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국가 일본을 살리고 싶다...일본인은 결단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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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6 윤*현 조회수 360 | ||||||||||||||||||||||||||||||||||||||||||||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널리 이롭게 하는 홍익 천사들의 지상천국 건설
인류문명과 한민족의 뿌리 해 마한=>일본의 모국=마한 고대 일본의 지배집단인 전방후원분 분포도 마한지역인 한강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고대 일본지배집단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의 기원인 주구묘(마고족의 무덤양식) 고향은 전남 영산강 지역 일본열도는 섬이다. 섬은 고립된 공간이다. 육지에서 도움을 줘야 문명이 발달하는 법이다. 그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일본열도는 한반도 문화가 전파되기 전에는 ... 일본의 뿌리=마고족 DNA
일본에는 현재 수천기의 전방후원분이 남아 있으며 최대는 오사카에 있는 인덕천황릉으로 486m이다.
또 북일 장고분은 도굴로 인한 확인 결과 출토된 고고유물들이 일본의 그것들과 매우 유사함이 밝혀졌다. 함평의 신덕고분에서 출토된 대도와 마구들, 원통형 토기들도 마찬가지다. 원통형 토기 등장은 '일본서기(720년)'에 의하면 수십명을 함께 순장하였는데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천황이 사람으로써는 할 일이 아니라며 대안으로 원통형토기를 만들어 고분주위를 빙 둘러 장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북일 장고분에서도 무덤주위에서 원통형 토기가 발견되었고, 매장시설인 석실에 들어가 본 결과 석벽의 내부가 일본에서와 같이 붉은 칠과 철갑옷편이 발견됐다. 장고분은 한국의 전방후원형 고분 중 가장 큰 것으로 확인됐다.
위기를 느낀 백제는 왜·가야와 동맹관계를 맺어 고구려에 대항한다. 본격적인 대립은 광개토대왕 (재위 391∼413)때 시작되었다. 397년 백제는 태자 전지를 왜에 볼모로 보낸 대신 왜의 군사 지원을 받아 400년에 고구려 5만병과의 전투를 벌인다. 그리고 404년에는 대방(황해도)지역에서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지만 모두 참패하고 만다. 이 무렵 영산강유역에 있었던 침미다례(중국호칭:신미제국) 등도 백제·왜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었음을 '일본서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신공왕후 49년 (369년)기록에 '황전별·녹아별과 사사노위 목라근자(백제장군)와 함께 군사를 보내 신라를 격파한 후 이어서 가야 7국도 평정하고 군사를 서쪽으로 돌아 고계진에 이어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때 백제의 근초고왕과 왕자(근구수왕)가 왔다. 반남(나주)등 4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때 백제 근초고왕은 유명한 '칠지도'를 만들어 372년 왜에 보낸다. 또 신공 50년(370년)에 천태장언·구저(백제인) 등이 백제에서 돌아 왔을 때, '바다의 서쪽 제한(諸韓)을 그대의 나라에 주었다.' 이외에도 응신천황 8년(397년) 3월, 백제왕자 전지가 볼모로 왔을 때 백제인이 말하기를 '아화왕(백제)이 무례하여 침미다례 등을 왜에 뺐겼다. 이 때문에 왕자 전지를 보낸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해남을 포함한 침미다례를 왜가 점령하고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에 이어 장수왕(재위 413~491)은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하고 남진정책을 강화한다.
이 당시 왜도 외교관계를 활발히 전개한다. 왜는 중국(동진·송·제·양)에 12차례나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받치고 책봉을 요구하는 등 당시 주변정세가 매우 긴박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 '송서(宋書 487~488년 편찬)' 기록에 의하면 왜는 451년 송(宋)에 조공하고 책봉을 요구하였는데 그 관할 국가가 왜와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마한), 백제 등 7국이었다. 이에 송(宋)은 백제를 제외한 '6국을 제군사 안동장군왜국왕'으로 임명한다.
또 중국의 사서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후한서'에는 "마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가 한계이고 남으로는 왜와 접해(南與倭接) 있다." 는 기록의 근거로 '왜(倭)'가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영산강일대 전방후원형 고분이 분포한 곳과 일치하고 있어 주목이 된다. 하지만 언급된 사서의 편찬연대가 3C 후반이기 때문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당시 백제와 왜간의 밀착된 교류이다. 그 일례로 5~6C 백제의 왕 중 전지왕(재위 405~419)과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은 왜국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왕들이다. 무령왕의 경우 원래 이름은 '사마'인데 현 일본말 '시마'의 고어로 우리말 '섬(島)'이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개로왕은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곤지는 형수와 함께 배에 올랐다. 그리고 형수는 항해 중 큐슈의 '각라도'라는 작은 섬에서 아기를 낳았다. 따라서 이름을 '사마'라 부르게 되었고 왜국에서 성장한 후 백제로 돌아와 무령왕이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백제와 왜(해=열도로 이주한 마한)의 관계는 선진문화를 건네고 군사적 도움을 받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일본 천황가의 뿌리까지도 백제에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활발한 교류는 뱃길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 뱃길에서 중요한 중간 기착지가 바로 해남의 북일지역이었다는 점이다. 북일지역의 고분군들은 대고구려 전쟁 시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왜 병력들의 후방전초기지 중의 한곳이었음 추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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