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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 북한군 광주사태시 남파 사실로 밝혀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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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9 박*희 조회수 377 |
경악! 북한군 광주사태시 남파 사실로 밝혀져!
경악! 북한군 광주남파 사실로 밝혀져 북한인권운동가 김주호 박사(북한난민보호협회 대변인 57)씨는 27일 오후 원로종교인과 애국단체의 성원아래 서울 정동 프란치스꼬 교육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개최, 1980년 광주사태 당시 북한 특수부대가 남파 개입됐다는 증거의 일부를 공개 했다. 이들은 자료 공개에 앞서서 발표한 성명에서,“북한군 개입 증거발표로 우리의 공적(公敵)이 북한군임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며, 이로 인해“우리 내부에 새로운 갈등 대립, 불화와 반목의 불씨가 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면서, “광주시민에게 2중 3중의 고통과 억울한 희생을 강요한 가해자의 정체를 가려내자”고 주장 했다.
홍성표 리진혁 등 (158명) 외 332명의 "인민군 영웅 렬사들이 잠들고 있다"고 기록 된 4m 높이의 추모비 성명은 진실의 발견을 위한 이번 발표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게 아니라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국민대화합과 국민대통합을 위한 것이며, 북한이 펼친 대남공작의 진실을 밝혀 다시는 광주사태와 같은 불행이 북한의 대남공작에 의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였다. 김 박사는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 정찰국 특수부대가 대거 침투했다가 많은 요원이 남한에서 사망, 북으로 귀한하지 못하여 시신 없는 가묘(假墓)인 ‘인민군영웅들의렬사묘(이하 열사묘)’에 “홍성표,리진혁 등 (이름이 기록된 158명)동무 외에 332명의 인민군 영웅 렬사들이 잠들고 있다.”고 새겨져 있는 묘비 사진을 공개하였다. 남한에서 5.18사태가 끝난 1980년 8월경에 조성한 함경북도 청진시 락양동 소련군해방탑 인근에 위치한 ‘인민군영웅들의렬사묘’는 일반인도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며, 묘지 전면 중앙에 세워 진 추모비는 1998년 2월 8일 묘지를 새로 단장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묘지의 위치는 구글지도에서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추모비에 새겨진 158명이 남조선혁명투쟁에서 희생된 “인민군영웅들의렬사”라는 기록을 각기 다른 문건에서 중복 확인했다며, 158명을 포함하여 300명이 넘는 사망자의 ‘죽은 날’이 1980년 6월 19일로 기록돼 있어 이날의 의미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6월 19일은 소속부대의 광주남파작전종결일로 남파 됐다가 사망한 자들의 사망일을 일률적으로 6월 19일로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법적 증거능력을 충분히 갖춘 자료를 다수확보하고 있다며, 앞으로 몇 가지 자료를 보완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2차 발표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한 방청객이 “사망자가 몇 십 명도 아니고 몇 백 명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많은 숫자가 아니냐?”고 의문을 표시하자, 김 박사는“확실한 자료와 근거에 입각하여 나온 숫자이기 때문에 많다 적다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면서 지금까지 북한 군 600명 개입설과 광주인근산간에 시신 수백 구의 암매장설이 꾸준히 나돈 것으로 보아 앞으로도 사망자 명단이 늘어 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의미 있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하여 다른 참가자는 1960년대 이래 북한의 도발양상과 규모의 변천에 대하여, 1965년 이전에는 1~2인조로 아군 전방에 침투, 정찰을 위주로 했으나, 1965년 이후 3인조 5인조 무장간첩으로 규모와 양상이 변천 해 오다가 1967년 에는 7인조 9인조로 규모가 늘고 군산 벌교 등 우리의 후방까지 침투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서 1968년 1월 21일에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 31명이 청와대 앞까지 침투해 왔을 때 그 규모와 대담성에 놀랐고 10개월 뒤 11월에는 울진삼척 산간 오지에 무장공비를 120여명이나 침투시켜 우리를 아연 실색케 했다며 그때로 부터 만 22년이 지난 1980년 광주사태에 600명만 침투 시켰다면 많은 게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이름이 확인 된 사망자가 300여명에 이른다면, 이는 누구라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숫자임에는 틀림이 없다.그러나 북한 내부에서 작성한 문건에 기재 된 명단이 추모비에 새겨진 이름과 정확하게 일치한 것으로 보아 설사 숫자가 예상(상식수준) 이상으로 많다고 할지라도 이를 정면으로 부정할 근거나 논리는 없을 것이다. 발표 현장에서 묘지 및 묘비 사진 외에 별도로 제시한 몇 가지 자료를 살펴 본 서석구 변호사는 이정 도면, 법적 증거력을 갖는 데에는 하자가 없는 자료라고 평가 하면서, 문제는 일반국민이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증거와 자료가 보강되어 누구도 부정하거나 반론을 펴지 못 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날 참석자들은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대규모로 남파 됐다는 데에 회의와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면서 올해대선에 온갖 공갈협박을 다하고 있는 북한이 이 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도발 해올 수도 있을 것이라며,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정부와 군은 물론 우리 국민 특히 젊은 세대들이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젊고 강한 신문-독립신문/independent.co.kr]
북한특수군 5.18광주에서 무더기로 죽어 매장됐다! 새로 밝혀지는 기막힌 사실 9월 27일 오후 2-3시, 정동 경향신문 옆 프란치스꼬 교육회관에서 조촐한 발표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세상을 놀라게 하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발표자는 북한인권운동가, 그는 오랜 동안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반드시 왔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사실자료를 획득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과 자산을 쏟아 부었고, 그 결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을 수집하여 정리중이라는 매우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당분간은 보안이 중요하기 때문에 세세한 것은 발표할 수 없다고 했지만 어제 발표한 내용만을 가지고도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내려와서 400명 가까이 죽었다는 사실까지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400명 가까이 죽었다면 이들은 어디서 죽었을까?
1) 도청 앞은 아니었을 것이다 5월 21일,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민간 사망자는 61명이다. 이 중에서 28명은 도청과는 거리가 먼 다른 곳들에서 사망했고, 33명만이 도청 앞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도청 앞 사망자 33명 중 20명은 칼에 찔리고 몽둥이에 맞아 사망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당시 도청 앞 상황은 계엄군과 시민이 수십 미터의 거리를 두고 대치해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수대에 맞아 죽고 찔려죽는 일이 발생할 수 없었다. 그러면 이들 20명은 누가 죽였는가? 바로 북한 특수군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13명이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총상 13명 중 9명이 카빈총에 의해 사망했고, 4명은 총기불상으로 기록돼 있다. 한마디로 5월 21일에 칼에 찔리고 몽둥이로 맞고 총에 의해 사망한 61명 모두가 계엄군과는 무관한 사망이었던 것이다. 북한특수군 소행이었던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이 집중 사격을 가한 대상은 연거푸 세 차례 씩이나 달려드는 장갑차였다. 반면 도청 앞에서 전사한 공수부대원은 정광철 중사 한 사람뿐이었다. 정중사는 지그재그의 전 속력으로 돌진하는 장갑차에 깔려 전사했다.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들과 북한 특수군 사이에 교전이 있었다면 전신이 아스팔트 위에 노출됐던 공수부대원들이 많이 전사했어야 했다. 또한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에서 8톤트럭 분의 TNT, 도화선, 뇌관을 탈취하여 도청 지하실에 갖다 놓고 이를 폭탄으로 조립한 집단 즉 북한이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으로 표현한 그 600명은 5월 21일 아침 8시에 광주톨게이트를 통과하는 20사단 지휘부를 공격한 후 곧바로 아시아자동차에 집결하여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무기고를 향해 팀들을 출발시켰고, 자신들도 함께 출발하여 무기를 탈취한 후 그 무기들을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 44개 무기고 탈취가 완료된 21일 오후 4시까지 이들 600명은 대부분 건재했다. 도청 앞 사건은 13시에 발생했다. 도청 앞 사건에서 북한군이 대량으로 죽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2) 교도소 공격 과정에서 거의가 다 죽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 정보당국은 북으로부터 내려오는 지령문을 수신했다. 교도소를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계엄당국은 교도소 방어가 참으로 급해졌다. 그래서 부랴부랴 5월 21일 오전에 31사 병력을 빼내 교도소를 방어하도록 지시했고, 오후 4시부터는 10개 공수대대를 광주에서 빼내 교도소를 방어하도록 배치했다. 북한 지령을 받은 북한 특수군은 장갑차 등을 몰고 5월 21일부터 22일까지 총 6회에 걸쳐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교도소를 감제할 수 있는 교도소 뒷산인 설탕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6.25전쟁 때에서나 구경할 수 있었던 고지쟁탈전을 벌였다. 특수군은 설탕고지를 반드시 점령해야만 했고, 공수대원들은 미리 배치되어 참호를 파고 방어전을 폈다. 공격자인 특수군은 총구에 노출이 됐지만 공수부대원들은 땅속에 몸을 숨기고 사격을 가했다. 참으로 치열한 전투였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의 첫 번째 수기를 쓴 전 북한 여교사의 내연남인 안창식도 교도소 공격 시에 다리를 다쳤고, 부하 대원들을 잃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치열한 전투를 6회나 치르면서 여기에서 사망한 광주사람은 불과 28명이었다. 이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5월 23일부터는 전투행위가 별로 없었다. 따라서 북한은 광주교도소를 점령하여 2,700명의 수감자와 좌익수 180명을 해방시켜 폭동의 모멘텀을 살려보려다가 그 아까운 특수군을 다 죽여 버린 것이다. 아마 6월 15일 김일성과 김대중이 참석하여 북한의 광주작전에 대해 총 결산을 하면서 한탄을 많이 했을 것이다. 북한 특수군으로 광주에 직접 왔던 가명 김명국은 5.18 작전 총화(총결산)를 6월 15일에 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제 기자회견에서는 제삿날이 1980년 6월 19일로 정해진 북한특수군이 400명 가까이 된다고 했다. 북한이 주도한 광주작전에 대한 총결산이 6월 15일, 죽은 날짜를 일일이 확인할 수 없는 이들 400명 정도의 ‘광주작전 전사자’들의 제삿날이 1980년 6월 19일인 것이다. 이들 400명 가까이 되는 전사자들은 광주의 어느 산에 묻혔을 것이고, 이들을 파묻기 위해 광주시민들이 구덩이 파는 작업에 인부로 동원됐을 것이다. 그리고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파묻게 하고는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광주시민 출신 작업자들을 다 사살해 버렸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구덩이들을 파 혜칠 날이 올 것이다. 이게 공식화되면? 가장 먼저 당시 전두환이 관장했던 정보기관들과 군이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의 상황은 어떻게 돌아갈까? 여러 의견들이 있을 것이다. 2012.9.2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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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이 안통할줄 알았던 좌빨들마저도 이 부분을 보며 경악을
금치못하며 인정하고 있습니다.
저도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 운동은 찬성하나 민주화 운동이라
앞세워 선동으로 폭동으로 변질시킨 이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맹목적으로 정부를 비난하는 좌빨들로 인해 예전 순수한
민주화 운동을 참여했던분들까지 좌빨처럼 만들고있는 좌빨들은
반성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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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댓글등록 안내
윤*현 2012.09.29 10:51
지만원이 늘 얘기하고 책까지 냈던건데.. 그럼 지만원이 말은 전혀 안믿었단 얘긴가?
서*덕 2012.09.29 08:53
이걸 어째??
북 스스로 5.18에 개입햇다고 스스로 명백히 한 거나 다름없으니 말에요/
이것이 사실로 확인되면
좌빨들은 북한은 거짓 사기꾼이야 라고 매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