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성전인 양심에 복종하는 완전한 신적 존재(신인)가 아닌 이상
북한처럼 일가세습독재유지를 위한 폭정의 거지국가로 전락한다
개인 우상화 신격화 독재의 공산주의는 거의 70년을 넘지 못했다
소련이 만들어 준 북괴 경우 올해로 69년째! 곧 소멸된다는 의미
입력 : 2017.01.14 07:47
[발굴: 탈북민이 증언한 숙청 연안파의 최후]
광복 후 연안파가 여타 계파들과 더불어 요직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아직 20~40대의 젊은 나이였다. 혁명의 세기, 세계전쟁의 한가운데서 사적인 삶을 포기하고 조국 해방과 공산혁명을 위해 싸웠지만,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고 저항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이들이 바란 것은 타 공산권 국가처럼 ‘집단지도체제’의 실현이었다.
9만명 숙청, 허무하게 끝난 이상
반당종파 사건 때 숙청된 인물들은 연안파의 리더 최창익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김일성과 맞선 전력들이 있다. 예컨대 직업총동맹위원장을 지낸 서휘는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 자주성과 파업권을 가져야 한다고 발언했다. 상업상을 지낸 윤공흠은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했다. 윤공흠은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1962년 강제송환됐다는 주장이 제기된 인물이다. 육군대학 총장을 지낸 김을규는 인민군 전통이 빨치산이 아니라 농민운동에서 계승돼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부수상을 지낸 소련파 박의완은 소련 주재 북한대사 리상조가 쓴 개인숭배를 배격하는 내용의 편지를 당에 전달했다가 김일성의 미움을 샀다. 이밖에 조선독립동맹 부주석 출신이자 당 중앙위원이었던 한빈, 황해남도당 위원장을 지낸 고봉기, 인민군 5군단장을 지낸 방호산, 자강도인민위원장을 지낸 박창식 등이 이런저런 이유로 반당종파 분자로 몰렸다.
반당종파 분자들에 대한 실제적인 숙청은 1956년 바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김일성이 최창익과 박창옥(소련파)을 포함한 관련자들의 처분을 제안해 당이 채택하긴 했으나 중국과 소련이 개입해 이들의 원상복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한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오래가진 않았다.
다음해 7월부터 대대적인 체포가 벌어졌다. 지방으로 좌천돼 있다 ‘인민의 적’으로 몰려 체포된 최창익과 박창옥을 비롯해 연안파가 모두 투옥됐다. 소련파는 50여명이 처형되거나 강제실종됐고 약 250여명이 소련으로 도망갔다. 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에 의하면, 이들에게는 당내 투쟁, 즉 상호비판을 통한 권력 쟁취는 불가능했고, 폭력적 변혁(무력 동원)이 필요했지만 군부에 세력이 부족했고 중공이나 소련의 협력을 이끌어내지도 못했다.
조선의용대 대장 시절의 김원봉. 이 흑백 필름은 국민당 정부에서 조선의용대를 선전하기 위해 만 든 기록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광복 후 부산에서 ‘조선의용대’라는 이름으로 극장 상영됐다. /주간조선
그렇다면 북한 최초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연안파는 어떤 이들이었을까. 이들에 대한 체포 및 심문은 1957년 7월부터 시작됐고 1960년 초에 재판이 열렸으나 그 이전부터 중국 및 소련으로 망명하거나 병사, 옥사한 인물들도 다수 있었다.
우선 연안파 원로 김두봉은 국문학자로 광복 당시 이미 56세였다. 그는 강원도의 한 협동농장에서 재판이 열리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므로 북창군 통제구역에 수감됐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반당종파 사건의 주모자이자 연안파 리더인 최창익은 젊은 청년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다. 와세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최창익은 권위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가로 꼽혔다. 부수상까지 오른 그는 김일성의 측근인 박정애(베라 최), 박금철, 정일룡 등이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협력했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김일성에게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었다. 그는 또 중공업 치중을 비판하고 경제계획을 개편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최창익의 아내 허정숙은 일제강점기 ‘민족변호사’로 이름이 높았던 허헌의 딸이다. 허헌은 독립운동가와 노동자를 무료 변론했고, 신간회 간부로도 활동했다. 허정숙은 연안파 중 유일하게 숙청을 면했는데, 부부가 광복 직후 이혼을 했기 때문이지만 허헌의 딸이라는 이유도 컸다고 한다. 허정숙은 그 후 당 비서까지 올랐고 1991년 사망하자 북한 정권이 국장으로 예우할 정도였다. 반면 최창익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먼 친척까지 모두 수용소로 보내질 정도로 극심하게 보복당했다. 그의 최후는 베일에 싸여 있으나 재판 당시 사형을 선고받았으므로 북창군 통제구역에 보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널리 알려진 연안파 거물 중 한 명인 무정은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겸 팔로군 포병연대 사령관을 지냈다. 대부분의 한인 공산주의자가 훗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되는 류사오치(劉少奇) 계열의 대도시 공작자인 반면, 무정은 일찍부터 중국 남부로 내려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펑더화이(彭德懷) 등 중공 핵심그룹에 합류해 농촌 지역의 소비에트운동에 참여했다. 무정은 또 대장정에 참여한 10여명의 한인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유격대로 시작한 홍군이 연안에서 첫 창설한 포병대 사령관 겸 포병학교 교장에 임명되면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김일성에겐 열등감과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무정은 1951년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제거됐다.
연안파는 아니지만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로 김원봉이 있다. 김원봉은 1919년 지린(吉林)에서 결성된 의열단 의백이자, 좌우 연합의 상징인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의용대 대장 등을 지냈다. 좌우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항일 경력을 가졌다. 그는 코민테른이나 중공과 연계를 갖고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국제주의자가 아니었고 계급보다 민족에 더 우위를 둔 민족주의자였다.
그간 김원봉은 연안파 몰락 때 함께 퇴출됐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정창현 소장은 소련의 평양 대사를 지낸 프자노프의 ‘일지’(1958년 10월 24일) 중 “김달현은 미국인들과 연결돼 있고 최근 체포 직전에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한 전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현재 체포돼 있음)과 교류했다”를 인용해 그의 해임 및 체포가 청우당 당수 김달현의 간첩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봤다. 정 소장은 같은 일지에서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 등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를 물어, 대의원 권한을 박탈한다는 정령을 비준하였다”(1958년 10월 1일)는 대목을 들어 “러시아 측 문서를 통해 김원봉에게 적용된 ‘죄목’이 처음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간 김원봉의 최후는 추측과 불확실한 진술만 난무했으나, 기록문서를 통해 죄목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정 소장은 “김원봉이 조사과정에서 자살하지 않았다면 평양 인근에서 살다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고, 북창군 통제구역에 수감됐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사실 김일성은 1956년의 반당종파 사건 이전부터 경쟁자들을 하나씩 퇴출시켜왔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전후해서도 각 계파의 우두머리였던 박헌영, 박일우, 허가이, 이승엽 등이 차례로 퇴출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실무적으론 여전히 다수의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6년 8월부터는 숙청이 본격화됐다.
정병일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북한 국가 건설에 미친 연안파의 역할’이라는 논문에서 “빨치산파는 연안파가 초기 북한 국가 건설 과정에서 당·정·군을 아울러 구사했던 변용된 중국식 정책을 수용해 독식함으로써 연안파를 북한 역사에서 사장시켜 버렸다”고 평가했다.
<본 기사는 주간조선 2439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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