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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국의 이이제이/북의 자유해방정신/사이비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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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9 윤*현 조회수 276


 

 

 

8.15이후 남과 북은 태극기 아래 하나였다

 

 

 

김일성일당은 한민족의 태극기를 포기하였다

 

 

 

 

개성공단 노동자 임금 갈취한 김정은 일당에 대해 노동자.민생 운운하는 진보세력은 답하라!



김정은일당 대변하며 노동자와 민생을 운운한다면 너희는 김정은 노예집단에 불과하다!

 

노동자 임금 갈취는 남과 북 어디든 노동자들의 적이기 때문이다! 그 수장이 김정은이다!







이이제이 -지나국의 주변 한민족 장악 지배 정책



최근 사드배치와 관련하여 대한민국을 종속국가 취급하는 지나국의 발언행위는 오랑캐 취급하는 의식의 반영이다.


지나국 입장에서 오랑캐(한민족)로 오랑캐(한민족)를 친다는 뜻으로, 어떤 적을 이용하여 다른 적을 제어함을 이르는 말.

 

고대부터 지나국은 이이제이의 방법을 써서 적국 간에 싸움을 붙이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 이익을 얻게 된다는 지배정책


현재 지나국도 마찬가지다. 남과 북을 생각한척하면서 지나국의 이익에 이용하면서 장악 지배하겠다는 한민족 정책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지나국은 군사방패막이로 김정은일당을 이용하여 한민족이 고토인 만주진입을 차단하면서

한반도를 영구 분단시켜 지배하겠다는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에 통일을 원하지 않으며, 주한미군철수가 목적이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 통일과 고토 만주 회복을 위해서는 끝까지 함께 가야 할 한민족의 혈맹이 되야 하는 이유이고,

지나국의 제후노릇하며 군사방패막이하는 김정은일당을 제거한 후에 남과 북의 한민족이 통일하고 합심해야 한다!



         북 인민의 반공 자유해방 정신인 신의주 학생항쟁 의거



1945년 11월 23일 함석헌 등이 주도하여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학생들이 소련군과 조선공산당에 반대해서 일어난 사건.



신의주학생의거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1945년 11월 18일 신의주 서쪽 약 20㎞ 지점의 용암포 제일교회에서 열린 시민위원회 주관의 '인민위원회 지지대회'에서 연단 위에 오른 학생자치대 대표가 소련군과 조선공산당의 실정과 횡포를 비난하는 한편, 조선공산당이 정치훈련소로 사용하는 수산학교의 반환을 요구하자, 군중이 이에 호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날 대회 참석자들간에 격투가 벌어져 사망자 1명과 부상자 12명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신의주 학생자치대 대표들은 시위를 계획하고, 11월 23일 정오와 오후 2시에, 신의주에 있는 6개 남녀중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평안북도 인민위원회·보안부·당위원회를 향한 시위를 벌였다. 이에 보안대와 소련군은 무력으로 대응하여 사망 23명, 부상 700여 명 외에 1,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당시 용암포시 인민위원장인 이용흡을 위시한 일부 공산주의자들의 오만과 횡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소련군의 북한진주

 

1945년 해방과 함께 소련의 붉은 군대가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북한 땅에 발을 들여 놓는다.
일제에 저항한 경력으로 북한지역에서 명성이 높았던 함석헌은 평안북도 문교부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그가 생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함석헌(48) / 당시 평안북도 문교부장

 

1945년 11월 공산당의 정책에 반기를 든 학생시위대와 소련군의 유혈충돌이 발생한다.
이른바 신의주 학생의거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 배후 조종자로 몰린

함석헌은 소련군 사령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는다.

우여곡절끝에 석방된 함석헌은 1947년 2월 노모와 가족들을 북에 남겨둔채 월남한다. 

*수평선을 넘어

 

그는 '대선언'이란 시를 통해 한국교회를 위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이렇게 선언한다.

 

네 기독교인 이단자가 되리라.
산에야 어디 땅끝이 있으리오.
그 곳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친 헛깨비일 뿐이리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삶은 그것보다 더 위대하다.
삶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 

 

당시 함선헌이 발표한 시<수평선을 넘어>중에서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가 민족주의자 유영모와 함석헌의 자유혼이라 할 것이다!

 

 

[자료]씨알의 소리 -함석헌

 

함석헌의 생애와 글을 담은 스무권의 전집은 그의사상적 깊이를 잘 보여 준다.
그의 글은 책상 위에서 단순히 쓰여진 것이 아니라.불의의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았던

시대적 체험과 폭넓은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것들이었다.

 

<김언호>


함석헌선생님은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정신이죠.
또 우리아름다운 말.말을 그 속에 안고 있죠.
그래서 함선생님의 전집을 이제 스무권을 내고 또 선집을 내고

또 함선생님에 관한 논문집을 한 서너권 냈는데...

이제 그런 일들을 한것이 우선은 뭐 저희 책만드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보람된 일이고...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함석헌은 청년시절 일제가 세운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의사로서의 꿈을 키운다.
그러던 1919년 함석헌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19살에 겪은 3.1운동은 그의 사회참여의식에 눈뜨게 된 첫번째 사건이었다.
함석헌은 훗날 자서전에서 3.1운동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기록한다.

 

 

<함석헌 어록>만일 3.1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입학할 때의 생각그대로 아예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의학을 했을 것이고 의사가 됐다면 나도 지금쯤은 큼직한
병원이나 경영했을지 모르오.
잘하면 나도 누구들처럼 국회의원에 출마도 했을지 모르고...

 

 

 

3.1운동에 참가한 후 평양고보복학을 포기한

함석헌은 민족주의운동에 지성소로 알려진 오산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함석헌은 다석 유영모 (1890 ~ 1981)를 만나 기독교정신에 비탕을 둔 동양사상을 배우게 된다.

졸업 후 일본에 잠시 유학을 갔던 함석헌은 9년뒤 모교인 오산학교의 역사교사로 부임한다.

 


일찍이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은 더욱 심해져 모든 학교에서 조선말의 사용과 역사요육이 금지된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속에서도 우리말로 된 역사수업을 계속해 나가던 함석헌은 결국 오산학교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후 함석헌은 식민지조선의 역사교사로서 새로운 역사관을 찾아 나선다.
1933년 함석헌은 계간지 성서조선에 성서적입장에서본 조선의 역사를 기고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식민사관과 극단적인 민족사관을 뛰어 넘는 역사인식의 출발이었다.
그는 조선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보고

참담한 역사를 경험한 민족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영신>
그 고난사관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시각이요 그 고난은 바로 하나님이

이 민족을 고난을 통해서 연단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거다.
그분이 그 분의 모든 그...글을 읽어 보면요.
가장 밑뿌리에는 그 역사적인 사회가 있습니다.
항상 역사관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그러길래 다른 그...실학자들과 어...

혹은 그...종교공부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그런점이 있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역사가로서 항상 봅니다.

 

 



 


그러나 해방후에 남한사회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소련군정의 지원하에 북한에 김일성정권이 들어 서자, 1948년 8월 15일에

총선거로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유일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중심이 된

항일인사들을 대한민국 정부의 내각으로 구성하면서

종북극좌세력 토벌에 적극 나서게 된다.


월남 후 서울에서 스승 유영모와 재회한 함석헌.
유영모로부터 씨알이란 용어를 받아들인

그는 그 때부터 씨알사상을 개념화하고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씨알의 '씨'는 낱개로서의 씨앗을 '알'은 그 속에 담긴 알맹이를 의미한다.
씨알사상은 오천년 민족사를 일으킨 불꽃같은 것이

씨앗인 각자의 민중속에 알맹이처럼 들어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역사또한 '민중'

즉, 씨알들의 내부에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재순 한신대 신학과 교수>


전통적인 유교에서는 씨알이나 백성이나 국민을 어리석고

어린 못난사람으로 보통 소인으로 이렇게 얘길하지 않습니까?
어리석고 어린 존재로 이렇게 보는데... 그 유영모 선생님은 정반대로

어버이처럼 어른으로 씨알을 풀이했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놀라운 것이고

그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함석헌 선생님께서는

민의를 가르키는 말로 '씨알'이란 말을 이렇게 사용하게 됐죠.

 

 

<김경재 한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국가를 위해서 시민이나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민 더 나아 가서

함선생님은 하나하나의 생명체인 씨알들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고

그들을 위해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순서를 뒤바꿔 놔서

진정한 의미로서 이제 우리 한국사회에 근대 시민정신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신 분이다.
그렇게 봅니다.

 

이로서 씨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함석헌
그는 초교파단체인 YMCA를 중심으로

각 학교와 단체들에서 성서강문을 하며 씨알사상을 전파해 나간다.


그리고 같은 민족이면서도 반으로 나뉘어 서로의 이념과 입장만을 내세우는

남북한 분단정권의 실상을 바라 보며 한국전쟁을 예언하는 듯한 말을 남긴다.

 

<김용준>

지금도 그 생생하게 기억을 하는데, 왜들 이러지

...살짝 지글지글 타오르고 있는 이 화산이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위에 살짝 덮힌 그 위에서 이제 언제 폭발할 줄 알고

이렇게 야단들이지... 이 야단들이냐 그러구 이제 그...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이제 그러구 나서 6.25가 터지지 않습니까?
 

 

 

3년동안 계속된 남북한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된다.

무려 600여만명의 사상자를 낸 이 전쟁에 큰 충격을 받은

함석헌은 반전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키워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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