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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일가 신격화는 하나님에 대한 대적 행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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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7 윤*현 조회수 252 | ||||||||||||||||||||||||||||||||||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한민족은 하나님 민족(천손족)
"먼저 하나님 나라(한국)와 하나님 의(공의=양심)를 구하라!" [자료] 하나님께 제사드린 한민족의 제천(祭天)과 돌 제단
가장 높은 산에서 돌 제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드렸던 한민족.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무천, 영고, 동맹과 같은 제천의식에서 우리는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제천의식의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마니산의 참성단이다. 그리고 이 같은 유적이 셈 족이 속한 알타이 계통의 지역에서 골고루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하늘에 제사를 드렸던 한민족의 신앙은 유일신인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 제사 드린 한민족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은 상고시대부터 있었던 국가적인 행사로, 한민족 고유의 경천(敬天)사상이다. 이를 하늘(天)과 신(神)과 천궁(天宮: 하늘나라)의 근본 뜻을 믿고 따르는 종교로써 신교 또는 천신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것은 지배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 까지도 생활철학으로 남아있다.
예맥의 무천(舞天),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백제의 교천(郊天), 신라의 팔관제(八關祭), 고려의 팔관회(八關會)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제천의식은 매년 10월 고을에서 뽑힌 한 사람의 천군(天君: 제사장)에 의해 ‘소도(蘇塗)’ 라는 곳에서 진행됐다(한정호/ 한민족 그는 누구인가). 이 때 천군은 성결하게 맹세하는 예식을 행하고 복을 빌었다. 그리고 거룩한 제사를 위해 소(牛)와 같은 짐승을 잡아 그 희생의 피를 제단에 뿌렸다(노승대/ 바위로 배우는 우리문화).
가장 높은 우두머리산의 참성단
이러한 고대의 제천의식이 있었던 장소로 강화도 마니산(摩尼山)의 참성단(塹城壇)을 들 수 있다. 제천단(祭天壇)으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참성단은 국조(國祖)로 대표되는 대제사장이 하늘에 제사를 올린 장소다(최범서/ 이야기한국고대사). 우리는 참성단의 특징을 ‘마니산’ 이라는 명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대한 민족(보림사)> 의 저자 송호수 박사에 의하면 이 산의 명칭은 마니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니는 불교 전래 이후에 불교용어에서 온 것이고, 원래는 우리말의 머리(頭)를 뜻하는 ‘마리’ 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하나님께 제사지내는 우두머리산’ 이라는 뜻이다. 또한 송박사는 노아의 홍수와 유사한 참성단의 유래를 얘기한다. 그 내용은 노아의 홍수로 짐작되는 단기 50년에 큰 물이 넘쳤으며, 제사장이 세 아들을 강화로 데리고 와서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임금들은 나라에 가뭄이 계속될 때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렸다고 한다. 제천의식의 쇠퇴와 그 이유
후에 제천의식은 농경생활에 종사하는 백성들에 의해 하나님께 흉년이 들지 않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다소 변질되었다. 그래서 제천의식은 파종기인 5월(기원제)과 추수기인 10월(감사제)에 집중으로 행해져 왔다. 그러나 이조시대에 들어와서 이품(二品) 이상의 제관(祭官)을 파견하여 국가적인 차원으로 행했던 제천의식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연산군 때에는 마니산 ‘참성단’ 의 제천의식을 중지해달라는 유자(儒者)층의 상소 때문에 하늘을 섬기는 의식이 중단되었다(김오윤 / 한민족은 천손민족이다).
여기서 제천의식의 쇠퇴이유 중 하나로써 불교의 유입기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D 67년 후한(後漢)의 명제(明帝)가 불교를 받아들이고 난 뒤, 고구려는 305년 뒤인 A.D 372년에 불교를 공인했다. 또 신라는 고구려 공인 이후 155년 뒤인, A.D 527년에 불교를 공인했다. 그로부터 5년 후에 신라는 가야를 멸망시켰다. 이렇게 불교가 공인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렸던 것은 우리 선조들의 전통 신앙이 불교와는 크게 달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예일 것이다(창조사학회 / 한민족의 기원 대탐사). 이에 대해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항상 하늘을 공경하여 제사를 드렸는데도, 자손들이 교만해져 차차 이것을 폐지하고, 유교와 불교를 함께 일삼아 드디어는 나라가 시들어졌다.’ 한민족의 유일신앙
이렇게 하늘을 경배하는 신앙은 수메르와 이집트, 미국 내 인디언과 남미의 잉카, 아즈텍, 마야, 고조선, 흉노와 이후에 나타난 거란, 몽고족 등 알타이 기마민족들의 유일신앙이었다. 알타이는 몽고어로 금(金)을 뜻하는 것으로, 태양, 빛, 하늘을 공경한다는 의미이다(한정호/ 한민족 그는 누구인가). 이 알타이 신앙이 바로 우리 한민족까지 이어져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에 보면 타타르인(당시 서양인들이 몽고족을 가리키는 말)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일신(一神: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매일 이에 분향하며 예배한다.’ 슈메르(한민족)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제사문화 이러한 제천의식을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경은 산에 돌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로부터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아라랏산 에서 여호와를 위해 단(壇)을 쌓고 정결한 짐승을 취해 번제로 감사의 제사를 드린 노아(창 4:2-5, 8:20-21). 아브라함과 야곱 역시 가는 곳곳마다 돌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창 12:6-9, 창 22:2, 28:8, 31:3, 35:14-16).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싸우기 위해 제단을 쌓았던 곳도 갈멜산 꼭대기였다(왕상 18:20). 예수 역시도 늘 산에 올라 하나님께 기도의 제단을 쌓았으며(눅 6:12, 9:28), 예루살렘 역시도 산 꼭대기에 건설된 성이었다. 이러한 제사 전통은 그 장남인 셈의 가문에 계승되어 제사권을 맡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절기 때마다 높은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주관해야 했다. 이러한 제사를 위해 돌로 제단이 만들어졌고, 그 돌 또는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다(창 49:24, 삼하 22:2, 고전 10:4). 이렇게 절기 때마다 높은 산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드린 이스라엘 민족의 제천의식은 슈메르로 이어진 한민족의 제천의식과 그 제단 문화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니겠는가? 제천의식의 돌제단과 신전
한민족을 포함한 알타이계 민족의 유일신앙, 곧 제천의식이 진행된 곳은 대부분 높은 산이었다. 한반도의 어디를 가더라도 성스러운 산이 있어 그 곳에서 제사를 드려왔다. 이 성스러운 산의 표상이 바로 돌이었다. 최남선은 동이족의 동방문화의 특징으로 ‘돌(石)을 산악의 표상이라 하고 이를 통해 태양과 천(天)을 숭배했다’ 고 말한다. 곧 바위에 대한 우리 조상의 믿음은 미신(迷信)이 아니었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문화’ 의 저자 노승대 씨에 의하면 ‘바위가 산의 표상이기에 훌륭한 바위를 만나 그 곳에서 기도드리는 것이 천상세계의 주인이자 조상인 하나님께 기도드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는 것이다. 제천의식에서 사용되는 돌 제단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돌로 만들어진 제단의 의미가 확대된 신전 등이 세워졌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메소포타미아의 피라미드로 알려진 수메르 우르의 지구라트(성탑:聖塔),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의 마추픽추 유적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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