조전이 있었던 장춘으로 수도를 천도하였다. 고추모는 죽으면서 등극한 유리왕은 수도를 장춘에서 국내성으로 옮겨 왕권을 강화했다. 당시 동부여의 왕이었던 대소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했다. 기후 기록과 화분 화석의 연구를 통해 과학자들은 당시의 연평균 기온이 오늘날보다 0.5~1도 낮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날씨가 추워졌으며 더불어 몹시 가물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한서(漢書)’에 “한 성제 영시 3년(B.C.14) 여름, 큰 가뭄이 들었다” ‘동관한기’에 “한 광무제 전무 4년(28년), 왕망말기 이래 매년 천하가 가물고 서리가 내려 모든 곡식이 여물지 않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2007년 중국과 미국·영국의 과학자들은 공동으로 기후변화가 전쟁의 발발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광범위하게 조사해 미 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1400년에서 1900년까지 일명 소빙하기라고 불리는 시기 동안 기온의 변화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전쟁의 발발 수에 대한 곡선을 그려보았다. 놀랍게도 기온이 오르거나 내려가는 것에 맞춰 전쟁 발발 수 그래프도 함께 요동쳤다. 온도가 급작스럽게 떨어지면 전쟁의 발발 수가 늘어났고, 기온이 온화해지면 그 수는 줄어들었다. 추운 시기에 전 세계적으로 전쟁 발발 수는 기온이 온화했을 때보다 2배나 많았다. 추워지면 곡식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부족한 식량을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쨌든 지나국의 동쪽에 있었던 부여는 농업국가였기에 가뭄과 추위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부여의 왕 대소는 식량의 부족함을 해결하기 위해 고구려에 조공을 요구했다. 유리왕은 부여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고구려도 날씨의 영향으로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부여의 요구를 거부하자 기원전 6년 11월, 부여 왕 대소는 무려 5만의 병력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강력한 한파가 내습했다. 한파와 더불어 폭설이 내리자 부여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서기 13년 11월, 부여 왕 대소는 두 번째로 고구려를 침공한다. 이때는 승승장구하면서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 진출을 눈앞에 뒀다. 밀리던 고구려는 날씨를 이용해 승리했다. 유리왕의 아들 무휼의 군대가 강추위가 몰아치는 밤에 기습공격을 한 것이다. 미처 대비하지 못했던 부여군은 대패했고 적은 수의 병력만 살아 겨우 돌아갔다. 유리왕의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무휼은 역사에서는 대무신왕이라고 부른다. 부여와의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내실을 기한 고구려는 주변국의 정복전쟁에 나섰다. 고구려와의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던 부여의 대소왕은 모든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에 맞섰다. 3차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대무신왕과 부여왕 대소는 부여의 남쪽 벌판에서 대치했다. 부여의 대군이 고구려군을 포위했다. 초봄의 따스한 해가 떠오르면서 언 땅이 녹기 시작하자 평원이 진창으로 변했다. 전차와 기병을 주 무기로 했던 부여군의 기동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이때를 노린 대무신왕은 병력을 집중해 부여군의 심장부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의 3대 왕을 이어 내려오면서 세 번에 걸친 전쟁을 벌였던 부여 왕 대소는 전사했다. 세 번에 걸친 전쟁에서 날씨는 철저히 고구려의 손을 들어주었다. 부여의 대소왕은 날씨가 얼마나 미웠을까? 부여의 대소왕이 세 번의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던 것은 병력과 장비의 우세만을 지나치게 의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고구려는 소수 병력으로도 적절한 전술과 날씨를 이용한 대승을 거뒀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전쟁의 승리가 병력의 수나 장비의 질로 결정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리더의 뛰어난 전술과 날씨와 지형을 적절하게 이용할 때 승리는 더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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