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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옛다! 그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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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2 천*수 조회수 387

"90년대 중후반에 300만 명이 대량 아사하면서 가장 많은 탈북자들이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럼 그 때는 교류협력을 안 해서 탈북자들이 나옵니까?"

 

"전혀, 근거가 없는 거고 데이터를 가져와보세요."

 

위는 자네가 한국자유연합 김성욱 대표를 불러놓고 나눈 대화다. 근거가 없으니 데이타를 가져오라는 윽박지름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아래 조선일보 기사 하나를 소개하니 참조하거라.

 

「김 목사는 전북 군산 출신이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2000년, 평신도 신분으로 자신이 다니던 교회 목사를 따라서 두만강 유역에 선교하러 갔다가 북한 인권 문제에 눈떴다.

"강을 따라 하루에도 수십구씩 굶어 죽은 시신이 떠내려왔어요. 강가에 서 있는데 남자 아이가 다가와 옷깃을 잡고 말을 걸었어요. '같은 동포끼리 같이 삽시다' 라고. 누더기 옷에, 손이 갈라진 논바닥처럼 어찌나 거칠던지…."


두만강변의 '꽃제비'들을 잊지 못한 김 목사는 귀국 후 신학교에 다니면서, 중국을 떠도는 북한 주민들을 남한에 데려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헌 옷을 모아 그들에게 나눠주는 일도 했다. 옷가지 수백벌을 넣은 대형 여행가방을 좌우로 목에 건 채 중국 땅을 헤매길 수차례. 옷 가방을 나르다 생긴 목 디스크 수술로 김 목사 목뼈엔 철심 6개가 나란히 박혀 있다.

아내 박 에스더(39)씨를 만난 것도 2000년 중국에서였다. 박씨는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에스더'라는 이름을 쓴다. 박씨는 "나는 인민군 여자 중대장이자,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밤낮을 안 가리고 한달 동안 김일성 동상 앞을 지킨 열혈 당원이었다"고 했다. 그런 박씨가 탈북을 결심한 것은 1999년이었다. 식량 부족으로 300만명 안팎이 아사(餓死)한 '고난의 행군' 때, 과학자였던 박씨의 아버지가 굶어 죽은 것이다.」

 

위는 2009.04.17 05:32에 조선닷컴에 올려진 《[사람과 이야기] 탈북자 돕느라… 목뼈에 철심 박은 목사님》이란 제하의 기사 중 일부다. 설마 이 기사를 쓴 기자에게도 "근거" 운운하지는 않겠지?

이 기사만 봐도 북한에서는 분명히 90년대 중후반에 300만명 가량의 아사자가 있었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많은 주민들이 탈북했으며, 이들을 보고 김대중의 햇볕정책으로 남한을 동경해서 탈북했다는 주장을 하는것은 어때, 낯 간지럽지 않나? 설사 잘 먹고 잘 살지만 더 잘 사는 남한을 동경해서 탈북했다 치더라도 남한이 잘 살게 된데 대해 자네나 김대중이가 뭔 보탬을 주었나? 지금도 틈만 있으면 박정희 욕 하는 파렴치한들아, 양심이 병아리 눈물만큼이라도 있으면 한번 대답 해 보거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북한 고난의 행군" 역사도 사실이네 마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찌 뻔뻔스럽게도 그 자리에서 내노라 하는 전문 지식인들을 불러놓고 같이 놀려 하니? 당장 내려 오너라! 부끄런 줄을 알아야지...!

그리고 tv조선도, 조선일보에서 수많은 기자들이 수십년 동안 보도해 온 사실에 대해서 단 한마디로 부정하는 저런 몰상식한 자를 시사프로 간판앵커로 앉혀놓고 뭐 하자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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