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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침략을 물리치고 평양성 차지한 백제 근초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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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3 윤*현 조회수 629


 

 

 



근초고 대왕이 고구려를 제압한


백제 최강성기 수도성이였던


서울 풍납토성(마한토성 개축)


동아시아 최대 토성



부여 동명성왕(고두막)의 후손으

 

고구려 태조왕 당시 고구려 2만의 기마군을 격파하고

 

백제를 건국한 부여왕 구태(고이왕)은 장인이 되는

 

후한의 요동태수가 다스린 요동반도에서 이주하여

 

 대방(황해도)에서 백제를 세우고 남하하여 온조 십제와


한반도 마한와 열도을 통합하고 고구려를 제압하고

 

 황해도 지역을 기반으로 발해만을 건너 요서지역의

 

 부여세력을 융합한 본국 백제의 근초고대왕이


서울 풍납토성을 수도성으로 삼았다! 석촌동의 거대


적석고분의 주인은 근초고 대왕으로 추정되고 있다.



근초고 대왕(近肖古王, 285 ~ 375년, 11월 재위: 346년 9월~375년 11월)은 백제의 제13대 국왕이다. 이름은 중국의 《진서(晉書)》에 의하면 여구(餘句)[1], 일본의 《고사기》에는 조고왕(照古王)[2], 《일본서기》에는 초고왕(肖古王)등의 이름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는 속고왕(速古王)으로도 불린다.



근초고 대왕은 서남부지역의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였던 백제국이 차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도 아주 크고 용감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임에도 차기 왕으로 지목되어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 광개토왕에 비길 만한 정복군주로 평가받는 근초고왕은 남으로 전라도 지역까지 마한 54개 연맹체 전체를 통일하였고, 북으로는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371년)



지나대륙으로 진출하는 기지(대방) 확보를 위한 고구려와의 전쟁


백제는 근초고 대왕 이전부터 후한의 대방군을 차지하고 발해만을 건너 요서로 진출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CE 246년)조에는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백제)왕은 (낙랑군이) 비어있는 틈을 타서 좌장(左將) 진충(眞忠)을 파견하여 낙랑군의 변경을 습격하고 그 곳 주민을 빼앗았다”고 하였고 분서왕 7년(CE 304년)조에도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군의 서부현을 공격하여 빼앗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백제는 이미근초고 대왕 이전부터 북한지역의 후한군현을 차지하고 발해만을 건너 요서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부여까지 공격하였던 것이다. 이 기록을 뒷받침하는 기사가 『자치통감』 영화(永和) 2년(346)년의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잔해져서 서쪽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다.


369년 9월, 고구려 고국원왕이 군사 2만을 이끌고 치양성(황해도 배천군, 구모로성)에 쳐들어 왔다. 그러자 근초고 대왕은 태자 근구수를 보내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고 고구려군 5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고구려로 도망쳤다가 마음을 고쳐 돌아온 백제인 사기(斯紀)가 제공한 고구려의 군사정보 덕분에 태자가 고구려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371년에는 근초고왕이 태자 근구수와 함께 패수(예성강)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옛 대방(현 황해도)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하였고, 이어 여세를 몰아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본기에는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표문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태자 근구수가 고국원왕의 목을 베어 창에 꽃아 효수하였다 한다.


이로써 백제국은 작게는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서 크게는 강원도, 황해도까지 퍼져 있던 마한 54개 부족국가 연맹체를 통일한 것은 물론, 보다 강력한 고대 국가의 기반을 마련했다. 근초고왕은 이러한 영토 확장을 기반으로 한반도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더욱 강력한 왕권을 세움으로써 왕위의 부자 세습 제도를 확립하였다.



외교문화


근초고왕은 백제 역사상 최초로 중국 사서에 이름이 기록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진서(晉書)》에 따르면, 372년 음력 1월과 6월에 동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는 한편,[5]일본서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아직기왕인 두 학자를 에 파견하여 왜의 왕이 그들을 태자의 스승으로 삼기도 했다. 왜왕에게 칠지도가 보내진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근초고왕은 또한 왕실의 존귀함을 알리고 국가 체제를 굳건히 할 목적으로 박사 고흥에게 명하여 백제 왕실의 역사를 정리하게 함으로써 《서기》가 저술되었으나 불행히도 지금은 남아있지 아니하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이 철정 40매를 왜국에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어 왜는 근초고왕 재위 시에 가야와 백제로부터 철기를 수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마한을 기반으로 동아시아 해상제국 건설한 대백제



백제 수도성- 서울 풍납토성



"백제는 병력을 동원하여 제‧노‧오‧월 등의 땅을 평정하고 관서를 설치했으며 백성들의 호적을 정리하고 땅을 나누어 왕과 제후를 봉하였다."(百濟以兵平定齊魯吳越之地, 設官署, 索籍民戶, 分封王爵).(『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구당서][양직공도]"백제는 옛 마한의 나라로 부여 별종이다...마한을 통합하고..북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


 

백제는 한반도 남한지역의 마한에 속한 나라로 마한을 통합하고 본국인 한반도 서남부 지역를 중심으로 서쪽 영토는 발해만을 건너 지금의 요서지역에서 양자강 지역에 까지 영토가 확장되었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열도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백제가 마치 지나대륙에서 개국한 나라인양 동북공정 논리를 펴고 있으니 국적이 어디인지 묻지 않을 수 없고, 문헌기록도 이해못하는 무지한 자들이리 아니할 수 없다. 지나문헌 송서기록에서백제국은 본디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있었으며]의 내용은 백제본국의 위치를 명확히 기록하고 있는데, 요동의 동쪽으로 1천리 지점을 한반도지역이 아니라, 지나대륙으로 이해하는 그 뇌구조가 한글을 이해못하는 외국인 뇌구조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백제 위치와 관련하여 지나문헌위서에서는 대륙 백제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와 1천여 리 떨어져 있으며 소해(발해만)의 남쪽(한반도 서남부)에 자리 잡고 있다.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땅은 매우 낮고 습기가 많아 모두 산에서 기거한다


김부식의「삼국사기에도 북위와 백제와 전쟁기록을 짧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수 많은 지나문헌들의 기록이 명백히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역사교과서에는 지나대륙을 지배한 백제를 기록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고 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역사교육사인가? 그러니까 지나국이 대한민국을 웃습게 아는 것이다.



지나사서에서 백제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은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송서(宋書).


송서는 남조 제나라 무제 연간인 488년에 심약이라는 사람이 무제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책인데 권97 열전 제57 이만(夷蠻)편에서 백제에 대한 기록은 이렇다. 백제국은 본디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있었으며 그 뒤에 고려는 요동을 공략하여 갖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다스리던 지역을 일컬어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진평군이라는 지명까지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가 대륙의 요서지역을 다스린 것이 분명하다 후한말 왕을 자칭했던 후한의 대방군 태수가 딸 보과를 백제에 시집보냈고 백제 책계왕의 아내가 대방군 태수의 딸인 것이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국 역사교과서에는 대륙 백제의 언급이 없다. 이는 분명히 역사 왜곡이다.


당나라 태종 연간이 636년에 편찬한 양서(梁書)는 남조의 양나라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 이렇게 돼 있다. 백제는 본래 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으나 진()나라 때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영토로 하자 백제 역시 요서군과 진평군의 땅에 자리 잡고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양서는 백제가 요서지역을 차지한 때를 진()나라 때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는 진평군 이 외에 요서군이라는 지명과 백제군이라는 지명이 추가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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