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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사건 증거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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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4 이*훈 조회수 352 | |||||||||
<1차 인혁당 사건의 실체에 대한 증언은 풍부합니다.> ① 김정강 증언. 자유공론 96년 8월호는 6·3사태 당시 학생운동권의 배후였다는 金正剛씨와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인혁당은 1차시기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자유공론에 따르면 김씨는 1차 인혁당 사건으로 투옥된 도예종씨와 감옥에서 만났을 때 도씨가 "이번에 검거되기는 했으나 법정투쟁에 의해서 승리적으로 넘어왔고 당은 노출되지 않았으므로 전략적으로 승리라고 봐야 한다"며 자신에게 입당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② 박범진 증언. "盧정부때 과거사委가 '짜맞추기'라 한 인혁당 실존한 지하黨이었다"2010.06.29.조선일보. 박범진(70) 전 한성디지털대 총장은 최근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가 출간한 '박정희 시대를 회고한다'에 수록된 증언록에서 "(1960년대 초) 나 자신이 인혁당에 입당해서 활동했다"며 "인혁당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제가 입당할 때 문서로 된 당의 강령과 규약이라는 것을 직접 봤고, 북한산에 올라가서 오른손을 들고 입당선서를 한 뒤 참여를 했다. 서울대학교 재학생으로는 (나를 포함해) 5명이 참여했다" "(과거사위 발표대로) 만약 단순한 이념서클이었다면 구성원끼리 누가 누구였는지는 알았어야 할 게 아니냐"며 " "인혁당은 조직망과 활동 방식에서 전형적인 좌파 혁명정당의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위에서 아래로 점(點)조직을 관리하는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하부에선 상부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고, 나중에 사건이 불거지고 나서야 알게 됐다" 중앙정보부가 인혁당을 '국가 변란을 기도한 지하조직'이라고 규정했던 것에 대해서는 "그 말이 맞다"고 했다. "당시 인혁당의 강령 내용은 '민족 자주적인 정권을 수립해서 북한과의 협상으로 통일을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③ 안병직. “인혁당-통혁당-남민전 시국사건은 용공조작 아닌 실제 공산혁명운동”. 박현채는 그의 민족경제이론뿐 아니라 사회구성체 이론으로 남한 좌파운동 이론의 사령탑 역할을 했으며, 월남식 반미 민족해방투쟁을 위해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됐다. 박현채는 안병직을 포섭했다. 박현채와 안병직은 인혁당의 후보위원의 위치에 있었다. ④ 이용택 수사국장.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중에 증거가 불충분해서 반공법으로 가볍게 처벌받고 풀려났다가 1967년 간첩으로 체포된 사람이 김배영 등 3명이나 됩니다. 김배영은 북한 군인이 쓰는 권총과 실탄 3백발을 받아서 내려왔습니다. 올림픽 사격대표 선수로 나가려고 그걸 가져왔겠습니까? ...1963년 민비연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인혁당 사건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6.3사태 배후자로 서울대 사회학과 황성모교수가 나왔습니다. 민비연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다음에 등장한 인물이 金正剛(당시 서울大 정치학과 재학)씨로, 「불꽃회」라는 서클을 만들어 학생에게 이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민비연 멤버가 아닌 金씨를 잡아 조사를 하다 보니 공화당이 창당하기 직전인 1962년 11월 당명을 「사회노동당」으로 하려다 한국일보에서 혁명주체들이 창당 명칭을 사회노동당으로 했다고 보도하는 바람에 난리가 난 적이 있는데 결국 민주공화당으로 당명을 바꾸었습니다. 사회노동당으로 당명을 만들려던 사람은 공화당 정책실 내의 河모씨였는데 보도가 나가면서 문제가 되자 잠적했습니다. 河씨의 동생이 서울大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는 심문하는 과정에서 부산에 있는 粱모 대면서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粱씨 를 조사하고 그와 같이 어울린 사람들을 다 조사하게 됐습니다. <2차 인혁당사건의 핵심은 김일성 총화사업보고서 전문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점.> ① 안병직. 인혁당재건위(2차 인혁당)의 경우 실체는 있었지만 당시 학생운동 조직인 민청학련을 지도하려다 실패하는 등 한 일이 거의 없었는데도 가담자 대부분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과도한 처벌이었다 ② 이용택수사국장. 실체가 있다는 증거는 있어요. 당시 북한 김일성이 '남조선의 민족해방전사들은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혁명과업을 완수하라'고 지시한 총화사업보고서라는 게 있었어요. 인혁당 관련자들은 '라디오를 듣고 그 내용을 받아 적었다'고 하는데... 혹시 김일성의 연설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그 사람(김일성) 말이 굉장히 빠릅니다. 그 말을 어떻게 다 받아 적었냐 이거예요. 추궁을 하니 관련자들은 이게 받아 적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주동자들이) 16절지 넉 장에 깨알같이 써 가지고 모든 관련자들에게 교양을 했습니다. 이걸 옮겨 쓰더라도 탈오자가 생기는데.... 김일성의 라디오 연설을 듣고 받아 적었다는 것이 우리가 일본을 통해 입수한 원문과 글자 하나까지 똑같았어요." 「어디서 나온 것인가」고 물으니 「밤에 이불을 덮어쓰고 라디오를 들으며 받아 적었다」고 답했습니다. 전깃불도 없이 라디오로 들었다면 탈자·오자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대남방송 녹음 원본과 대조해 보니까 한 글자도 틀린 게 없었습니다. 간첩으로부터 받은 것이 틀림없는데 다시 추궁했지만 자백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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