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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에서 황제가 된 주원장에 비하면 김일성은 조족지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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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3 윤*현 조회수 483


소련이 가짜 김일성으로 내세워 왕으로 만들어준 김일성세습독재왕조보다는 노비라는 신분적 한계를 벗고자 지나대륙으로 건너가 걸식하며 스스로 세력을 만들어 부패한 원나라를 초원으로 몰아 내고, 명나라를 세워 황제가 된 주원장의 자수성가가 수만배의 가치가 있는 위대한 역사다. 농민과 함께 부패한 원나라 권력집단을 무너 뜨리고 황제가 된 거지출신의 주원장이야말로 진정한 민중의 황제라 할 수 있다.



황제가 된 명 태조 ‘주원장’에게는 눈앞의 승리보다 기강과 공동체 질서를 확립하는 원칙과 가치가 가장 중요했다. 헌법과 법률 준수라는 원칙과 자유 민주 시장 복지 공존이라는 가치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원칙과 가치가 되야 한다. 거부하고 위반하는 자들은 종북숙주세력과 함께 반국가 이적세력이다. 주원장은 그러한 원칙과 가치를 거부하고 위반하는 자들을 친인척을 포함하여 3만여명을 처형하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원칙과 가치가 무너질 때 부패와 백성수탈과 함께 나라가 망하기 때문이다.



전남 해남출신의 고려 청주 한씨 가문의 노비로, 주원장의 아버지가 천자가 나온다는 명당에다 선조들의 무덤을 이장하고 지나대륙으로 건너가 낳은 아들 주원장이 홍건족의 수장이 되어 원나라를 무너 뜨리고 명나라를 세웠다는 주원장은 대명통지에서 자신 선조의 나라는 조선이라고 했다고 한다.

 

청주 한씨 족보에도 명나라 2대 황제 영락제의 어머니가 주원장의 왕후가 되는 청주 한씨로 기록되어 있다. 황제가 된 후에 3만에 달하는 신하들을 숙청했다는데, 이는 아마도 출신이 불분명한 주원장에 대해 반항하는 한족들이 아닌가 싶다. 조선에 많은 환관들을 보내 달라고 요구한 이유도 측근들을 조선인들로 채우고자 했던것 아닌가 싶다.

 

 황제가 된 명 태조 ‘주원장’ 눈앞의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원칙과 가치

 

[보도자료]주원장은 흥미로운 인간이다. 그는 따뜻한 인간애와 합리적인 인재경영으로 황제에 오르자 피의 숙청을 단행한다.

 

공신, 참모, 사돈에 이어 심지어는 하나밖에 없는 조카마저 죽였다. 오로지 왕조의 번영과 강한 왕권을 위해서다. 이렇게 다중인격 같은 리더십을 동시에 보여준 예는 쉽게 찾기 어렵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게 두 가지 점에서 찬사를 보낸다. 가장 비천한 출신에서 창업에 성공한 점, 그리고 리더에게 요구되는 단호함에서 그는 100점짜리 군주였다.


칭기스칸의 후예가 세운 원나라. 200만 명의 몽골족으로 중원은 물론 멀리 유럽까지 지배했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조였다. 하지만 몇십 년이 흐른 후 원은 왕위 계승권을 놓고 왕자들 간의 싸움으로 분열됐다. 골육상쟁의 피 튀기는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왕권과 몽골의 지배력은 그 힘을 잃어갔다. 그때 세계를 죽음으로 뒤덮은 흑사병이 창궐한다. 전 세계 인구 중 약 20%가 목숨을 잃었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오는 법. 흑사병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에 가뭄과 기근이 닥쳤다. 마을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죽음은 일상이 되었다. 중국 북부 지역에서만 무려 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배가 고파 탁발승 됐다가 홍건적에 가담

1328년, 안후이성 봉양현. 주세진과 부인 진 씨 사이에서 네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원장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흑사병으로 죽고, 맏형과 셋째 형수 그리고 둘째 형의 아이들과 어머니마저 죽고 말았다. 곧이어 누이와 조카들도 죽었다. 외가도 친가 식구도 모두 흑사병으로 죽었다. 주원장은 졸지에 고아가 되었다. 어린 주원장은 부친의 주검조차 묻을 땅을 구할 수 없었다. 마을의 유지인 유 씨 집을 찾아 하소연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웃이 밭 구석에 겨우 땅을 내주었다. 어린 주원장은 낡은 옷으로 부모의 시신을 두르고 땅에 묻었다. 훗날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어 아버지는 순황제, 어머니는 순황후로 추존하고 황릉을 만들어 부모를 모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고 한다.

졸지에 고아가 된 주원장은 먹고 살기 위해 중이 된다. 그는 황각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았다. 하지만 부처님도 배고픔을 구제할 수 없는 노릇. 그는 탁발승이 되어 이곳저곳을 떠돈다. 백성들은 살기 위해 저마다 칼과 몽둥이를 들고 도적이 되었다. 세상이 흉흉해지면 극성을 부리는 것이 내세를 강조하는 종교다. 백련교가 일어났다. ‘장차 미륵불이 나와 이상향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주장을 내건 백련교는 세를 확장했다. 이들은 머리에 붉은색 띠를 두르고 세력화 되어갔다. 그들이 바로 홍건족이다. 홍건족은 도적떼를 넘어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지도자는 한림아였다. 그는 자신의 밑에 대장들을 거느리고 전국을 휩쓸며 중국의 미래 권력으로 부상했다. 홍건족의 2인자인 곽자흥은 무력을 장악한, 사실상 최고 권력자였다. 무리를 지어 탁발을 가장한 도적질을 일삼던 주원장은 홍건족 곽자흥 군대에 입대한다.

주원장은 비록 글자도 깨우치지 못했고 책 한 권 변변히 읽지 못했지만 머리는 비상했고 판단력 또한 대단히 빨랐다. 그가 탁발을 하며 주린 배를 채울 때의 일이다. 어린 주원장은 또래들과 함께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일을 해주고 밥을 얻어먹었다. 한 번은 무리들과 더불어 부유한 한 농가에서 어린 송아지를 돌보는 일을 했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이들은 그만 송아지를 잡아먹고 말았다. 먹을 때는 배고픔을 해결하느라 몰랐지만 다 먹고 나니 겁이 덜컥 났다. ‘도망가자, 어떻게 하느냐’ 등등 의견이 분분할 때 주원장이 나섰다. 그는 송아지 가죽과 뼈를 추려내어 땅 속에 파묻고 소꼬리를 하늘로 향하게 하여 땅에 반쯤 묻었다. 그리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주원장은 송아지 한 마리의 행방을 묻는 농가 주인에게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송아지가 갑자기 땅 속에 박혔습니다. 아무리 빼내려고 꼬리를 잡아 당겨도 나오지 않으니 어떡하면 좋습니까?”

물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주원장은 농가 주인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하지만 이 호기로운 행동으로 인해 주원장은 패거리의 두목이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리더십과 추진력 그리고 처세술이 능란한, 타고난 대장이었다.

▶무력을 갖추고 사대부의 학식을 영입하다

주원장은 홍건적 무리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리더십은 빛을 발했고 용병술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곽자흥은 주원장을 신임하기 시작했다. 1351년 곽자흥의 부하가 된 주원장은 호주 공격에서 큰 공을 세워 불과 일 년 만에 곽자흥의 참모가 된다. 그리고 그는 독립된 부대를 이끌고 남경과 장강 일대를 토벌함으로써 곽자흥 부대의 2인자로 자리 잡았다. 이때 주원장의 나이는 불과 23세였다. 곽자흥은 주원장을 신임하면서도 부담이 되었다. 주원장의 기질과 그릇이 보통이 아님을 알게 되면서 주원장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곽자흥에게는 곽처신이라는 아들이 있다. 하지만 이 아들은 그릇이 아비의 반도 되지 못하는 용렬한 인간이었다. 그는 주원장을 질시했다. 온갖 모함을 했지만 곽자흥은 마지막 순간에 항상 주원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주원장은 고민했다. 1인자의 마음을 들여다 본 그는 좀더 1인자의 신임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결정했다. 그의 아들이 되기로 한 것이다. 곽자흥과 아주 친한 마 씨 집이 있었다. 이 집의 딸이 곽자흥의 양딸로, 사실은 곽처신이 아내감으로 점찍은 처녀였다. 주원장은 마 씨의 사위가 되기로 결심하고 적극적인 구애 끝에 마 씨 처녀를 아내로 얻었다. 자연스럽게 곽자흥의 양아들이 된 것이다.

마 씨는 현명한 처자였다. 주원장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를 도왔다. 한번은 곽자흥이 주원장을 광에 가두고 굶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칫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마 씨는 몰래 광의 밑바닥을 파 그 통로로 주원장에게 물과 먹을 것을 주어 목숨을 구했다.

그러던 어느날 곽자흥이 병에 걸렸다. 그는 주원장에게 자신의 일을 맡겼다. 주원장은 부대를 이끌고 저주를 함락시킨다. 그는 중국 남쪽을 공격할 때마다 남부의 융성한 문화와 학문을 접하며 자극받았고, 신분, 귀천, 과거를 묻지 않고 많은 학자들을 영입했다. 훗날 이들은 장차 명나라 개국의 절대적인 공신들이 된다. 주원장의 활약이 점점 커지고 있는 가운데 곽자흥은 여전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군대는 분열되었다.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주원장의 군대는 2만 명에 육박했다. 그는 남경을 점령하고 스스로 오국공이라 칭하며 명나라 건국의 초석을 마련한다.


1355년, 곽자흥이 죽었다. 주원장은 그의 세력을 빠르게 흡수해 홍건족의 일개 대장을 넘어 원나라와 대적하는 반군의 지도자가 된다. 당시 중원은 북경 근처의 원나라 세력과 홍건족을 기반으로 한 주원장, 군벌 진우량과 장사성이 이끌던 세력으로 사분되었다. 주원장은 중국의 중심 장강으로 진출한다. 동부와 남부의 여러 성을 점령하면서 그는 이른바 사대부 세력과 만나게 된다. 주원장은 그들을 우대했다. 사대부계급 출신 학자들을 참모로 등용하고 이들을 스승으로 모시며 전쟁터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 한어를 배우고 중국사와 유교의 경전까지 공부했다. 그러면서 성리학에 대한 기본적인 토대를 깨우친 주원장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에 명분을 부여했다. 그것은 ‘한족부흥 漢族復興’이었다. 즉 북방 오랑캐인 몽골족의 원을 몰아내고 원래 주인인 한족이 중원을 되찾자는 것이다. 중원의 학자 및 남부의 부유한 상인들이 주원장을 지지했다. 주원장은 이때 통치의 원리를 학습하고 많은 독서를 통해 성리학의 심오한 내용까지 흡수했다. 이 시기에 명의 3대 개국 공신인 이선장, 서달, 유기가 주원장의 휘하에 포진하면서 주원장은 그야말로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달았다.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관리는 필요 없다

1356년 주원장은 남경을 손에 넣었다. 이는 양자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 및 군량미를 확보, 중국을 오가는 모든 수송 물자의 통로를 장악한 것을 의미한다. 그는 한껏 기세가 올랐지만 그렇다고 넘치지도 않았다. 스스로 무공이라 칭했지만 왕의 자리에는 오르지 않았다. 홍건적 본류 세력의 상징적인 존재인 한림아를 황제로 모시고 자신은 승상이 되었다. 껍데기뿐인 왕의 자리보다는 실리를 챙긴 것이다. 그는 군대에게 약탈을 삼가고 백성의 고충을 해결하는 엄정한 군기를 유지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백성들을 모아 개간할 땅을 주고 농업을 장려한다. 이렇게 그는 천천히 천하의 민심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1356년 주원장의 라이벌인 진우량은 스스로를 한왕이라 칭하고, 장사성은 오왕이 되어 연합세력을 구축했다. 이들은 주원장을 제거하기로 합의한다. 1363년 장사성과 진우량은 양쪽에서 주원장을 공격했다. 주원장은 20만 대군을 총동원해 명운을 건 일전을 벌였다. 진우량 역시 6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들은 화양호에서 마주쳤다. 누가 보아도 진우량의 우세였다. 군대의 수나, 해군의 규모에서 주원장은 이들과 대적하기에 부족했다. 하지만 주원장의 군대에는 탁월한 장수 ‘서달’이 있었고 또한 용병술의 대가 ‘유기’ 그리고 행정의 달인 ‘이선장’이 있었다(훗날 명나라 3대 개국 공신). 서달은 맹장이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용맹하게 군대를 이끌었고 후방은 이선장이 맡아 서달 군대의 병참을 빈틈없이 관리했다. 그리고 유기는 용병술의 대가였다. 그는 스스로를 천하의 기재 제갈공명과 비교하면서 “나의 재주는 공명보다 낫다. 공명은 천하를 삼분했지만 나는 분할된 천하를 하나로 모을 것이다”라고 호탕하게 외쳤던 기재이다. 이들의 신출귀몰한 전략과 충성스런 전투력은 주원장의 리더십과 만나 시너지 효과를 냈다. 진우량은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해 죽고 만다. 주원장은 이 여세를 몰아 진우량의 근거지인 우창을 함락한다. 이때도 선봉은 서달이고 계책은 유기가 냈다.

자신감이 붙은 주원장은 드디어 왕이 된다. 1364년 장사성을 공격해 승리를 이끌고 ‘멸몽흥한 滅蒙興漢’의 기치를 높이 들며 명왕이 된다. 1367년 장사성은 마지막 전투에서 주원장에게 패하면서 자결하고 주원장이 황제로 모시던 한림아는 배를 타고 가다 익사하고 만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익사 사건을 용도가 다한 한림아를 주원장이 폐기한 것, 즉 암살이라고 적고 있다.

1368년 주원장은 남경에서 국호를 ‘명’이라 짓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때가 40세 때이다. 그는 ‘호풍 胡風’을 없애고 당송의 정통을 잇는 왕조의 복귀를 선언한다. 그리고 전통적인 중국의 예법을 다시 살리고 유생 계급도 복권시키며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다. 천애의 고아가 탁발승이 되어 세상을 떠돌다 도적의 무리에 가담하고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다가 드디어 황제가 된 것이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비천한 신분 출신의 황제였다.

주원장은 우수한 학자를 영입했다. 많은 학교를 세우고 인재는 과거 제도를 거치지 않고 특채를 하는 등 문신 세력을 우대했다. 그리고 그는 재상을 거치지 않고 육부를 통해 직접 통치했다. 지방에는 공신들 대신 왕자들을 보내 제후로서 황제를 대신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군권은 그 누구에게도 권한을 주지 않고 오로지 황제만의 군대로 만들었다. 이때 그 유명한 <대명률>을 만들어 실제 행정에 적용했다. 사실 <대명률>은 법전과 행정의 규약집이지만 법보다 유교적인 색채가 강했다. 그래서 법의 실제 적용에는 조금 여유가 있는 관용의 법이었다. 이 <대명률>은 명나라 이외에 조선 땅에서도 500년 동안 그 효력을 발휘했다.

건국 후 주원장이 가장 공을 들였던 부분은 백성에 대한 행정의 월권과 부패였다. 그 스스로 가장 비천한 출신이었기에 관리들의 부패와 권력이 어떻게 백성들의 일상에 적용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황족 특히 외척과 환관의 정치 참여나 권력행사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기미만 보여도 엄하게 다스렸다.

▶3대 공신 및 3만 명을 숙청한 피의 리더십

주원장은 통치술과 용인술에 비범한 황제였다. 그런데 그 밑바탕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최고 권력자의 고독함이 숨어있었다. 본디 의심 많은 그의 성격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자 그는 공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명나라 3대 개국 공신들이다. 이선장은 관리로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주원장을 보좌했다. 그는 회서인맥의 좌장으로 충심으로 주원장을 섬겼다. 그는 청렴했고 권력에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은퇴 후 자신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의 후계자가 문제였다. 1380년 이선장 세력의 후계자인 좌승상 호유용이 주원장의 덫에 걸린 것이다. 주원장은 호유용을 시험했다. 황제 대신 잠시 권력을 대리하라 명하고 자신은 지방의 별궁으로 간 것이다. 호유용은 방심했다. 마치 황제처럼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인사권도, 행정권도 마구 썼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넘보지도 건드리지도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장군들을 불러 특별 하사금을 내린 것이다. 황제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감히 권력의 중추세력인 군대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던 주원장은 그 순간 호유용을 역모로 몰아 잡아들였다. 그와 연루된 1만5000명이 모두 한순간에 처형당했다. 이때 이선장에게도 화가 미쳤다. 하지만 주원장은 이선장이 공이 많고 그가 은퇴했다는 이유로 이선장을 보호했다. 하지만 몇 년 뒤 호유용의 잔당 제2차 숙청에서 이선장의 후손들이 걸려들면서 결국 이선장도 주원장의 숙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직의 장은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부하의 존재를 항상 의식한다. 능력과 리더십을 갖추고 있는 부하는 조직의 장에게 복이면서 목에 가시 같은 존재이다. 리더는 항상 그를 시험한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어떻게 자신을 대신하는 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그것은 리더의 개인적인 병이나 유약한 의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보완재가 아닌 대체재가 있다는 것은 어떤 조직에서도 조직의 장에게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다. 이럴 경우 방법은 두 가지이다. 리더가 스스로 자신의 대체재를 완벽하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방법과 다른 한 가지는 그 대체재를 제거하는 것이다. 주원장은 후자를 선택했고 호유용은 어리석게도 그런 주원장의 의도를 파악치 못한 것이다.”



그 다음은 서달이었다. 서달은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공신이다. 진우량의 군대를 격파하고 몽골족을 만리장성 북쪽으로 쫓아내는데 공을 세운 심복이었다. 또한 주원장이 태자 다음으로 아끼던 넷째 아들 연왕 주체의 장인으로 주원장과는 사돈이었다. 하지만 주원장의 피의 숙청에선 서달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거를 결심하고 때를 보고 있던 차에 서달이 온 몸에 난 종기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이때 주원장은 서달에게 거위를 푹 달여서 먹으라고 보낸다.

서달은 생각했다. 본래 종기에 거위는 상극이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주원장이 거위를 보낸 것은 자신에게 자결을 명령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서달은 거위를 삶아 그 물을 마시기 전 세상을 한탄하고 통곡을 한 후에 자결했다고 한다.

제갈공명과 비견되는 유기 역시 마찬가지다. 건국 후 은퇴해 지방에 있었던 그는 주원장보다 승상 호유용의 질시의 대상이었다. 호유용은 “유기의 덕과 재주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가깝게 두고 감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소문에 유기가 후손이 왕이 될 묘 자리에 조상을 모셨다고 합니다”라고 주원장을 꾀었다. 주원장은 유기를 남경으로 불러 4년 동안 감시했다. 유기는 기가 막혔지만 주원장의 성격을 아는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병이 들자 유기는 고향으로 갈 것을 청했고 유기를 불쌍하게 여긴 주원장은 그가 고향으로 가도록 허락했다. 유기는 병약한 몸을 끌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그만 죽고 말았다.

유기와 쌍벽을 이루던 학자 송렴은 원나라의 미인계에 넘어가 국가 기밀을 넘겼다는 죄목과 함께 아들 송신이 죄를 지었다는 누명을 쓰고 전국을 떠돌다 병으로 죽었다. 그야말로 공포정치의 시대인 것이다.

▶아무도 믿지 마라, 오직 너 자신만 믿어라


학살에 가까운 숙청과 공포 정치는 맏아들인 태자가 나이 40세에 요절하고 그 뒤를 이를 둘째 진왕도 죽고 무엇보다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마황후가 죽으면서 더욱 심해졌다. 마황후 외에 총 26명의 후궁으로 두고 24명의 왕자를 두었던 주원장은 그 누구보다 마황후와 마황후 소생의 왕자들을 아꼈다. 마황후가 죽고 황후 자리가 비어있자 대신들이 새 황후간택을 권했지만 주원장은 끝내 황후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두었다.

마황후 소생의 첫째와 둘째 왕자가 죽자 주원장은 후계자로 넷째 연왕을 염두에 두었다. 연왕은 보통의 야심가가 아니었다. 또한 그는 북경을 영지로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으며 백성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하지만 대신들은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대신들은 강력한 군주가 될 소질이 있는 연왕보다 태자의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추천한 것이다. 또한 명나라의 국시인 성리학적 관점에서도 장자승계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명분에서 밀린 주원장도 자신의 고집만을 부릴 수가 없었다. 태자에 대한 연민도 겹쳐 그는 어린 손자를 태손으로 삼아 자신의 후계로 정했다. 그리고 ‘어린 황제가 나이 많고 노련한 대신들에게 좌지우지 되면 큰일이다’라고 생각, 황제의 경쟁자나 될 만한 공신, 황제를 이용할 만한 위치의 근친, 세력을 형성한 대신들을 모두 숙청했다. 그의 강박관념은 더욱 심해지고 심지어 악몽을 꾸기도 했다.

하루는 숙청을 보다 못한 태손(후에 2대 황제인 건문제)이 주원장에게 물었다.

“이렇게까지 심하게 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주원장은 아무 말 없이 태손에게 장미나무 가지를 던지고 쥐어보라 하였다. 가시가 많은 장미나무 가지를 손에 쥐던 태손은 그만 가시에 찔리고 말았다. 내시들에게 가시를 제거하라 명한 주원장은 가시를 없앤 장미나무 가지를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처럼 가시를 제거하고 너에게 편하게 권력을 물려주고자 이렇게 피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훗날 건문제에게 독이 되고 만다. 주원장은 말년을 쓸쓸하게 보내다 1398년 눈을 감는다. 그때 나이 70세였다. 주원장은 죽으면서 유언을 한다. 어린 조카를 해하지 못하도록, 자신이 죽더라도 영지에 나가 있는 왕자들은 남경에 오지못하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처럼 후계문제에 몰두했다. 하지만 주원장이 죽고 얼마 후 넷째 아들 연왕은 반란을 일으켜 조카인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가 3대 황제 영락제이다. 그는 수도도 남경에서 자신의 영지인 북경으로 옮긴다. 그토록 주원장이 염려했던 일이 자신의 아들 손에서 일어난 것이다.

▶적군과 산오리 한 마리도 소중히 여기던 관용 리더십

주원장은 두 개의 삶을 살았다. 황제가 되기 전과 후의 그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냈다. 황제가 되기 전 주원장은 덕과 포용의 리더십을 펼쳤다. 주원장이 진우량, 장사성 군대와 중원의 패권을 놓고 격전을 벌일 때 일이다. 소주성을 점령한 그의 눈에 적군의 한 병사가 들어왔다. 그 병사는 허름한 흙더미 앞에서 울고 있었다. 주원장이 연유를 묻자 “어머니가 굶어서 개처럼 죽어 여기에 묻혀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비록 적군이지만 효심을 높이 산 주원장은 부하들에게 “저 병사와 무덤을 훼손치 말라”라며 엄명을 내렸다. 자신도 부모의 시신을 황망하게 처리한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이 많은 리더였다.

장사성의 군대를 포위하기 위해 적의 후방으로 침투할 때였다. 행군을 하는데 좁은 계곡에 산오리 한 마리가 알을 품고 있었다. 행렬을 멈춘 주원장은 ‘새끼를 품은 짐승을 해치면 업보를 받는다’는 동자승 시절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군대는 오리가 부화해 어미와 같이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렸다. 장사성의 군대가 이를 눈치 채 오히려 주원장이 위기에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적군의 주력부대들이 투항해 왔다. 이들은 주원장을 ‘천하패권의 전쟁에서 한낱 오리의 생명을 위해 작전을 포기하는 인간적인 장수’로 여기며 ‘나의 장래를 맡길 만하다’고 주원장의 덕을 높이 산 것이다.

주원장은 이처럼 한 번 세운 원칙과 신념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반듯한 리더였다. 또한 그는 자신과 어긋나거나 반대되는 모든 사람과 의견을 통합하여 균형을 맞추는 현명함도 갖추고 있었다. 자기관리의 달인이었던 그는 유능한 인재를 영입해 적재적소에서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 지휘자였다. 그의 군대가 열세를 딛고 중원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도 주원장의 탁월한 인재경영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런 그가 황제가 된 후 변하게 된 것은 어쩌면 1인자의 숙명인지 모른다. 그는 금의위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모든 신하와 왕족을 감시했다. 어느 날, 한 대신이 집에서 몇몇 사람을 초대해 술을 먹었다. 그 다음날 주원장을 그 대신을 불러 물었다.

“어제 누구와 무슨 술을 먹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가?” 대신은 빠짐없이 보고를 했다. 그러자 주원장은 “그대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구나”라고 보냈다고 한다.

주원장은 생전에 모든 보고서에서 ‘생 生 칙 則’이란 글자를 쓰지 못하게 했다. 실수로라도 이 글자가 보이면 당장 처형할 정도였다. ‘생’은 그가 탁발을 했을 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승 僧’과, ‘칙’은 홍건적 출신의 도적이라는 과거가 거론되는 ‘적 賊’과 음이 같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콤플렉스가 많았던 황제가 다스리던 감시와 공포의 시대였다.

리더 혹은 1인자는 본래 의심하는 자리이다. 그들은 조직관리에서 공식적인 보고 라인과 비선의 보고 라인을 동시에 운영한다. 그 두 보고의 비교를 통해 조직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조직에 알리기도 한다.

직장에서도 의심 많은 상사를 만나면 조직원들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업무는 물론 행동과 말 하나까지 항상 의도와 복선을 생각해야 하니 그런 분위기에서 무슨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의심하는 상사와 밀접해지는 방법은 ‘묵묵히 일만 한다’가 정답이 아니다. 일보다 더 필요한 것은 ‘상사와의 정서적인 교감’이다. 공적인 관계뿐 아니라 사적인 부딪힘에서도 상사가 “저 친구는 나의 입장에서 이 프로젝트를 본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원장처럼 어쩔 수 없이 피의 숙청을 단행하는 조직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사는 항상 주원장처럼 의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주 작은 일일수록 상사와의 어색한 관계와 상황은 반드시 풀고 가야 한다. 직원들끼리 이야기를 하다 상사가 들어서는 순간 말을 멈추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물론 상사의 ‘뒷담화’를 한 것은 아니지만 상사는 그 순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 합리화에 강한 것이다. 그리고 기억한다. 그 상황과 그 당시 인물들을. 이런 일이 반복되면 상사는 자신의 의심을 당연시하고 다음 인사에서 속 좁은 자신의 권한을 행사한다.
물론 명분은 100% 당신의 업무능력부족이 이유라 말하겠지만 속내는 따로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것이 조직생활이고 권력과의 동거다. 매순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단 한 가지이다. ‘그는 날 항상 의심한다’는 사실과 ‘나는 그것을 알고 있어도 내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칼럼니스트) 사진 포토파크]


지나대륙으로 건너가 명나라 황제가 된 주원장은 고려 노비출신의 전남 해남사람               


[자료]일요일 오전에 방영되는 MBC프로그램'서프라이즈'에서는 원나라를 초원으로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설한 개국시조 "주원장은 고구려인가?"라는 논쟁에 대해 다루었다. 이에 대해 지나국의 사학자들은 한족출신이라고 주장하고, 한국의 사학계에서는 '고려인'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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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서프라이즈'방송화면 자료

 
한반도와 지나지역은 분리된 공간이 아니다
 
사실, 100년전까지만 해도 백두산지역에서 출생한 누르하치가 개국시조인 청나라가 지나역사상 가장 광활한 지나영토를 직접 통치했다.주은래는 지나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청나라가 만주족이라면서 한민족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하기도 했다.청나라는 또한 고려인 김함보(신라말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의 손자)를 시조로 삼는 금나라를 계승한 나라다. 마의태자집안의 족보상으로도 정확히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영화로도 상영된 바 있지만, 청나라 마지막 황제이름이 바로 김부의다. 김부의는 일본제국주의가 지나지역을 지배하기위한 발판으로 삼기위해 만든 만주국의 황제를 역임하면서까지 청나라를 회복하고자했으나, 결국 일본제국주의에 이용만 당하고 말았다.
 
지나지역에서 모택동세력과 함께 공동의 적이였던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며 무쟁투쟁을 벌이던 윤세주가 지휘했던 조선의용대의 경우도 지나국의 사회주의 혁명사에 있어  길이 빛날 영웅으로 기록되어 있다. 윤세주가 바로 일본과의 전쟁 중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지금의 지나국을 개방개혁으로 경제대국의 발판을 다진 등소평의 목숨을 구했기 때문이다. 등소평에게는 조선인 윤세주가 바로 생명의 은인이며, 지금의 지나국이 남북한을 초월하여 한국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배경이며, 통일한국을 위해 적극 협력해 줘야 하는 당위성이기도 하다.
 
이 처럼 한반도와 지나지역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고로 한반도인들이 지나지역으로 가서 얼마든지 나라를 개국할 수 있으며, 지나사의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며, 한반도에 개국한 나라들이 지나지역을 경영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고구려의 개국성조 고추모를 부여에서 내쫓은 관계로 인하여 고구려와 원수지간이 되였던 부여의 왕 구태가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탁과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지역에 백제를 개국하여 한반도서남부지역을 중심으로 서해와 남해를 장악하여 일본열도와 요서지역을 비롯하여 지나의 동남부지역을 장악하고 나가 동남아지역까지 장악한 해상제국을 건설했듯이 말이다.그리고 백제의 후신에 불과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통하여 지배한 영역이 바로 백제의 영역과 동일했다는 사실또한 이를 입증한다.일본이 일제말기에 부여에 신사를 세우려다가 무산된 이유자체가 바로 일본왕실의 조상들이 백제황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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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를 개국한 주원장. 주원장은 황후(고려인 한여비)뿐만 아니라 후처들도 조선여인들로 삼았다.그리고 조선의 환관들을 명나라 황실의 환관들로 삼았다. 주원장이 한반도출신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나인이라면 황실을 관리하는 환관(내시)들을 어떻게 조선인들로 채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명나라 황실은 조선을 각별하게 환대했다.
 
조선의 태종은 양녕대군이 세자시절인 1407년 양녕을 명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13살이던 양녕대군은 남경에서 영락제를 한달 간 3번이나 만났다. 영락제는 양녕대군을 수행한 35명의 사절에게 선물을 주는 등 조선에 공을 들였고 양녕대군이 남경에 머무는 동안 양녕대군을 남경 도처를 안내했다. 명나라의 예부상서는 양녕대군에게 연회를 배풀기도 했다. 



 양녕대군이 귀국할 때 영락제는 양녕대군을 다시 만나 언제나 “조선을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양녕대군에게 여러 서적을 선물로 주는데 선물목록 중에는 영락제의 어머니인 마 황후(고려인 한여비)의 전기 150권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태종에 의해 양녕이 실각하고 세종이 왕위를 오른 뒤에도 영락제와 세종대왕은 밀접한 관계를 이어간다.  영락제와 세종은 자주 종교와 철학, 역사, 도덕, 과학, 기술과 관련된 서적 및 의견을 교환했다. 명이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 두 나라간 교섭은 더욱 늘어났다.

 

 
명나라 개국시조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해서 전혀 이상할 것도 없다!
 
주원장은 부인이 고려인이고, 1등 개국공신이 고려인이였고, 옆에 측근들이 고려인들이였다. 또한 이성계는 주원장의 승인을 받아 조선왕에 올랐는데, 주원장은 자신을 비웃는 한족관리들 때문에 조선에 많은 환관들을 보내달라고 요구해 와서 조선에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도 자신의 생가를 성역화하고 남한도 김대중.노무현.박정희 등 대통령의 생가를 성역화하는데, 주원장의 경우는  明이 망할 때까지, 아니 현재까지도, 지나국에서 주원장의 생가는 전혀 언급되지도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단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원장이 한반도출신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원장의 황후는 고려인으로 고려인 한영정의 딸이며 한확의 누이로,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어머니가 된다. 주원장이 명나라 태조에 즉위하기 전 또 다른 고려여인을 왕비로 맞는데 석비(碩妃)이며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는다.또 주원장의 황후(고려인)의 동생 한계란(韓桂蘭)은 후에 명나라 선덕제의 부인이다.
 
이러한 주원장의 부인들에 대해 지나국의 사학자들은 고려가 보낸 공녀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명나라 건국이 1368년이니 영락제(永樂帝)는 이미 명나라가 개국되기 8년 전에 태어났으며, 당시 원나라를 섬기던 고려에서 국가의 운명을 걸고 원나라의 반란군 홍건적의 두목 주원장에게 고려조정에서 공녀를 상납함은 있을수 없는 일이며, 더구나 영락제가 태어나던 1360년 이전의 주원장은 당시 황건적의 거대 세력 장사성(張士誠),진우양(陳友諒)등에 가려 별로 드러 나지도 않던 조그만 비적 무리에게 고려조정이 공녀를 조공 받았다는 것은 상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영락제는 후에 티벳과 베트남과 남만주 등 지나국 최대의 영토를 넓히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훨씬 이전인 60년 앞서 환관 정화를 시켜 6회에 걸쳐 멀리 아프리카 까지 정복하여 지나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황제이기도 하다. 명나라 개국시기 환관들이라고 했을 때도 주원장이 지나인들을 믿지 못하여 조선에 많은 환관들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여 조선인들로 채웠기 때문에 결국 주원장이나 영락제 시기의 명나라 환관들은 조선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원장, 홍건적 우두머리로 명나라의 시조
 
늘상 동서고금을 통하여 나라가 망하려면 권력암투가 벌어지고 부패하는 법이며, 대응능력이 부재한 권력의 무기력함이다. 원나라 말기 권력암투와 부패로 인하여 지나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는데, 그 민란이 바로 농민들의 홍건적의 난이다.이에 원나라는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하게 된다.이 때 투입된 무명의 장수가 이성계다. 홍건적의 진원지는 바로 고대 백제가 경영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상해의 내륙 안휘성, 강소성에는 농민군을 포함해 약 60만의 반란군이 엄청난 속도로 북상을 하며 기승을 부리던 때로써, 그 험악한 60만명의 홍건적에 단지 2,000여명의 고려군사들이 종횡무진 활약하며 반란군을 1년여간 제압하게 된다. 그 만큼 농민들로 구성된 홍건적은 정규군이 아니였기 때문에 오합지졸이였던 셈이다. 주원장은 그래서 죽을 때까지 조선이 지나지역을 공격해 오지 않을까 염려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원장은 유능한 조언자들(고려인들)을 밑에 거느리고 효과적인 전술과 전략, 행정조치를 취할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원에 대항하는 가장 강성한 지도자가 되었다. 주원장은 장사성의 세력을 제거한 후 북벌군을 편성해 사방에서 원으로 진격했으며, 북진에 성공하여 1368년 남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명나라를 세웠다.

몽골초원지역으로 쫓겨간 원나라와 조선(고려)군의 연합공격을 주원장은 죽기 전까지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요동(遼東)에 나가 있는 요왕에게 주원장은 조선이 20만대군으로 쳐들어 온다면 우리군대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하며 조선의 공격을 염두에 두고 철저히 대비하라 당부했다. 그러면서 만약 조선이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한다면 이는 단기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며 걱정하는 대목이 『명실록』에 전한다.

 

주원장은 왜 한반도(전남 해남)를 떠나 상해지역으로 갔을까?
 
주원장의 출생과 관련하여 지나국의 기록[주원장전]에는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펑양현(鳳陽縣)출신으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16세에 고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기근을 피하기 위해 평양에 있는 황각사(皇覺寺)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어 하북지방 일대에서 탁발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문제는[주원장전]의 발행시기는 한국의[조선기문]이 발행된 뒤라는 사실이다. 두 책을 비교해 볼 때 주원장의 어린시절 매우 가난했다는 점과 주원장이 절로 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주원장이 걸식하며 돌아다닌 시기가 비슷하다.[조선기문]에는 명태조 주원장과 이름이 같은 남자가 등장한다. 주원장은 경상도 웅천의 주씨 노부부의 가난한 아들로 5살이 되던 해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15세에 하산했으며 총명하고 민첩했다고 적혀있다. [주원장전]이나[조선기문]의 내용은 유사하다. 고로 저술연대가 빠른 한국의 [조선기문]을 참조하여 후에 지나인들이 [주원장전]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술보다 더 그 진실성이 강한 것이 도깨비로 전승되는 치우천황의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민간 전설집에는 주원장이 지나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가 적혀있어 더욱 신빙성을 더했다.도리어, 주원장의 출생지로 회자되는 곳이 우리 나라의 전라남도 해남 마을로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당대 유명한 풍수지리가 '유현'으로부터 천하 명당이 전라남도 해남 바닷가 어딘가에 천하제일의 명당이 있음을 알아내고는 급히 찾아가 보았는데, 주원장이라는 사람이 3년전에 자기 부모를 모신 후 지나지역의 '안휘'라는곳으로 갔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일은 주원장의 유언에 의해 그는 극비밀리에 한반도 해남에 묻혔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나국 화교들이 최고로 치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묘지라고 불리는 곳인 명효능이란 곳에는 터만 성대하게 궁궐같이 지어져 있을 뿐, 묘지가 없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나라 전래의 설화뿐이 아니라, 장백전(張白傳)이란 군담소설에도 주원장이 장백(張白)의 죽은 누이의 자부(欺夫)라는 것을 현몽하는 대목이 있고,조선의 대표적 판소리 춘향전에도 주원장이 등장한다.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이 뿌리내리는 조선시대에서 감히 부모국으로 섬긴 명나라의 태조가 조선의 전라도 해남에서 머슴이나 하던 상놈출신이었다고 기록하지 못했을 뿐, 호남 곳곳에서는 지나국의 황제가 된 주원장의 과거모습을 여기 저기서 나즈막하게 구전을 통해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청주 한씨는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서해를 건너 한반도 서남부지역의 마한 땅으로 들어온 기자조선의 마지막 기준세력의 후손들이다.[후한서]에 기록되기를 "기준은 바다를 건너 마한을 파하고 왕에 올라 한왕이라 칭했다.기준의 대가 끊어지니 다시 마한인이 왕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기준후손이 자신들의 성씨를 '한'씨로 정한 이유일 것이다.이러한 배경을 통해서도 한반도는 한민족의 본향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청주 한씨 문정공파 족보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麗妃 明 太宗 永樂帝 西成府院君永恭愼夫人 明 宣宗宣德帝上 同昭惠王后 德宗大王 西原府院君確丁巳誕降 甲子昇遐..."
 
주원장이 전라도 해남의 '한영정' 집안의 머슴이었을 때 주인집 딸인 한여비와 눈이 맞아 지나국으로 도피하였거나 주원장이 지나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잡은 후에 여비를 불러들인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아 더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나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모친이며 주원장의 부인되는 여비를 낳은 문정공파 한씨의 족보에 고려 중엽에 왕후들(容信王后,容懿王后)를 배출한 고려 최고의 명문 대가다. 따라서 지나사학계가 주원장의 황후 여비에 대해 공녀 운운함은 이미 앞에서도 기술한 바 홍건족의 민란이 일어나던 시기에 해당함으로 오히려 원나라에 공녀를 바쳤어야 했던 상황에 비하면 이미 명나라를 개국하기 전에 혼인을 하여 자식(영락제)을 낳던 연대상 혹은 조건상에서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 주원장은 왜 한반도지역을 떠나 지나지역으로 갈 수 밖에 없었을까?

 
아마도 장보고처럼 청해진(완도)에서 태어나 신분상 출세가 어려운 신라시기에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지나지역으로 가서 뛰어난 무예솜씨로 당나라 무령군 소장에까지 올라 산동지역의 백제인들(신라방으로 호도됨)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백제의 후손답게 아시아 바다를 장악하여 해류상으로 보았을 때도 한반도와 지나국,그리고 일본열도를 연결할 수 있는 중간지점인 지금의 완도에 해상무역을 관장하는 청해진을 설치하였고, 부패해 가는 신라의 권력까지 위협하는 해상세력으로 성장했다.당시 장보고가 마음만 먹었다면 신라권력을 장악하고 나라를 열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먼저 겁을 집어 먹은 신라권력층이 염장을 시켜 장보고를 살해하고 청해진을 해체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장보고 군대는 신라의 토벌전으로 인하여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그들의 설화 역시 호남지역에 무수하게 흩어져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주원장 역시 머슴출신으로 신분상 출세하기 어려운 고려에 사느니 능력있는 자들은 얼마든지 기용될 수 있다는 징기즈칸의 나라 원나라가 있는 지나지역에 사는 것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한반도지역을 떠나 안휘성지역으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원나라 말기라서 원나라왕조가 권력암투와 부패로 이미 나라가 혼란에 빠진 상황이고, 마치 원나라에 의해 심하게 차별받은 한족이 중심이 된 홍건적이 백련교를 기반으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이에 원나라와 고려군이 연합으로 소탕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홍건적의 소명왕이 잡혔다.이 때 주원장이 소명왕을 구한다.그뒤 주원장은 지나땅을 계속 정벌해나가던 중 1366년에 홍건적의 상징이었던 소명왕을 죽임으로써 자신이 홍건적의 무장임을 부정함에 따라 홍건적의 난은 표면적으로 종결지어졌다. 그리고 홍건적의 사상적 기반이 된 백련교에 입신했던 주원장은 홍건적임을 부정하면서 원에 부정적인 농민들을 기반으로 명(明)을 개국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여기서 주원장이 명확히 지나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한반도지역을 떠나온 주원장은 당시 혼란상황에서 홍건적을 이용하여 지나지역의 세력을 규합한 다음 농민을 기반으로 명나라를 개국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주원장이라는 인물은 상당히 머리가 좋고 무예가 뛰어난 인물임을 알 수가 있다.
 
주원장은 모국 고려인 추유를 자신의 오른팔이자 뛰어난 전략가로 세운 후에 명나라를 개국한 후에는 재무장관에 이른다. 그러나 지나국의 사학계는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하다.지나국은 추유대신에 유기를 내세우나, 유기의 저서나 직책 등을 살피면 그는 전략가가 아니고 단순한 서기나 행사를 기록하는 사관에 불과함을 알수 있다.
 
이러한 주원장의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에게 침략을 당하자, 군대를 지원하여 돕는다. 청나라의 개국시조 누르하치도 자신의 시조가 고려인 김함보라는 사실을 알기에 조선에 벼슬하기를 원했고, 오랑캐라고 비웃음을 당하자 만주의 여진족(말갈.숙신.몽골)족을 규합하여 후금을 개국한 것이다.그리고 죽기 전에 조선을 침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지나문헌에 따르면, 주원장은 홍건적의 우두머리로 지나국 동부지역의 여러 읍과 성을 함락시킨 뒤 양자 강(揚子江) 유역에 도달하여 그곳에서 사대부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과 알게 되었다. 그들로부터 그는
지나어의 기본을 배웠고, 지나사와 유교경전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원장은 고려당시 한반도 사람(전남 해남)으로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였거나, '한여비라는 고려 한영정' 명문가문의 딸과 정을 통한 이유로 추방당해서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지나지역으로 배를 타고 건너 갔고, 지나지역에서 일어나 홍건적의 무리에 들어가 활동하여 홍건적의 권력을 장악했고, 원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지나지역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지나어를 배우고, 지나의 유교이념을 배우면서 유식해 졌으며, 자신이 사랑한 해남의 한영정 집안의 한유비를 아내로 맞이하여 명나라 황후로 삼았으며, 고려인 추유를 전략가로 삼으면서 확실히 지나전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주변에 많은 고려인들을 측근으로 삼는 바람에 지나인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사기도 하자, 그들을 학살했으며 이성계가 개국한 조선에 많은 환관들을 보낼 것을 요구해서 명나라 궁궐을 조선의 환관들로 채웠음을 알 수 있으며, 죽은 후에는 아들 영락제에게 황위를 물러 주고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 해남으로 돌아와 묻혔다고 볼 수도 있겠다.  결과적으로 몽골의 나라 원나라를 이어 지나전역을 통치했던 명나라는 주원장을 중심으로 고려인들의 나라였다고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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