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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에서 황제가 된 주원장에 비하면 김일성은 조족지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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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3 윤*현 조회수 483 | ||||||
소련이 가짜 김일성으로 내세워 왕으로 만들어준 김일성세습독재왕조보다는 노비라는 신분적 한계를 벗고자 지나대륙으로 건너가 걸식하며 스스로 세력을 만들어 부패한 원나라를 초원으로 몰아 내고, 명나라를 세워 황제가 된 주원장의 자수성가가 수만배의 가치가 있는 위대한 역사다. 농민과 함께 부패한 원나라 권력집단을 무너 뜨리고 황제가 된 거지출신의 주원장이야말로 진정한 민중의 황제라 할 수 있다. 황제가 된 명 태조 ‘주원장’에게는 눈앞의 승리보다 기강과 공동체 질서를 확립하는 원칙과 가치가 가장 중요했다. 헌법과 법률 준수라는 원칙과 자유 민주 시장 복지 공존이라는 가치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원칙과 가치가 되야 한다. 거부하고 위반하는 자들은 종북숙주세력과 함께 반국가 이적세력이다. 주원장은 그러한 원칙과 가치를 거부하고 위반하는 자들을 친인척을 포함하여 3만여명을 처형하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원칙과 가치가 무너질 때 부패와 백성수탈과 함께 나라가 망하기 때문이다. 전남 해남출신의 고려 청주 한씨 가문의 노비로, 주원장의 아버지가 천자가 나온다는 명당에다 선조들의 무덤을 이장하고 지나대륙으로 건너가 낳은 아들 주원장이 홍건족의 수장이 되어 원나라를 무너 뜨리고 명나라를 세웠다는 주원장은 대명통지에서 자신 선조의 나라는 조선이라고 했다고 한다.
청주 한씨 족보에도 명나라 2대 황제 영락제의 어머니가 주원장의 왕후가 되는 청주 한씨로 기록되어 있다. 황제가 된 후에 3만에 달하는 신하들을 숙청했다는데, 이는 아마도 출신이 불분명한 주원장에 대해 반항하는 한족들이 아닌가 싶다. 조선에 많은 환관들을 보내 달라고 요구한 이유도 측근들을 조선인들로 채우고자 했던것 아닌가 싶다.
황제가 된 명 태조 ‘주원장’ 눈앞의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원칙과 가치
[보도자료]주원장은 흥미로운 인간이다. 그는 따뜻한 인간애와 합리적인 인재경영으로 황제에 오르자 피의 숙청을 단행한다.
공신, 참모, 사돈에 이어 심지어는 하나밖에 없는 조카마저 죽였다. 오로지 왕조의 번영과 강한 왕권을 위해서다. 이렇게 다중인격 같은 리더십을 동시에 보여준 예는 쉽게 찾기 어렵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게 두 가지 점에서 찬사를 보낸다. 가장 비천한 출신에서 창업에 성공한 점, 그리고 리더에게 요구되는 단호함에서 그는 100점짜리 군주였다. 칭기스칸의 후예가 세운 원나라. 200만 명의 몽골족으로 중원은 물론 멀리 유럽까지 지배했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조였다. 하지만 몇십 년이 흐른 후 원은 왕위 계승권을 놓고 왕자들 간의 싸움으로 분열됐다. 골육상쟁의 피 튀기는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왕권과 몽골의 지배력은 그 힘을 잃어갔다. 그때 세계를 죽음으로 뒤덮은 흑사병이 창궐한다. 전 세계 인구 중 약 20%가 목숨을 잃었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오는 법.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 가뭄과 기근이 닥쳤다. 마을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죽음은 일상이 되었다. 중국 북부 지역에서만 무려 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배가 고파 탁발승 됐다가 홍건적에 가담 1328년, 안후이성 봉양현. 주세진과 부인 진 씨 사이에서 네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원장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흑사병으로 죽고, 맏형과 셋째 형수 그리고 둘째 형의 아이들과 어머니마저 죽고 말았다. 곧이어 누이와 조카들도 죽었다. 외가도 친가 식구도 모두 흑사병으로 죽었다. 주원장은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어린 주원장은 부친의 주검조차 묻을 땅을 구할 수 없었다. 마을의 유지인 유 씨 집을 찾아 하소연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웃이 밭 구석에 겨우 땅을 내주었다. 어린 주원장은 낡은 옷으로 부모의 시신을 두르고 땅에 묻었다. 훗날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어 아버지는 순황제, 어머니는 순황후로 추존하고 황릉을 만들어 부모를 모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고 한다. 졸지에 고아가 된 주원장은 먹고 살기 위해 중이 된다. 그는 황각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하지만 부처님도 배고픔을 구제할 수 없는 노릇. 그는 탁발승이 되어 이곳저곳을 떠돈다. 백성들은 살기 위해 저마다 칼과 몽둥이를 들고 도적이 되었다. 세상이 흉흉해지면 극성을 부리는 것이 내세를 강조하는 종교다. 백련교가 일어났다. ‘장차 미륵불이 나와 이상향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주장을 내건 백련교는 세를 확장했다. 이들은 머리에 붉은색 띠를 두르고 세력화 되어갔다. 그들이 바로 홍건족이다. 홍건족은 도적떼를 넘어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지도자는 한림아였다. 그는 자신의 밑에 대장들을 거느리고 전국을 휩쓸며 중국의 미래 권력으로 부상했다. 홍건족의 2인자인 곽자흥은 무력을 장악한, 사실상 최고 권력자였다. 무리를 지어 탁발을 가장한 도적질을 일삼던 주원장은 홍건족 곽자흥 군대에 입대한다. 주원장은 비록 글자도 깨우치지 못했고 책 한 권 변변히 읽지 못했지만 머리는 비상했고 판단력 또한 대단히 빨랐다. 그가 탁발을 하며 주린 배를 채울 때의 일이다. 어린 주원장은 또래들과 함께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일을 해주고 밥을 얻어먹었다. 한 번은 무리들과 더불어 부유한 한 농가에서 어린 송아지를 돌보는 일을 했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이들은 그만 송아지를 잡아먹고 말았다. 먹을 때는 배고픔을 해결하느라 몰랐지만 다 먹고 나니 겁이 덜컥 났다. ‘도망가자, 어떻게 하느냐’ 등등 의견이 분분할 때 주원장이 나섰다. 그는 송아지 가죽과 뼈를 추려내어 땅 속에 파묻고 소꼬리를 하늘로 향하게 하여 땅에 반쯤 묻었다. 그리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주원장은 송아지 한 마리의 행방을 묻는 농가 주인에게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송아지가 갑자기 땅 속에 박혔습니다. 아무리 빼내려고 꼬리를 잡아 당겨도 나오지 않으니 어떡하면 좋습니까?” 물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주원장은 농가 주인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하지만 이 호기로운 행동으로 인해 주원장은 패거리의 두목이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리더십과 추진력 그리고 처세술이 능란한, 타고난 대장이었다. ▶무력을 갖추고 사대부의 학식을 영입하다 주원장은 홍건적 무리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리더십은 빛을 발했고 용병술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곽자흥은 주원장을 신임하기 시작했다. 1351년 곽자흥의 부하가 된 주원장은 호주 공격에서 큰 공을 세워 불과 일 년 만에 곽자흥의 참모가 된다. 그리고 그는 독립된 부대를 이끌고 남경과 장강 일대를 토벌함으로써 곽자흥 부대의 2인자로 자리 잡았다. 이때 주원장의 나이는 불과 23세였다. 곽자흥은 주원장을 신임하면서도 부담이 되었다. 주원장의 기질과 그릇이 보통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주원장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곽자흥에게는 곽처신이라는 아들이 있다. 하지만 이 아들은 그릇이 아비의 반도 되지 못하는 용렬한 인간이었다. 그는 주원장을 질시했다. 온갖 모함을 했지만 곽자흥은 마지막 순간에 항상 주원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주원장은 고민했다. 1인자의 마음을 들여다 본 그는 좀더 1인자의 신임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결정했다. 그의 아들이 되기로 한 것이다. 곽자흥과 아주 친한 마 씨 집이 있었다. 이 집의 딸이 곽자흥의 양딸로, 사실은 곽처신이 아내감으로 점찍은 처녀였다. 주원장은 마 씨의 사위가 되기로 결심하고 적극적인 구애 끝에 마 씨 처녀를 아내로 얻었다. 자연스럽게 곽자흥의 양아들이 된 것이다. 마 씨는 현명한 처자였다. 주원장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를 도왔다. 한번은 곽자흥이 주원장을 광에 가두고 굶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칫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마 씨는 몰래 광의 밑바닥을 파 그 통로로 주원장에게 물과 먹을 것을 주어 목숨을 구했다. 그러던 어느날 곽자흥이 병에 걸렸다. 그는 주원장에게 자신의 일을 맡겼다. 주원장은 부대를 이끌고 저주를 함락시킨다. 그는 중국 남쪽을 공격할 때마다 남부의 융성한 문화와 학문을 접하며 자극받았고, 신분, 귀천, 과거를 묻지 않고 많은 학자들을 영입했다. 훗날 이들은 장차 명나라 개국의 절대적인 공신들이 된다. 주원장의 활약이 점점 커지고 있는 가운데 곽자흥은 여전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군대는 분열되었다.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주원장의 군대는 2만 명에 육박했다. 그는 남경을 점령하고 스스로 오국공이라 칭하며 명나라 건국의 초석을 마련한다. 1355년, 곽자흥이 죽었다. 주원장은 그의 세력을 빠르게 흡수해 홍건족의 일개 대장을 넘어 원나라와 대적하는 반군의 지도자가 된다. 당시 중원은 북경 근처의 원나라 세력과 홍건족을 기반으로 한 주원장, 군벌 진우량과 장사성이 이끌던 세력으로 사분되었다. 주원장은 중국의 중심 장강으로 진출한다. 동부와 남부의 여러 성을 점령하면서 그는 이른바 사대부 세력과 만나게 된다. 주원장은 그들을 우대했다. 사대부계급 출신 학자들을 참모로 등용하고 이들을 스승으로 모시며 전쟁터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 한어를 배우고 중국사와 유교의 경전까지 공부했다. 그러면서 성리학에 대한 기본적인 토대를 깨우친 주원장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에 명분을 부여했다. 그것은 ‘한족부흥 漢族復興’이었다. 즉 북방 오랑캐인 몽골족의 원을 몰아내고 원래 주인인 한족이 중원을 되찾자는 것이다. 중원의 학자 및 남부의 부유한 상인들이 주원장을 지지했다. 주원장은 이때 통치의 원리를 학습하고 많은 독서를 통해 성리학의 심오한 내용까지 흡수했다. 이 시기에 명의 3대 개국 공신인 이선장, 서달, 유기가 주원장의 휘하에 포진하면서 주원장은 그야말로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달았다.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관리는 필요 없다 1356년 주원장은 남경을 손에 넣었다. 이는 양자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 및 군량미를 확보, 중국을 오가는 모든 수송 물자의 통로를 장악한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한껏 기세가 올랐지만 그렇다고 넘치지도 않았다. 스스로 무공이라 칭했지만 왕의 자리에는 오르지 않았다. 홍건적 본류 세력의 상징적인 존재인 한림아를 황제로 모시고 자신은 승상이 되었다. 껍데기뿐인 왕의 자리보다는 실리를 챙긴 것이다. 그는 군대에게 약탈을 삼가고 백성의 고충을 해결하는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백성들을 모아 개간할 땅을 주고 농업을 장려한다. 이렇게 그는 천천히 천하의 민심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1356년 주원장의 라이벌인 진우량은 스스로를 한왕이라 칭하고, 장사성은 오왕이 되어 연합세력을 구축했다. 이들은 주원장을 제거하기로 합의한다. 1363년 장사성과 진우량은 양쪽에서 주원장을 공격했다. 주원장은 20만 대군을 총동원해 명운을 건 일전을 벌였다. 진우량 역시 6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들은 화양호에서 마주쳤다. 누가 보아도 진우량의 우세였다. 군대의 수나, 해군의 규모에서 주원장은 이들과 대적하기에 부족했다. 하지만 주원장의 군대에는 탁월한 장수 ‘서달’이 있었고 또한 용병술의 대가 ‘유기’ 그리고 행정의 달인 ‘이선장’이 있었다(훗날 명나라 3대 개국 공신). 서달은 맹장이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용맹하게 군대를 이끌었고 후방은 이선장이 맡아 서달 군대의 병참을 빈틈없이 관리했다. 그리고 유기는 용병술의 대가였다. 그는 스스로를 천하의 기재 제갈공명과 비교하면서 “나의 재주는 공명보다 낫다. 공명은 천하를 삼분했지만 나는 분할된 천하를 하나로 모을 것이다”라고 호탕하게 외쳤던 기재이다. 이들의 신출귀몰한 전략과 충성스런 전투력은 주원장의 리더십과 만나 시너지 효과를 냈다. 진우량은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해 죽고 만다. 주원장은 이 여세를 몰아 진우량의 근거지인 우창을 함락한다. 이때도 선봉은 서달이고 계책은 유기가 냈다. 자신감이 붙은 주원장은 드디어 왕이 된다. 1364년 장사성을 공격해 승리를 이끌고 ‘멸몽흥한 滅蒙興漢’의 기치를 높이 들며 명왕이 된다. 1367년 장사성은 마지막 전투에서 주원장에게 패하면서 자결하고 주원장이 황제로 모시던 한림아는 배를 타고 가다 익사하고 만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익사 사건을 용도가 다한 한림아를 주원장이 폐기한 것, 즉 암살이라고 적고 있다. 1368년 주원장은 남경에서 국호를 ‘명’이라 짓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때가 40세 때이다. 그는 ‘호풍 胡風’을 없애고 당송의 정통을 잇는 왕조의 복귀를 선언한다. 그리고 전통적인 중국의 예법을 다시 살리고 유생 계급도 복권시키며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다. 천애의 고아가 탁발승이 되어 세상을 떠돌다 도적의 무리에 가담하고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다가 드디어 황제가 된 것이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비천한 신분 출신의 황제였다. 주원장은 우수한 학자를 영입했다. 많은 학교를 세우고 인재는 과거 제도를 거치지 않고 특채를 하는 등 문신 세력을 우대했다. 그리고 그는 재상을 거치지 않고 육부를 통해 직접 통치했다. 지방에는 공신들 대신 왕자들을 보내 제후로서 황제를 대신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군권은 그 누구에게도 권한을 주지 않고 오로지 황제만의 군대로 만들었다. 이때 그 유명한 <대명률>을 만들어 실제 행정에 적용했다. 사실 <대명률>은 법전과 행정의 규약집이지만 법보다 유교적인 색채가 강했다. 그래서 법의 실제 적용에는 조금 여유가 있는 관용의 법이었다. 이 <대명률>은 명나라 이외에 조선 땅에서도 500년 동안 그 효력을 발휘했다. 건국 후 주원장이 가장 공을 들였던 부분은 백성에 대한 행정의 월권과 부패였다. 그 스스로 가장 비천한 출신이었기에 관리들의 부패와 권력이 어떻게 백성들의 일상에 적용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황족 특히 외척과 환관의 정치 참여나 권력행사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기미만 보여도 엄하게 다스렸다. ▶3대 공신 및 3만 명을 숙청한 피의 리더십 주원장은 통치술과 용인술에 비범한 황제였다. 그런데 그 밑바탕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최고 권력자의 고독함이 숨어있었다. 본디 의심 많은 그의 성격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자 그는 공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명나라 3대 개국 공신들이다. 이선장은 관리로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주원장을 보좌했다. 그는 회서인맥의 좌장으로 충심으로 주원장을 섬겼다. 그는 청렴했고 권력에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은퇴 후 자신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의 후계자가 문제였다. 1380년 이선장 세력의 후계자인 좌승상 호유용이 주원장의 덫에 걸린 것이다. 주원장은 호유용을 시험했다. 황제 대신 잠시 권력을 대리하라 명하고 자신은 지방의 별궁으로 간 것이다. 호유용은 방심했다. 마치 황제처럼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인사권도, 행정권도 마구 썼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넘보지도 건드리지도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장군들을 불러 특별 하사금을 내린 것이다. 황제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감히 권력의 중추세력인 군대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던 주원장은 그 순간 호유용을 역모로 몰아 잡아들였다. 그와 연루된 1만5000명이 모두 한순간에 처형당했다. 이때 이선장에게도 화가 미쳤다. 하지만 주원장은 이선장이 공이 많고 그가 은퇴했다는 이유로 이선장을 보호했다. 하지만 몇 년 뒤 호유용의 잔당 제2차 숙청에서 이선장의 후손들이 걸려들면서 결국 이선장도 주원장의 숙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직의 장은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부하의 존재를 항상 의식한다. 능력과 리더십을 갖추고 있는 부하는 조직의 장에게 복이면서 목에 가시 같은 존재이다. 리더는 항상 그를 시험한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어떻게 자신을 대신하는 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그것은 리더의 개인적인 병이나 유약한 의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보완재가 아닌 대체재가 있다는 것은 어떤 조직에서도 조직의 장에게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이럴 경우 방법은 두 가지이다. 리더가 스스로 자신의 대체재를 완벽하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과 다른 한 가지는 그 대체재를 제거하는 것이다. 주원장은 후자를 선택했고 호유용은 어리석게도 그런 주원장의 의도를 파악치 못한 것이다.” 그 다음은 서달이었다. 서달은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공신이다. 진우량의 군대를 격파하고 몽골족을 만리장성 북쪽으로 쫓아내는데 공을 세운 심복이었다. 또한 주원장이 태자 다음으로 아끼던 넷째 아들 연왕 주체의 장인으로 주원장과는 사돈이었다. 하지만 주원장의 피의 숙청에선 서달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거를 결심하고 때를 보고 있던 차에 서달이 온 몸에 난 종기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이때 주원장은 서달에게 거위를 푹 달여서 먹으라고 보낸다. 서달은 생각했다. 본래 종기에 거위는 상극이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주원장이 거위를 보낸 것은 자신에게 자결을 명령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서달은 거위를 삶아 그 물을 마시기 전 세상을 한탄하고 통곡을 한 후에 자결했다고 한다. 제갈공명과 비견되는 유기 역시 마찬가지다. 건국 후 은퇴해 지방에 있었던 그는 주원장보다 승상 호유용의 질시의 대상이었다. 호유용은 “유기의 덕과 재주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가깝게 두고 감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소문에 유기가 후손이 왕이 될 묘 자리에 조상을 모셨다고 합니다”라고 주원장을 꾀었다. 주원장은 유기를 남경으로 불러 4년 동안 감시했다. 유기는 기가 막혔지만 주원장의 성격을 아는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병이 들자 유기는 고향으로 갈 것을 청했고 유기를 불쌍하게 여긴 주원장은 그가 고향으로 가도록 허락했다. 유기는 병약한 몸을 끌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그만 죽고 말았다. 유기와 쌍벽을 이루던 학자 송렴은 원나라의 미인계에 넘어가 국가 기밀을 넘겼다는 죄목과 함께 아들 송신이 죄를 지었다는 누명을 쓰고 전국을 떠돌다 병으로 죽었다. 그야말로 공포정치의 시대인 것이다. ▶아무도 믿지 마라, 오직 너 자신만 믿어라 학살에 가까운 숙청과 공포 정치는 맏아들인 태자가 나이 40세에 요절하고 그 뒤를 이를 둘째 진왕도 죽고 무엇보다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마황후가 죽으면서 더욱 심해졌다. 마황후 외에 총 26명의 후궁으로 두고 24명의 왕자를 두었던 주원장은 그 누구보다 마황후와 마황후 소생의 왕자들을 아꼈다. 마황후가 죽고 황후 자리가 비어있자 대신들이 새 황후간택을 권했지만 주원장은 끝내 황후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두었다. 마황후 소생의 첫째와 둘째 왕자가 죽자 주원장은 후계자로 넷째 연왕을 염두에 두었다. 연왕은 보통의 야심가가 아니었다. 또한 그는 북경을 영지로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으며 백성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하지만 대신들은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대신들은 강력한 군주가 될 소질이 있는 연왕보다 태자의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추천한 것이다. 또한 명나라의 국시인 성리학적 관점에서도 장자승계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명분에서 밀린 주원장도 자신의 고집만을 부릴 수가 없었다. 태자에 대한 연민도 겹쳐 그는 어린 손자를 태손으로 삼아 자신의 후계로 정했다. 그리고 ‘어린 황제가 나이 많고 노련한 대신들에게 좌지우지 되면 큰일이다’라고 생각, 황제의 경쟁자나 될 만한 공신, 황제를 이용할 만한 위치의 근친, 세력을 형성한 대신들을 모두 숙청했다. 그의 강박관념은 더욱 심해지고 심지어 악몽을 꾸기도 했다. 하루는 숙청을 보다 못한 태손(후에 2대 황제인 건문제)이 주원장에게 물었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주원장은 아무 말 없이 태손에게 장미나무 가지를 던지고 쥐어보라 하였다. 가시가 많은 장미나무 가지를 손에 쥐던 태손은 그만 가시에 찔리고 말았다. 내시들에게 가시를 제거하라 명한 주원장은 가시를 없앤 장미나무 가지를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처럼 가시를 제거하고 너에게 편하게 권력을 물려주고자 이렇게 피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훗날 건문제에게 독이 되고 만다. 주원장은 말년을 쓸쓸하게 보내다 1398년 눈을 감는다. 그때 나이 70세였다. 주원장은 죽으면서 유언을 한다. 어린 조카를 해하지 못하도록, 자신이 죽더라도 영지에 나가 있는 왕자들은 남경에 오지못하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처럼 후계문제에 몰두했다. 하지만 주원장이 죽고 얼마 후 넷째 아들 연왕은 반란을 일으켜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가 3대 황제 영락제이다. 그는 수도도 남경에서 자신의 영지인 북경으로 옮긴다. 그토록 주원장이 염려했던 일이 자신의 아들 손에서 일어난 것이다. ▶적군과 산오리 한 마리도 소중히 여기던 관용 리더십 주원장은 두 개의 삶을 살았다. 황제가 되기 전과 후의 그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냈다. 황제가 되기 전 주원장은 덕과 포용의 리더십을 펼쳤다. 주원장이 진우량, 장사성 군대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격전을 벌일 때 일이다. 소주성을 점령한 그의 눈에 적군의 한 병사가 들어왔다. 그 병사는 허름한 흙더미 앞에서 울고 있었다. 주원장이 연유를 묻자 “어머니가 굶어서 개처럼 죽어 여기에 묻혀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비록 적군이지만 효심을 높이 산 주원장은 부하들에게 “저 병사와 무덤을 훼손치 말라”라며 엄명을 내렸다. 자신도 부모의 시신을 황망하게 처리한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이 많은 리더였다. 장사성의 군대를 포위하기 위해 적의 후방으로 침투할 때였다. 행군을 하는데 좁은 계곡에 산오리 한 마리가 알을 품고 있었다. 행렬을 멈춘 주원장은 ‘새끼를 품은 짐승을 해치면 업보를 받는다’는 동자승 시절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군대는 오리가 부화해 어미와 같이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렸다. 장사성의 군대가 이를 눈치 채 오히려 주원장이 위기에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적군의 주력부대들이 투항해 왔다. 이들은 주원장을 ‘천하패권의 전쟁에서 한낱 오리의 생명을 위해 작전을 포기하는 인간적인 장수’로 여기며 ‘나의 장래를 맡길 만하다’고 주원장의 덕을 높이 산 것이다. 주원장은 이처럼 한 번 세운 원칙과 신념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반듯한 리더였다. 또한 그는 자신과 어긋나거나 반대되는 모든 사람과 의견을 통합하여 균형을 맞추는 현명함도 갖추고 있었다. 자기관리의 달인이었던 그는 유능한 인재를 영입해 적재적소에서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 지휘자였다. 그의 군대가 열세를 딛고 중원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주원장의 탁월한 인재경영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런 그가 황제가 된 후 변하게 된 것은 어쩌면 1인자의 숙명인지 모른다. 그는 금의위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모든 신하와 왕족을 감시했다. 어느 날, 한 대신이 집에서 몇몇 사람을 초대해 술을 먹었다. 그 다음날 주원장을 그 대신을 불러 물었다. “어제 누구와 무슨 술을 먹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대신은 빠짐없이 보고를 했다. 그러자 주원장은 “그대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구나”라고 보냈다고 한다. 주원장은 생전에 모든 보고서에서 ‘생 生 칙 則’이란 글자를 쓰지 못하게 했다. 실수로라도 이 글자가 보이면 당장 처형할 정도였다. ‘생’은 그가 탁발을 했을 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승 僧’과, ‘칙’은 홍건적 출신의 도적이라는 과거가 거론되는 ‘적 賊’과 음이 같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콤플렉스가 많았던 황제가 다스리던 감시와 공포의 시대였다. 리더 혹은 1인자는 본래 의심하는 자리이다. 그들은 조직관리에서 공식적인 보고 라인과 비선의 보고 라인을 동시에 운영한다. 그 두 보고의 비교를 통해 조직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조직에 알리기도 한다. 직장에서도 의심 많은 상사를 만나면 조직원들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업무는 물론 행동과 말 하나까지 항상 의도와 복선을 생각해야 하니 그런 분위기에서 무슨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의심하는 상사와 밀접해지는 방법은 ‘묵묵히 일만 한다’가 정답이 아니다. 일보다 더 필요한 것은 ‘상사와의 정서적인 교감’이다. 공적인 관계뿐 아니라 사적인 부딪힘에서도 상사가 “저 친구는 나의 입장에서 이 프로젝트를 본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원장처럼 어쩔 수 없이 피의 숙청을 단행하는 조직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사는 항상 주원장처럼 의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주 작은 일일수록 상사와의 어색한 관계와 상황은 반드시 풀고 가야 한다. 직원들끼리 이야기를 하다 상사가 들어서는 순간 말을 멈추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물론 상사의 ‘뒷담화’를 한 것은 아니지만 상사는 그 순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합리화에 강한 것이다. 그리고 기억한다. 그 상황과 그 당시 인물들을. 이런 일이 반복되면 상사는 자신의 의심을 당연시하고 다음 인사에서 속 좁은 자신의 권한을 행사한다. 물론 명분은 100% 당신의 업무능력부족이 이유라 말하겠지만 속내는 따로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것이 조직생활이고 권력과의 동거다. 매순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단 한 가지이다. ‘그는 날 항상 의심한다’는 사실과 ‘나는 그것을 알고 있어도 내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칼럼니스트) 사진 포토파크] 지나대륙으로 건너가 명나라 황제가 된 주원장은 고려 노비출신의 전남 해남사람 [자료]일요일 오전에 방영되는 MBC프로그램'서프라이즈'에서는 원나라를 초원으로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설한 개국시조 "주원장은 고구려인가?"라는 논쟁에 대해 다루었다. 이에 대해 지나국의 사학자들은 한족출신이라고 주장하고,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고려인'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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