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가 미래..북한은 낙랑군 신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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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9 윤*현 조회수 453 |
역사를 통하여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를 연다
고구려(코리아)는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다
다물 실현한 코리아 광개토태왕
다물이란 단군한국의 모든 영토와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의 회복을 의미한다!광개토태왕은
단군한국의 영토를 회복하고 한민족이
형제 자매처럼 지내며 지구촌이
공존번영하기를 꿈 꿨다!
[광개토태왕비]부여 건국자 해모수로부터 17대 손자
[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광개토태황은 18세에 광명(양심)전에서 즉위하였다. 성덕이 높아 주변 나라에서 열제라 칭하였다. 마니산에 올라 제천하고 천악을 즐겼다. 백제.신라.왜가 모두 조공을 바쳤다. 거란.평량(감숙성:흉노족의 본거지)까지 평정하였다. 이 때가 해동의 극성기였다."
우리 민족사에서 단군한국을 회복한 고구려가 왜
위대한 나라인지 인지시키기 위해서 학술 형식의 자료로 제공 제목:한군현을 한반도와 만주에서 축출하고 서토 회복한 고구려 파란색 부분은 1만년을 전후하여 한민족이 생존하였던 지구촌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다. 지구촌 전역으로 이주하여 천신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 제천단 겸 무덤으로 사용하였던 적석총(피라미드)로 대변되는 한국문명을 건설한 한민족은 모두 파란색 지역에서 살다가 이주해 간 것이다. 따라서 파란색 지역은 마고.황궁.유인.환인.환웅.단군왕검시대에 한국의 중심지역으로 반드시 회복해야 할 고토이기도 하다. 단군한국은 영토가 광대하여 한민족의 우주사상인 3신1체 하나님 사상에 따라 마.불.신한의 3한국 관경제로 통치되었다. 만주지역은 3한국의 군사권과 인사권을 가진 단군 대통령들이 직접 다스린 신한(태일/중심.임금의 땅=천상)이고, 한반도와 열도는 웅족출신의 웅백다가 1대 부통령으로 임명되어 다스려진 마한(천일/한민족의 뿌리땅)이고, 요서지역은 치우천왕의 후손인 치두남을 1대 부통령으로 임명되어 다스려진 불한(지일/한민족이 거주하는 땅=천하)이였다. 불한은 한민족의 뿌리땅인 마한과 단군 대통령이 거주하는 천상이 되는 신한을 지켜내야 하는 국가안보가 주 목적이였다. 따라서 동-서방에서 전쟁의 신으로 추앙받은 치우천왕의 후손인 치두남을 통치자로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국호가 대부여로 바뀌게 되는 단군한국 말기에 48대 고열가 대통령이 국정을 포기하고 옛 아사달로 떠나 버리자, 국가혼란상태가 도래했고, 길림지역에서 고구려의 선조나라로 22대 색불루 대통령에 해당하는 단군한국 중기부터 황권을 장악한 고리국 사람인 해모수가 군대를 일으켜 5가 공화정의 승인을 받고 권력을 잡게 되니 북부여다. 해모수 당시 요서지역은 주나라에서 망명해 온 기자의 후손인 기후가 연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공로로 신한의 단군 대통령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불한의 부통령에 즉위하니 기준을 마지막 부통령으로 나라가 끝나는 기자조선이라 불리우게 된다. 한나라에서 정치숙청이 발생하자, 노관(연나라 왕)이 흉노로 망명을 하게 되면서 노관의 부하장수였던 연나라 장수 위만이 부여의 해모수 단제에게 망명을 요청하게 되는데 거부를 당하게 된다. 해모수는 소속을 상실한 위만집단을 침략집단이나 도적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모수는 기준에게 절대로 위만의 망명을 허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심성이 착했는지 기준은 위만집단의 망명을 허용했고, 결국 군사반란을 일으킨 위만집단에게 권력을 뺴앗기고 서해를 건너 한반도 마한지역으로 망명을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위만은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칭하고, 기자조선의 관리들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한나라 왕 유철(무제)이 육.수군을 동원하여 위만조선을 공격하게 되는데, 1년간의 전쟁을 통해서도 위만조선을 정벌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바로 위만조선의 구성원인 한민족의 강인한 저력때문이였다. 문제는 위만조선의 내분 떄문인데,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당시 화친파와 강경파와의 대립으로 결국 우거왕이 살해당하고 화친파가 승리하게 되어 국권을 한나라에 내어 주게 된 것이다. 한나라는 한나라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인 관리자들에게 벼슬을 주어 다스리게 한다. 이 때 부여에서 등장한 인물이 동명성왕이라 불리우는 고두막인데, 고두막이 불한지역을 회복하기 위해서 의병 5천명을 모아 요하를 건너 한나라군을 물리치고 고구려 선조의 나라인 고리국까지 회복하게됨으로써 부여의 영웅으로 등극하게 되어 결국 해모수 왕조까지 접수하여 대통령에 즉위하게 되니 동명부여인 것이다. 이 때 해모수 손자되는 해부루는 대통령직을 고두막에게 양위하고 제후가 될 것을 맹세하며 동쪽으로 이주하여 나라를 세우고 양아들로 삼은 금와왕에게 왕위를 양위하니 동부여인 것이다. 금와왕의 아들인 동부여의 대소왕은 훗날 고구려에게 복속을 강요하다 고추모의 손자인 3대 대무신왕에게 정벌당하여 나라가 죽게 되고 나라가 망하게 된다.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전쟁기간에 수 많은 불한의 거수국들은 한반도 마한지역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북한의 대방.낙랑이라는 국호가 이 때 생기는 것이다. 요서지역에서 이주해 온 최숭의 낙랑집단이 낙랑국을 세운 평양에서 출토된 금동유물은 현대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려운 정밀한 나노기술의 수준인데,이것은 나노기술 수준의 단군한국의 청동거울 제조법이 증명하듯이 명백히 단군한국의 과학기술의 산물로 우리 한민족의 유물인 것이지 지나유물이 아닌 것이다. 평양에서 출토된 최씨 낙랑국의 황금유물/섬세한 스키타이 황금문화의 기원이 단군한국임을 입증한다 요서지역에서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이주하여 세운 불한국 유민들의 나라는 나중에 고구려에 통합되는 옥저.예.낙랑..대방.맥 등이다. 낙랑공주는 바로 요서지역에서 이주한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최씨 낙랑국의 공주인 것이지, 한사군 태수의 딸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공주는 태수의 딸이 아니라 왕의 딸에게 부여하는 호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학자라는 자들이 이러한 개념도 없이 마치 낙랑공주가 한나라 태수의 딸인양 인식하고 가르친다면 그 자들은 이미 사학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의 영명하고 용맹한 호동왕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낙랑공주는 결국 고구려의 정벌를 돕게 되고 사랑의 배신에 자결하게 된다. 낙랑공주의 마음을 훔쳐 낙랑정벌에 앞장선 호동왕자도 결국 대무신왕의 왕후에게 음해를 당하자, 명예회복을 위해 자결하고 만다. 어머니가 동부여 공주였던 호동왕자는 왕위 계승자 1순위로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자 했던 왕후의 음해에 걸려 들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아무튼 최씨 낙랑국은 고구려에 정벌당하여 통합되었으나, [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대무신왕 편에 후한의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군현을 설치하여 살수 이남을 차지하게 되니 당시 한국으로 불리우는 마한과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이라면 청천강 이남에서 임진강까지 차지하고 고구려와 군사적으로 대치했다는 반증이다. 당시 후한은 요동반도에 요동군을 설치하고 고구려와 대적하는 부여와 군사적 연합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한 광무제가 바다(발해만)을 건너 낙랑을 쳤다는 기록은 고구려에 나라를 빼앗긴 낙랑국 유민들과의 합세를 의미하는 기록이다. 고구려에 망한 최씨 낙랑국 유민들은 신라로 합류하기도 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후한과 군사적 연합으로 고구려에 저항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치 않고서 후한 광무제가 발해만을 건너 청천강 이남을 차지했다고 기록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고구려에 적대적인 세력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양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낙랑군 인구조사목간 유물은 후한 낙랑군의 유물이지, 한무제 당시 설치했다는 낙랑군의 유물은 절대 아닌 것이다. 평양에서 출토된 낙랑군 인구조사 목간을 가지고 강단사학은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한반도 북한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재야사학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지성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후한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살수이남을 차지했다는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 대무신왕 편 기록내용만 인식해도 풀리는 문제다. 또한 고구려를 기록한 [구당서]에서 고구려 말기 수도성인 북한 평양성을 두고 기록하기를 옛 한나라의 군현이라고 기록한 점이다. 이 떄 한나라는 전한이 아니라 후한의 군현을 의미한다. 따라서 광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지역은 평양이였다는 문헌적 고고학적 사실이 입증되는 것이다. (1)미천왕의 후한 군현(漢郡縣) 공략(攻略) "14년(313) 가을 8월에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구를 사로잡았다." -《삼국사기》권 17, 고구려본기 5, 미천왕 14년 기사
진(晋)이 동북지방에 설치한 행정구역인 평주소속 5군 중에서 창려군과 요동군 등은 4세기 초에 이르러 모용씨에 의해 점령되었고, 그 나머지인 낙랑 대방 현도 등 3군의 성쇠는 그들이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고구려의 세력신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결국 4세기 초에 이르러 평주는 그 존재의의를 상실하게 되었고, 이후 평주고지에서는 모용씨와 고구려간의 쟁탈전이 전개된다.
"요동출신의 장통이 낙랑.대방의 2군을 근거로 하여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서로 싸웠는데 몇 년이 지나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에 왕준이 장통을 설득하여 백성 천여호를 이끌고 모용외에게로 항복하였다. 이에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 -《자치통감》권 88, 진 민제 건흥원년(313) 이 기사는 당시 낙랑과 대방을 장악하고 있던 장통과 미천왕이 상쟁(相爭)하였는데 마침내 장통이 낙랑민을 이끌고 요서지방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모용씨에게로 옮겨 갔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우리는 후한의 낙랑군이 한반도에서 요서지역의 모용씨에게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바로 미천왕 14년에 행해진 낙랑침공이 한반도에 있던 후한의 낙랑군의 공식적인 멸망기사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모용외에 의해 새로이 설치된 낙랑군의 위치에 대하여는 북위대의 낙랑 관련 사료들을 통해 유추해 볼 때 요서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백제를 건국한 태조가 되는 부여왕 위구태의 장인이 되는 요동태수 공손탁의 아들인 공손강이 위나라의 침략 때 요동에서 황해도 이주하여 세우고 왕을 칭한 대방군의 경우에도 낙랑군과 마찬가지로 모용씨에게로 이동하였다고 생각되지만,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이는 313년 장통과 왕준이 모용씨에게 귀속되었을 때, 대방군도 함께 이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3). 그런데《자치통감》을 보면
"6월에 (모용황이) 낭중령 고후를 현도태수로 삼았다. 또한 (모용)황은 대방태수 왕탄을 좌장사로 삼고..."라 하여 대방태수가 모용씨의 휘하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는 모용황이 모용외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단행한 인사조처인데 여기서 대방군이 이미 모용외대에 귀속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대방군이 모용씨에게로 옮겨간 시기는 미천왕 15년(314)부터 대방태수의 이름이 보이는 333년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옮겨진 대방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위의 정광 말에 설치된 낙랑군의 속현 중에 대방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낙랑군에서 가까운 거리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현도군의 모용씨 이동사실은 《자치통감》의 기록에 모용씨의 속료 중에 현도태수라는 직명이 보이고 있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도군이 모용씨에게 편입된 시기에 대하여는 분명한 기록이 없다. 단지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313년 당시 진의 현도태수였던 배무가 죽자 그의 동생 및 아들이 모용외에게 귀부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요동군의 치소인 상평에서는 이미 309년 진의 관리들끼리의 분열로 살육전이 전개되어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이에 모용외가 요동에서의 내분을 수습해 주고, 311년 경에 이르러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서는 미천왕 16년대의 현도성 공략사실이 주목된다. 이 기사는 313년 현도태수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313년 배무가 죽은 이후 진에 의해 후임 현도태수의 임명기록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에 의한 현도군지배는 313년 배무의 죽음과 함께 끝났고 고구려가 이와 같은 현도군의 내부사정을 탐지하고 공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국 현도군은 315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멸망되었고, 그 후에 상평주변에 모용씨에 의한 현도군이 다시 설치된 것이다. 모용씨에 의한 현도군의 설치시기는 구체적으로 상평(평주자사의 처소)에 있던 동이교위 평주자사인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한 직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모용씨가 최비의 도망사건 후 요동지방을 장악하자, 진에서 모용외에게 작위를 제수하여 요동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해 준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한편 요동에 있던 현도군은 광개토태왕대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어 고구려의 영토가 된다. 낙랑, 대방군 고지의 일부지역에는 벽돌을 이용한 지나의 전통적인 무덤양식을 사용하고 있는 세력집단이 존재 하였다. 즉, 이 집단들은 돌무지무덤(積石冢)의 특색을 지닌 고구려나 백제, 그리고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의 신라와 다른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각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중국 각국의 연호를 채용함으로서 서로의 정치적 관련성을 암시하였다. 또한 비록 허구화된 관직이긴 하지만 중국계의 고위관직을 자칭함으로서 주변에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려 하였음을 추정하게 한다. 고구려는 313-314년 두 군현을 멸망시켰으나 곧 이 지역에 대해 직접적인 행정통치를 실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고구려는 이 지역에 세력권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양군지역의 토착집단에 대해서는 직접통치를 감행하지 않고 이들의 기존 사회질서를 완전히 해체하지 않은 채 간접지배의 형태를 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군지역은 4세기 이상이나 중국의 행정적인 지배를 받았으며, 고구려와 역사적 문화적 전통이 달랐고, 기존의 양군사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토착호족 세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이를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는 북중국의 정치상황에 편승하여 능동적으로 요동지방 진출을 수행하였고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양군고지에 대한 지배 통제에는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313년 당시 진의 현도군 태수가 사망하자, 고구려는 현도성을 공격, 점령함으로서 요동지방으로의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또한 고구려는 이후 요동지방에서의 세력 확대를 위해 동이교위 평주자사인 최비와 손을 잡기도 하면서, 요동지방에서 모용씨와의 피나는 투쟁을 전개한다. 이러한 고구려의 내부사정이 양군고지에 대해 힘을 분산시킬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전연의 모용씨와의 이러한 투쟁은 342년에 일어난 모용황의 침략으로 인한 치명적인 타격으로, 고구려는 한동안 요동지방에 대한 진출을 시도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따라, 고국원왕은 요동으로의 진출에 한계를 느끼게 되자 남방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함으로서 방향전환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369년부터 계속되는 고국원왕에 의한 백제침공기사에서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양군고지 진출 또한 이때에 적극적으로 행하여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즉, 369년의 백제와의 접전은 고구려의 양군고지에 대한 진출노력이 어느정도 성과를 본데에 따른 결과인 것이다.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탁의 사위였던 백제건국의 태조 부여왕 위구태의 후손 중에 백제 책계왕은 대방군 태수의 딸 보화를 왕후로 삼았기 때문에 고구려가 차지한 대방땅(황해도)의 영유권을 내세우며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되고 결국 근초고왕 시기에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킴으로써 훗날 광개토태왕의 응징과 장수태왕의 정벌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단군한국을 계승한 백제가 요서를 통한 지나 동해안 지역으로 진출하여 서백제를 확보할 수 있었던 기반도 발해만을 쉽게 건널 수 있는 황해도 확보와 직결된다. 그러나, 서백제 지역은 광개토태왕의 손자인 문자태왕 때 다시 고구려에게 빼앗기게 되고, 백제 동성대왕 때 다시 백제가 회복하게 된다. / 윤복현 참고문헌 한민족 정통사서 [환단고기] 공석구, 《고구려 영역확장사 연구》, 서경문화사, 1998. 김부식(이강래 옮김),《삼국사기》1 2, 한길사, 1998. 공석구, 〈고구려와 모용연의 갈등 그리고 교류〉,《강좌한국고대사》4, 서울: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2003. 배경숙, 〈고구려 전기 전쟁과 왕권강화〉,《한국고대사연구》16, 서경문화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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