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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혁명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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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6 신*호 조회수 278
4. 19 이후 분출하는 국민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도 역부족이었던 민주당 정부는 정권담당세력 내부에서 신 구파라는 정파적 갈등까지 겹쳐 효율적인 정부를 이끌어 나가지 못하고, 위기관리능력의 한계를 보여준 정부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 정부 아래에서 쌓여 있던 국민의 불만이 각종 시위로 폭발하였지만, 민주당 정부는 강력한 개혁 의지를 보여 주지 못하였다. 오히려 민주당은 정쟁을 일삼았으며, 결국 일부 의원들은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결성하였다.
이에 따라 장면내각의 힘은 상당히 약화되었으며, 개혁 또한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당시 경제 상황이 매우 어려워 130 여만 명에 달하는 경제활동인구가 대부분 실업상태에 있었으며,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춘궁기를 이겨 내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민주당정권의 협애하고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적 비전, 허약한 정치적 의지와 리더십, 파당적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정치 등은 그들이 경제개발을 위하여 전략적 선택을 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대한원조정책의 변화된 환경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원조의 확대를 통하여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데서도 드러난다. 민주당은 뿌리깊은 기반을 지닌 굳건한 조직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자유당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5.16혁명이 장면정권을 무너뜨렸을 때 대중적 항의가 없었던 이유 중에는 장면 정권의 무능력에 대한 국민대중들의 무언의 동의도 한 몫을 하였다.

그들은 목숨을 걸었고 5.16혁명은 군사적으로 잘 조직된 혁명이라기 보다는 2공화국의 무책임과 대비되는 정치적으로 잘 조직된 혁명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활력이 사후적인 정당성을 이끌어 내었다. 미군방첩대는 혁명 직후 거리에 나온 시민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 10명 중 4명은 찬성, 4명은 반대, 2명은 호감은 있다 라고 대답하였다.


당시 한국사회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장기적, 구조적 경제개발전략과 이를 주도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의 존재였다. 또한 그러한 국가는 4월 혁명에서 표출된 정치적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산업화의 의제를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시킬 수 있어야 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박정희 정권은 급속한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 민주화를 유보한 반면, 민주당 정권은 둘 중의 어느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유약한 정권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와 근대화를 통한 자립경제를 최우선으로 두었고, 자립경제가 달성되면, 이 토대위에서 민주화와 조국통일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서울대 박사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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