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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책의 이것이 정치다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진행하는고품격 시사 토크쇼 시즌 2
정치권의 정쟁 정략에서 벗어나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을 분석하는
살아있는 정치 비평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전원책의 이것이정치다 - 시청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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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황족이 고려여인들에게 환장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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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9 윤*현 조회수 427



고구려의 후예들로서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한



몽골황족이 고려여인들을



부인으로 삼고자한 이유는?




태무진을 잘 교육하여


잘 키워낸 징기스한 어머니가


고구려족이고, 징기스한


부인이 고구려 계승국


발해 유민의 공주였기


때문에 몽골황족은 일찌기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고려의 국권을 유지해 주면서


고려 여인들을 황족의


부인이나 몽골귀족의

 

부인으로  몽골황족의


혈통을 잇고자 하였다!



몽골황제 순제가 고려여인


기황후를  유독 사랑한


이유가 될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 징기스한께서도


고려여인을 사랑했다하면서






[자료]고려와 몽고리(몽골)의 관계

 

옆 지도그림은 세계적인 대제국 몽골제국의 직할령을 표시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습 회사의 그림을 알기 쉽게 우리말로 재구성한 그림이다.

 
 
아마 이 그림은 항상 보아오던 지도다. 무심코 지나쳐서 이 지도의 본질을 못 봤을 수도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세계 모든 나라가 몽골의 깃발 아래에 있는데 유독 고려(高麗)만이 남아 있다. 세상은 오직 몽골과 고려만이 있는 듯하다.

 

이 문제에 관해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가? 일본과 베트남·인디아는 정벌하기가 힘들어서 못했겠지만 몽골 제국의 수도(首都) 바로 옆에 있는 땅을 직할령(직속령)으로 두지 않고 자치국으로 두었으니 이상하지 않는가?




 

왜 바로 자기의 수도 코앞에 있는 나라를 세계를 제패했던 무력을 가진 원나라가 그대로 두었을까? 이제 그 의문을 한번 풀어 본다.



역사를 꼼꼼히 보면, 세계를 무력으로 짓밟은 원나라가 고려와의 관계 속에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이 많았다. 몽골이 전쟁을 거쳐 정복한 나라를 부마국(駙馬國)으로 삼은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몽골의 통치자들은 사신을 죽이거나 자기들에게 대항한 군주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복하는데 고려처럼 부마국으로 삼고 국체(國體)를 유지시켜준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다.

구체적으로 그 일부를 보면, 1224년 원나라는 저고여(扎古雅) 등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도중에 그만 살해되고 만다. 그 후 원나라 태종 3년(1231) 살리타이(薩里台, 또는 撒禮塔)에게 명하여 고려를 정벌하게 한다. 그러나 고려 고종이 동생을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자 그대로 받아들인다(『元史』208 高麗傳). 같은 경우가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을 때는 초토화(焦土化)시킨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원나라 황제의 사신을 죽인다는 것은 바로 그 나라가 그 시간 이후 잿더미가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살됨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몽골은 항복하면 평화롭게 받아주지만 반항하거나 대항하면 철저히 보복하고 응징하는 특성을 가진 나라). 이 부분을 현재 한국의 고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례적으로 다루고 있다. 




"고려는 오랜 항쟁 결과 원에 정복당했거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고려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 맞는 것으로 바뀌었다[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5) 88쪽]." 



몽골이 고려에 대한 매우 강한 동질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원나라 조정은 역대 고려왕에게 공주를 출가시켜 원나라 황실과의 혈통적인 결합을 추구했던 것이다.뿐만 아니라 원나라 세조는 당시 만주쥬신(여진)들이 고려 땅을 침범하는 일이 있자 이를 엄금하도록 조치하고 관(官)으로 하여금 고려 국민을 보호하게 하고 파사부(婆娑府)에 명하여 군대를 둔전하게 하여 압록강 서부지역을 지키게 한다(乙未, 禁女直侵軼高麗國民, 其使臣往還, 官爲護送. 命婆娑府屯田軍移駐鴨綠江之西, 以防海道 :『元史』卷6 本紀第6 世祖).



[원사]에는 고려(高麗)에 대한 기록이 유난히 많다. 중국의 다른 어떤 사서보다도 고려에 대한 기록이 많다. 원나라는 마치 고려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와는 국교(國交)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원사(元史)』에는 신년 새해부터 고려에 대한 기사가 줄줄이 엮어져 있다. 그리고 고려와 관련해서는 조유(詔諭 : 황제가 친히 타일러 말하다), 위무(慰撫 : 위로하여 달래다), 조사(詔賜 : 황제가 친히 내리다) 등의 말들이 따라 다닌다. 그리고 고려왕이 내조하면 원나라 황제는 우조답지(優詔答之 : 황제가 친히 넉넉하게 이에 보답함)한다. 


 

▲ 중국을 통치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칸)

원사』의 세조기(世祖紀)에서는 고려왕이 황제를 속인 죄를 범하여 이를 책망하지만 달력을 보내 주었고(詔責高麗欺慢之罪 又詔賜高麗王□曆), 고려왕이 황제의 조서에 대해 답이 없자 사신을 보내어 이를 나무라는(以高麗不答詔書, 詰其使者) 장면들이 나온다. 원나라의 세조는 고려의 군신들이 내조하자 "고려와 원나라는 군신의 관계라 할지라도 짐이 느끼는 기쁨은 아버지와 아들과 같다(高麗君臣, 感戴來朝, 義雖君臣, 而歡若父子)."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조는 중국과 친한 일본으로부터 고려를 떼어 내도록 하는데 만전을 기울린다. 마치 고려가 딴 곳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지를 시새움하는 듯하다. 전 세계인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세계의 주인 원나라의 모습으로 보기는 어려운 광경들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원나라 세조는 고려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고려왕이 아프다는 말을 듣자 직접 약을 보내기도 한다(高麗使還, 以王□病, 詔和藥賜之 : 『元史』卷6 本紀第6 世祖三). 뿐만 아니라 고려의 술에 대해서 이례적으로 세금을 면해주기도 한다(免高麗酒課 :『元史』卷6 本紀第6 世祖).



동아시아의 역사상 (고구려 이후) 원나라 때만큼 고려가 요동에서 활개를 친 예는 없었을 것이다. 심양왕(瀋陽王) 제도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지나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원사』를 보면 세상엔 몽골과 고려라는 단 두 나라만 존재하는 듯 하다. 마치 『일본서기(日本書紀)』가 부여(백제)사의 다른 한 편이라면 원사(元史)』는 고려사의 다른 한편으로 볼 수 있을 정도다. 시시콜콜한 고려의 내외 이야기들이 대부분 수록되어 있다.몽골과 고려의 관계는 마치 남녀간의 사랑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몽골은 지속적으로 애정표현을 하려고 하고 고려는 피하는 관계라고나 할까? 몽골은 한족(漢族)과 가까운 것은 다 싫어하는데 유독 고려(高麗)만이 예외였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원사(元史)』에 보면 "천하를 가진 자 가운데 한(漢)나라·수(隋)나라·당나라·송나라 등이 강성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원나라에 미치지는 못한다. 한나라는 북적(北狄)에게 시달렸고 수나라는 동이(東夷)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당나라는 서융(西戎)으로 인하여 환란을 겪었고 송나라의 걱정은 항상 서북(西北)에 있었다. 그러나 원나라는 삭막(朔漠)에서 일어나 서역을 병합하고 서하(西夏)를 평정하였다. 여진을 멸하고 고려를 신속(臣屬)시켰고 남송을 평정하여 천하가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 고려는 동번(東藩)이 되어 신하의 예를 공손하게 취하니 이전에는 볼 수가 없었던 일이다(『元史』57 地理志)."그리고 1270년 고려의 원종이 원나라에 내조(來朝)했을 때, 원나라 황제는 "경(卿)은 내조를 늦게 했으니 제왕(諸王 : 칭기즈칸의 종친)들보다 반열(班列)이 낮게 되었다. 경은 이런 점을 이해해야 한다(『元史』7 世祖紀)."라고 한다. 즉 조금이라도 일찍 원나라에 내조(來朝)를 했다면 원나라 종친들보다도 더 높거나 같은 지위를 줄 수 있는데 안타깝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거의 천년 동안 몽골의 나쁜 점만 들추어내어 가르쳐 왔다. 몽골에 대해 공식적으로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하면 '야만족'과 같은 놈이라고 매도당해 왔다. 새끼 중국인들이 천년 이상을 한국에서 권력을 잡았다는 얘긴가? 한국의 새끼중국인들은 고려가 몽골의 속국(屬國)인 점만 강조한다. 이런 점을 천년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비판 없이 지내왔다는 것이 절망스러운 일이다.한족(漢族)과 중국(中國)을 찬양하면 그것은 학문이고, 그 이외의 것을 제대로 보려면 모두 오랑캐로 매도하는. 그러니 쥬신(한국)의 역사가 수천 년 동안 감춰질 수 밖다. 그래서 한반도.일본.만주.유라시아.중국을 국경개념없이 한국의 광역으로, 한국의 역사공간으로 하나로 생각해야 핏줄이 생겨 역사의 피가 흐를 수 있다. 만주와 몽골까지는 말로 달리면 1주일이다. 고대.중세에는 거리는 그렇게 큰 장애가 아니다.
 
문제는 단절된 개념으로, 국경선 개념으로 인식하니 문제다. 몽골은 남북한이 한 가족이듯이 우리와 한 가족이다. 터키도 마찬가지다. 만나야 한다. 도움을 주고 받아야 한다. 역사전개과정에서 상처가 있었다면 손을 내밀어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통하여 껴 안야 한다. 그것을 가해자들이 못하니 이별하고 상처가 누적되어 손을 잡을 수도 안을 수도 도움을 주고 받기도 힘든 것이다. 한국의 광역과 무대는 한반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전역이며 온 누리다. 그렇다면 좁다란 마음의 그릇과 사고반경가지고 되겠는가! 한국인이라면 온누리를 나는 삼족오처럼 모두가 통 큰 사람들, 대인들이 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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