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진행하는고품격 시사 토크쇼 시즌 2
정치권의 정쟁 정략에서 벗어나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을 분석하는
살아있는 정치 비평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일본과 지나국은 힘으로 대해서는 아니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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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6 윤*현 조회수 154 |
고대부터 한국은 한류문명의 모국
기원전 6000년(사해, 흥륭와문화)부터 시작된 동이족이 홍산문화(기원전 4500~3000년)를 거쳐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 2000~1500년, 즉 고조선 시기)를 이뤘고, 상투를 튼 한민족인 홍산인들이 남하하여 세운 상나라의 시조 설과 그의 손자 상토, 그리고 7대 왕해와 8대 상갑미를 거치면서 중국 중원으로 이동하여 급기야 기원전 1600년 무렵 하나라를 대파하고 천하를 통일했다는 설명이 된다.
단군한국의 상징인 비파청동검 분포도/지나문명의 뿌리는 단군한국
오로지 한민족 정통사서인
[환단고기]를 기본적 사료로
일본과 지나국의 뿌리를 바로
알려 주는 고대사의 진실로
군사패권과 침탈의 기운을
노르는 것이다! 물론 국방력과
경제력을 높이는 것을 전제로!
우주의 강한 기운은 진실의 힘에
있기 때문이다! 고대사의 진실을
통해서 일본은 한반도에서 나왔고
지나국은 단군한국 문명의 젖을
먹고 자란 나라였음을 문헌과
고고학적으로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것이 지구촌 정신문명을 선도해온
한민족의 방법이다!
열도전역에 분포된 전방후원분 양식은 영산강지역 사람들이 이주하여 만든 무덤양식으로 호남을 중심으로 서남해 지역의 토착무덤
교토시립예대 우메하라 타케시 교수는 “니니기노미코토(일본 역사 신화의 일본 개국신/필자 주)가 이끄는 천손족(天孫族)이 한반도에서 건너와 큐슈 남부에 상륙했다. 벼농사 기술을 가진 이 집단은 차츰 그 세력을 사이토바르(石原)에 까지 펼쳤다”(2002)며영산강 유역의 마한인이 북큐슈로 상륙한 일본 정복의 ‘신화 민족’이라 말한다. “이 사이토바르 유적지 고분군에서는 선박 모형(길이 101cm)의 ‘하니와’(왕릉 등 큰 무덤 매장자의 사후 호위를 위해 찰흙으로 구워 만든 부장품)가 발굴되었다(도쿄대 오오바야시 타료 교수, 1986).” 10여명이 탈 수 있는 형태의 이 선박의 원형은 마한 등 일찍부터 조선술이 발달한 영산강 일대에서 바다를 왕래했다. 일본에서는 4백 년 후인7세기에도 조선술이 크게 뒤져 당나라로 공부하려 가는 승려 등이 배편을 구할 수 없었다.
7세기 일본에서는 사신과 학승을 신라와 당나라로 보낼 때 ‘신라배’의 신세를 져야 했다. “서기 622년에 신라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학생이며 학승이 야마토 조정에다 보고하기를 <지금 당나라에 체류중인 일본 학승과 학생들은 모두 공부가 끝나서 빨리 귀국할 수 있도록 마중하여 달라고들 합니다>라고 진언했다. 당나라로부터 돌아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신라의 당나라 사신이 타고 오는 배를 얻어 탔다”(큐슈대의 다무라 엔쵸 교수, 1989).
야요이 시대 북큐슈 등 서(西)일본에서는 주로 마한 등 남한 도래인들이 정착해 선주민들과 혼혈을 이루었다. “서일본의 야요이 전기의 인골에는 키가 작은 죠몬인과 평균 신장 163cm의 키가 큰 남성 인골이 있다. 한국 남부로부터 건너 온 도래인의 피를 받아서 비로소 야요이인이 생겼다고 본다”(靑木美智男外, 1993). 키가 작고 왜소한 선주민인 죠몬인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벼농사와 철기문화를 가진 키가 큰 마한인 등이 건너 가서 야요이 문화를 일으켰다.
농사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몸이 크고 키가 큰 한국인이, 키가 작은 선주민들을 지배하며 부락을 이루고 부락의 수장(首長)들은 이웃 지역 수장들과 손잡고 야요이 문화를 이끌었다. 수장들이 죽으면 마한에서처럼 장엄한 장례식을 거행하고 시신을 항아리 속에 넣어 고인돌에다 장사 지냈다. 항아리를 묻은 묘지를 일컬어 옹관묘(甕棺墓)라고 부른다. 관 속에는 구리거울(銅鏡)이며 구리칼(銅劍) 등을 함께 넣었다. 옹관 대신 돌로 만든 석관도 썼다. 석관은 돌로 만든 지석묘 밑에 모셨다. 북큐슈에서는 그와 같은 옹관묘며 지석묘가 많이 발견되었다. 고인돌이 많은 영산강 일대의 고대 마한은 일본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죠몬, 야요이 문화는 즉 북큐슈에서 세도 내해를 거쳐 일본 서부 지역으로 널리 퍼져 오늘의 오사카는 물론 나라, 쿄우토 등으로 빠르게 퍼져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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