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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의 시사탱크 - 참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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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한신정신의 표상 강원룡,종북 반미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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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1 윤*현 조회수 286




음양태극은 지나의 상징..통일한국의 국기는 삼태극기다음양태극은 지나의 상징..통일한국의 국기는 삼태극기다음양태극은 지나의 상징..통일한국의 국기는 삼태극기다

한민족의 대한독립만세 운동일을 3.1로

 

정한건 한민족 3신1체 하나님사상 때문이다


0=1=3은 무극 양심 하나님과


우주변화를 상징하는 한민족 숫자이다

음양태극은 지나의 상징..통일한국의 국기는 삼태극기다  음양태극은 지나의 상징..통일한국의 국기는 삼태극기다


통일 대한민국의 국기인






3태극에서 노랑은 중도






정화와 상생의 상징인 노랑 무궁화는


1만년 마고 대한민국의 뿌리꽃이다 

 


 무궁화꽃은 원래 완도가 원산지!~ 마고문명의 중심지였던 소안도 월항리 노란무궁화 원류를 찾아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생명을 살리는 빛-양심-이였다>


(군) 임금=(윤) 다스리다. 바로잡음. 조화롭게 함+(구) 입

 











국민을 위하여!민족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국민과 민족을 위해


반공 자유 민주 시장


복지 공존의 가치를


지향하여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중도주의가 한신정신



여해 강원용 목사의 초상화 바라보는 시민      30년 전의 그날 / 강원룡


정당 패거리주의를


탈피하고 국민과


민족을 위하여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였던


진정한 중도주의자

 

민족 한신대 정신의


표상 강원룡



진보당 당수 조봉암
(강원용은 그의 지지요청을 거부했다.)



강원용(姜元龍, 1917년 10월 30일 함경남도 이원군 ~ 2006년 8월 17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은 일제 강점기대한민국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기독교 신학자이자 정치인·철학자·통일운동가·교육자·시민사회운동가이다. 함경남도 출신으로서, 아호는 여해(如海)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 일본에 유학을 다녀왔고 1945년 이후에는 김규식 박사와 여운형이 전개한 좌우합작운동에 투신하였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경동교회에서 활동하였다. 1953년 미국을 거쳐 캐나다로 유학했다가 1957년에 귀국한 뒤 미국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 이후 기독교 단체 활동과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며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김수환 추기경·윤보선 전 대통령·월남 퀘이커 교도 함석헌 등과 함께 반 유신 운동을 주관하기도 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 평화포럼 등을 조직했다. 말년에는 참여 정부의 정책과 친일파 청산작업을 비판하거나, 반미주의좌파 운동가들에 대한 강한 반감을 보여 비판받기도 하였다.




1948년 한신대학교를 졸업, 1949년 11월 김재준의 후임으로 경동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기독청년연합회 정치부장을 지내다 1953년 도미하여 캐나다로 유학, 1954년 캐나다 매니토바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1956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을 거쳐 57년 미국 뉴스쿨대학교대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5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강의, 세미나, 학술대회 등을 주관하였다. 1961년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 및 중앙위원이 되었다. 1965년 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장, 1970년 국토통일원 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1972년 박정희의 유신에 반대하여 1974년 김수환, 함석헌 등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가, 대표위원에 피선되었다. 1979년 3월 9일 중앙정보부는 크리스찬 아카데미 수강생을 연행하고 간부 6명을 체포하였다. 또 아카데미 산업사회 교육과정 수료생인 노조여성지부장 YH무역 노조 최순영 외 5명이 연행되고, 3월 27일 아카데미 원장 강원용도 출두하였다.


1980년 8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었고, 1981년 WCC 중앙위원회에 참석하였다. 1986년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협의외 대표회장에 피선되었다. 1986년 경동교회 목사직을 은퇴하고, 1986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의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7년 88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문화예술행사추진위원회 위원장, 1988년 방송위원회 위원장, 1994년 세계종교인평화회의 공동의장, 1998년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의장, 방송개혁위원회 위원장,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공동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6년 8월 17일 사망했다. 국민훈장 모란장, 동백장, 체육훈장 청룡장 등을 수훈하였다.


반미주의에 대한 비판

2005년 10월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가 6.25 전쟁 당시 미군의 개입을 비판하자, 10월 20일 특별 기자회견에서 미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도 빨리 끝나고 통일도 됐을 것이라는 주장을 북한에서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6·25전쟁 때 시골에서 구덩이를 파고 거기 숨어서 지냈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해 들어온다는 소식에 그때 구덩이 속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일어서서 춤을 췄다. 이런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대한민국 땅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며 강정구를 비판하였다. 또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논란에 대해서도 '6·25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미국을 구세주처럼 생각하는 것에 반감을 갖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6·25전쟁을 역사책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다며 거부감을 드러내었다.



남북 대화에 대해서 6·15와 8·15 남북 공동행사에서 쓰였던 '우리 민족끼리'라는 캐치프레이즈에 대해 편협하고 위험한 생각이라며 우려를 표명하였다. 한반도의 문제가 남북한만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는 좋아 보이지만 편협하고 위험하다고 주장하였으며, 남북문제는 4대 강국을 포함한 주변 국가의 협조가 긴요하다고 내다보았다. 그는 반미주의의 원인을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로 지목하였으며 이 구호가 반미로 이어졌고,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 시도와 강 교수의 발언 파문 등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한편 남북한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언급,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개의 눈을 주셨는데 북한 사람도 두눈을 똑바로 뜨고 봐야 한다며 한쪽 눈으로는 우리 동포라는 시각과 다른쪽 눈으로는 우리와 전혀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는 시각에서 봐야 한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된 노무현정권의 친일 청산 비판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김활란, 백낙준, 유진오, 노기남친일파로 선정하자 강원용 목사는 친일파 청산의 문제점을 지적, 비판하였다. 2005년 10월 친일인명사전 대상자로 김활란, 백낙준, 유진오, 노기남 등이 지목되자 "한 민간단체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후보 명단을 봤다. 나도 일제강점기에 투옥됐던 사람이지만 그 명단을 보고 웃었다."며 김활란, 백낙준, 유진오, 노기남 등을 친일파 명단에 실린 것을 지적하며 "그 분들을 다 단죄한다면 당시를 살았던 한국 사람들을 다 어떻게 평가해야 되느냐."며 친일파 선정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2005년 11월 18일 한국기독교회관에서 한국기독교교수협의회, 한국신학연구소 주최로 열린 '역사청산- 왜, 무엇을, 어떻게?' 심포지움에 참석하였다. 학술회의에서 강원룡은 당시 정권의 무차별적 역사청산에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학술회의에서 강원용은 10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응답한 것처럼 친일인명사전 후보 명단을 봤고 일제강점기에 투옥됐던 사람이지만 그 명단을 보고 웃었다며 김활란, 백낙준, 유진오, 노기남 등을 친일파 명단에 실린 것을 지적, 그분들을 다 단죄한다면 당시를 살았던 한국 사람들을 다 어떻게 평가해야 되느냐며 친일파 선정 기준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덧붙여서 그는 과거를 청산해야 올바른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기본 정신에는 동의하나 무차별적으로 과거를 청산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협력한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고 지적, 친일파 청산대상 선정기준을 비판하였다.



저서인 《역사의 언덕에서》에서도 그는 친일파로 지목된 송창근 목사의 친일파 선정에도 비판을 가하였다. 송 목사는 일제시대 때 이런저런 사건에 연루돼 감옥에도 드나들며 고생했으며, '온갖 고문을 받아도 참을 수 있었지만, 남산에 끌려가 벗은 몸으로 나무에 꽁꽁 묶여 온갖 벌레들에 뜯기는 고초를 겪은 뒤로는 항일 활동에서 손을 떼게 됐다'며 '일본 경찰은 이후 김천에 숨어살다시피 하는 그를 불러 친일 유세를 강요했는데, 그는 어쩔 수 없이 강연을 나가게 됐지만 정치적 발언은 일절 하지 않고 만담식으로 가벼운 말들만 하다가 끝내곤 했다'고 밝혔다. 이어 '해방이 된 뒤 송 목사는 (친일 행적들이) 자의에 의한 행위가 아닌 소극적 행위였음에도 양심의 부담을 안고 조용하게 살았다며 그랬던 송창근 목사를 친일 목사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을 볼 때마다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이어 친일 논란에 대해 당시 우리교계에는 세 부류의 지도자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한 부류는 주기철 목사처럼 감옥에서 저항하다 순교당한 사람이고, 그 다음은 진짜 친일파 목사인데, 그들은 신사참배를 하러 가면서 "눈에 보이는 천황께 충성 못하는 사람들이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께 어떻게 충성하겠느냐"고 강요하는 자들이라 하였다. 한 부류는 부득이하게 일제의 테두리 속에서 목숨을 이어가며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기 위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낸 인물이라고 지적하였다. 강원용은 송창근 목사가 세 번째 부류였다며, "그가 했다고 하는 친일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면 그것은 친일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변호하였다.



《역사의 언덕에서》에서 그는 친일파 청산 기준의 공정성을 비판하였다.[28] 《역사의 언덕에서》에서 그는 친일파 청산 기준에 대해 일제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친일이나 항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점을 지적, 거물들이야 창씨개명도 거부할 수 있었겠지만 민초들이 무슨 수로 그런 것을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하며 일반 국민의 입장도 헤아릴 것을 주문했다. 한편 다른 실례로 윤동주의 창씨개명을 들며 저항 시인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했다고 하면 요즘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그 시대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친일파 청산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간첩사건 조작론에 대한 견해

한편 일부 운동권 세력 내에 사회주의 세력이 있었다는 점과 꼬투리 잡힐 짓을 했다는 증언을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 이후 1967년 민비련(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 1979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자 2004년 월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간첩조작사건 재평가에 대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민청학련 사건,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중에는 전혀 근거없는 사건들도 많았지만, 이런 사건들이 100% 조작된 것은 아니며 꼬투리 잡힐 구실을 만들어서 잡혔는데, 박정희 정권이 이 꼬투리를 확대, 과장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그에 의하면 '100% 사실이라거나 100% 조작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양쪽 다 똑같은 흑백논리'라고 밝혔다.



또한 2004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는 직원 6명이 금서(금지된 책)를 읽었는데 이것을 정부가 확대, 과장해서 반공법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부풀린 것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그가 보수 세력에 투항했다, 타협했다는 인신공격이 나돌기도 했다.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

2006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강원용은 노무현 정권의 의사소통 부족과 독선적인 것을 들어 비판을 가하였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386세대니, 뭐니 해가지고 국민의 일부 몇 사람이 밀고 나가지, 광범위한 국민 참여의 길을 열어주고 있지 않다'고 하였고 노무현 정부에 조언하는 시민단체가 있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참여 대상에 대해 "노사모라든지 386세대라든지 요런 사람이 중심이 된 것 뿐"이라며 노사모와 386측근 등참여 대상의 협소함을 지적하였다.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남미(南美) 같은 실패로 갈까 걱정이다'고 비판하였고, 언론 정책에 대해서는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해 그렇게 자꾸 적대시해서 어떻게 자유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것인가며 비판을 제기하였다. 노무현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하려는 집단이냐는 의심은 곧 친노진영 네티즌들의 불만과 분노를 유발했다.

대통령 김영삼, 김대중 등이 재야활동을 하던 시절부터 교류하였으나 김대중의 정책에도 비판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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