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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진행하는고품격 시사 토크쇼 시즌 2
정치권의 정쟁 정략에서 벗어나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을 분석하는
살아있는 정치 비평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한민족통합의 정신적 구심 단군왕검 천왕의 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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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3 윤*현 조회수 208 | |||||||||||||||||
경천애인=한민족 정신
통일 한민족 태극기=3신1체 하나님 상징하는 한민족 원형정신 무궁화로 상징화되는 오직 양심 하나님만이 우리의 반석과 승리자
탐욕의 노예된 자들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니 헛되고 헛되도다!
고구려 국조-봉황-대한민국 권력 상징 봉황은 예시된 동방의인을 상징한다
[한민족 역사정신 교육자료]한민족 통합의 정신적 구심 단군왕검 천왕의 한국
한민족 고대사의 진실과 한민족 정신을 바로 세우는 한민족 정통사서<환단고기>을 중심으로 고고학적 내용과 함께 단군조선을 기술해 보았습니다.
황하 이남은 단군한국의 신하였던 유호의 아들인 유순(순임금)이 번한국을 다스린 번한의 관리감독을 받는 조건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것이 하-은-주로 발전하는 중국의 시작이다. 그런데 지나국은 은혜를 망각하고 배은망덕하게 현재 자신의 영토라하여 한민족 고대사를 날조 왜곡하고, 고구려성을 진니라시대 성으로 바꾸고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 발해의 황성을 당나라 구조로 날조하며, 상투를 틀고 옥을 중시한 한민족의 요하 홍산문명을 지나문명이라고 날조하고 있다. 참고로 옥을 중시한 은나라는 홍산인들이 남하하여 지나 중원에 세운 한민족 나라다. 공산지나국은 한류가 불어 넣고 있는 자유민주화 바람으로 분열하게 될 것이며, 분열시기에 상실한 한민족 고토 만주는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동방의인(윤:다스리다.바로잡다.조화롭게 하다)
1. 단군한국의 건국 단군왕검 천왕은 천손족(天孫族)인 배달국의 거불단 한웅(18대 한웅, 일명 단웅)과 지손족(地孫族)인 웅족(熊族)의 여인이었으나, 깨달음을 얻어 천손(天孫)이 되신 웅녀 공주 사이에서 신묘년(B.C. 2,370) 5월 2일 인시(寅時), 박달나무 밑에서 태어나셨다. 단군왕검은 어려서부터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14세 되던 갑진년(B.C. 2357)에 외할아버지인 웅족의 왕은 그의 신성함을 알아보고 비왕(裨王 : 왕을 보좌하는 부왕)으로 삼았다. (2) 단군한국(국호변경:조선=>대부여)의 건국 개천(開天) 1565년(무진(戊辰)년, B.C. 2333) 상월(上月 : 음력 10월) 3일에 이르러, 신인(神人) 왕검이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에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잡고,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려 단군조선이 시작되었다. 단군왕검께서는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으며,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라와 백성을 다스렸다. 구한(九桓)의 백성들은 모두 그를 마음으로부터 따랐고, 단군왕검을 천제(天帝)의 화신이라 여겼다. 단군왕검은 신시(神市)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이름했으며, 비왕의 자리에 24년, 제위에 93년 있고 130세까지 사셨다.
단군왕검 천왕께서 개국하실 때 모든 백성들에게 내린 가르침의 말씀이 있었는데, 이를 단군칙어(檀君勅語)라 한다. ① 너희는 지극히 거룩한 한얼님의 자녀됨을 알아라. ② 너희는 영원토록 자손이 계승할 때에 터럭만한 것이라도 다침이 없고 이즈러짐 없어라. ③ 너희는 한겨레로 일체가 되어 의좋고 정답게 서로 손을 잡고 같이 살아라. ④ 너희는 조심하라, 조심하라. 내 땀방울이 적시우고, 내 피가 물들인 강토에 혹여나 더러운 때 묻힐세라. ⑤ 너희는 네가 해야할 일은 너희 손으로만 하게 하라. 그리하여 각기 너희 할 직분을 지켜라. 너희 할 책임을 견디라. ⑥ 네가 가질 것은 남에게 주지 말고, 네가 할 일을 남이 하지 말게 하라. ⑦ 너희는 이 나라 기슭, 한군데도 빠짐없이 하늘 은혜와 땅의 이익을 두루 받았음을 알라. 고로 너희 것으로 삼아 쓸대로 써서 너희 생활이 항상 풍족 하라. 넉넉하거라. ⑧ 너희는 내가 오늘 훈칙한 이 알림이 할 일로써, 천하만민에게 고루 알리어 주거라. ☞ 단군왕검 천왕의 칙어가 전해진 내력 - 단군칙어가 세상에 전해지게 된 것은 대진국, 즉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덕분이다. 대야발은 왕으로부터 단기고사(檀記古史)를 편찬하라는 명을 받고, 민족의 광범위한 이동과 함께 사해(四海)에 널리 퍼져있는 모든 고적을 직접 답사하였다. 잃어버린 역사를 바로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그는 각지의 사서와 석실, 장서, 고비(古碑)와 많은 사람들의 사평(史評)을 참고하고, 먼 나라(오늘날의 터어키)까지 2번이나 돌아보며 검증하였다. 단군칙어는 그 후 삼십 년만에 편찬된 단기고사에 전해지는 단군왕검의 가르침이다. 2. 단군조선의 발전
첫 민족국가로써 신선의 나라를 세운 왕검께서는 정신적 상징으로 강화도 마니산 정상(혈구(穴口), 삼랑성(三郞城 : 강화도 길성면에 있는 고성)에 참성단(塹城壇)이라는 제천단(祭天壇)을 쌓게 했다. (B.C.2283 무오51년) 그리고 나라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나 5월 단호제와 10월 상달제 때, 하늘에 제사를 지내 민족의 근본에 보답하였다. 이때는 제천권을 가진 천자(天子)였던 역대 단군들이 천제를 주관했다. (2) 체제 단군은 정치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요, 종교적으로는 최고 지도자요, 교육적으로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큰 스승이었다. 그러므로 단군은 신정(神政)을 베풀어 선계(仙界)를 지향하였으며, 동시에 지상에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그 목적에 적합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단군조선의 통치체제는 1단군(檀君), 3한(韓), 5가(加), 64족(族), 3사(師), 6사(事)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다. 3한(韓)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이며, 광대한 땅을 셋으로 나누어 진한은 단군의 직할통치 지역이었고, 나머지 마한, 번한은 비왕들을 두어 간접 통치했다. 22대 색불루단제 이후에 막조선, 진조선, 번조선의 삼조선(三朝鮮)으로 개편되었다. 5가(加)는 우가(牛加), 마가(馬加), 저가( 加), 구가(狗加), 양가(羊加)이며, 64족은 단군조선을 이루고 있는 부족이다. 3사6사(三師六事) 제도는 배달국 이래로 이어져온 중앙행정체제로 3사(師)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말하고, 6사(事)는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형(主刑), 주병(主病), 주선악(主善惡), 주병(主兵)을 말한다. 중대한 국사(國事)에 대한 의결기관으로는 3한(韓) 5가(加)로 구성되는 화백회의(和白會議)가 있었는데, 한국 배달국 이래의 전통이었다. (3) 경제 및 산업 단군조선의 경제적 기초는 농업이었으며 그밖에 유목, 사냥, 고기잡이, 채집이 병행되었다. 토지제도는 균전제(均田制)를 채택하였으며, 세율은 매우 낮아 8대 우서한 단제 무신원년(B.C. 1993년)에는 1/20 세법(二十稅一之法)을 채택하였으며, 15대 대음(代音)단제 경진원년(B.C. 1661년)에는 1/80 세제(八十稅一之制)를 채택하였다. 단군조선에는 교환경제가 발달하였으며, 교환의 기준을 위한 도량형 즉 쌀되와 저울 등을 이미 통일하였고, 패전. 패엽전. 자모전. 공방전 등 화폐의 개발이 이루어졌다. 또 이 시대에는 이미 산업이 발달하여 11대 도해단제 때는 공창(工廠)을 건설하여 종이, 베, 선박 등을 생산하였다. 또 농업국가의 기본인 치산치수(治山治水)에 성공하여 단군왕검의 장자인 2대 부루단제 3년(B.C. 2238년)에는 치산치수 사업의 지식을 그 무렵에 9년 동안의 홍수로 고생하고 있는 하(夏)나라의 우(禹)에게 팽오로 하여금 치수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다. 단군조선은 고도의 정신문화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아주 풍요로웠던 나라였다. ▶ 단군조선 경제발전의 기록 ① 2대 부루단제 3년(B.C. 2238년) 쌀되와 저울 등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베와 모시의 가격이 다른 곳이 없고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았다. ② 4대 오사구단제 무진5년(B.C. 2133년) 패전(貝錢, 원공패전(圓孔貝錢) : 둥근 구멍이 뜷린 조개 모양의 돈)을, 14대 고불단제 42년(B.C. 1680년)에는 자모전(子母錢)을, 19대 구모소단제 10년(B.C. 1426년)에는 패엽전(貝葉錢)을, 37대 마물단제 5년(B.C. 642년)에는 방공전(方孔錢) 등 화폐를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 단군조선의 발명품과 만국박람회 11대 도해단제 56년(B.C. 1836년)에는 송화강 연안에 기계공창을 설치하여 각종 기계를 제조하였고, 새로운 기계발명상을 받은 발명품이 나왔다.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자행륜거(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뢰차(自發雷車), 조담경(照膽鏡), 천문경(天文鏡), 자명종(自鳴鐘),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물건들이 발명되었다고 한다. 또 도해단제 38년에는 수도인 평양에서 만국박람회를 크게 개최하여, 여러 나라의 진기한 물품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와서 산더미같이 진열되었다. 또 한국시대의 12한국을 통해서 세계각지로 이동한 9한족(九桓族)들과 수메르국, 아유타국 등 혈연을 같이하고, 문명의 교화를 받아온 수많은 제후국들이 모여 만국박람회를 열었다. "14대 고불단제 56년(B.C. 1666년)에는 호구(戶口)를 조사하였는데 단군조선의 인구는 총 1억 8천만 구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① 가림토 문자 단군조선시대에는 선대인 배달국으로부터 계속 사용해온 진서(眞書), 즉 녹도문자가 있었다. 그러나 텔레파시와 같은 고도의 의사전달 방법을 깨우치지 못했으며, 배움이 부족한 일반 백성들이 녹도문을 사용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또 음문자이며 만물을 형상화한 뜻글자인 녹도문만으로는 완전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조선의 문자인 가림토(加臨多) 문자가 탄생하게 되며, 가림토 문자(38자)를 토대로 더 쉽게 정리하여 4177년 뒤 재창조된 것이 바로 훈민정음(28자)이다.
② 가림토 문자는 훈민정음의 원형
▶ 가림토 문자 창제동기
▶ 훈민정음 재창제의 증거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일본에는 한글을 닮은 고문자가 있다. 대마도의 아히루 가문에서 전해져왔기 때문에 아히루 문자라고 하며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라고 한다.
인도의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이는 문자는 우리의 한글과 흡사한데 자음은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ㄴㄷㅌㅇㅁㅈㅂ 그리고 ㅏㅑㅓㅕㅗㅛㅡㅣ등) 이 지역은 배달국 시대 우리 민족이 인도로 이동해가서 세운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의 후예가 사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자라트인들이 사용하는 타밀어에 문자뿐 아니라 발음과 뜻이 비슷한 단어들(나-난/너-니/엄마-엄마/아빠-아빠/보다-봐/날-날/오다-와/나라-나르/너 이리와-니 잉게와 등)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산스크리스트어 알파벳은 우리가 국민학교 때 배운 한글과 너무나 흡사하고 (찌커거.., 쪄쳐져..., 떠터더..., 뻐퍼버..., 셔허), 우리 한글처럼 "ㄱ"에서 시작해 "g"으로 끝난다.
가림토 문자에는 X O M P H I 등 알파벳의 자모도 여러 개 보인다. 가림토 문자가 4177년 전에 만들어진 반면, 알파벳의 역사는 겨우 3000년을 넘지 못한다. 제후국의 왕 또는 어떤 지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인 한(汗)은 하늘을 뜻하는 글자인 한(桓)에서 나온 이름이다. 즉 한(桓)에서 한(韓), 한(漢), 한(汗)이 나온 것이다. 또 한(汗 : HAN)이 몽고로 건너가 칸(KAN : 징기스칸)이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서구로 건너가 킹(KING)이 되었으며, 그후에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하버드대학에서의 연구결과로도 발표된 바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우리말과 우리의 고문자는 한단시대의 영역을 통해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독특한 환경과 조건들에 따라 변화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5) 문화와 교육
13대 흘달단제 20년(B.C. 1763년)부터 시행된 신라 화랑제도의 기원으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던 미혼의 자제들을 말한다. 국자랑이 출행할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 (天地花 : 무궁화)를 꽂았기 때문에 천지화랑이라고도 했으며, 화랑들의 총사령관을 국선(國仙)이라 했다. 천지화랑은 후대 고구려의 조의선인이나 신라의 화랑도로 이어졌다. 여자낭도를 원화(源花)라 했고, 남자를 화랑(花郞)이라 했으며,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받은 이를 천왕랑(天王郞)이라고 했다. 이들은 신선도의 오상(五常)을 지켰는데 충(忠) 효(孝) 신(信) 용(勇) 인(仁)의 오상(五常)으로 신라 때 원광법사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진 세속오계의 원형이다. ▶ 경당 단군왕검 제위시절 2대 부루단군이 아직 태자였을 때 태자의 명으로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지냈다. 결혼하지 않는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의 기예를 익히며 심신을 수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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