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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책의 이것이 정치다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진행하는고품격 시사 토크쇼 시즌 2
정치권의 정쟁 정략에서 벗어나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을 분석하는
살아있는 정치 비평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전원책의 이것이정치다 - 시청소감

전원책의 이것이정치다 - 시청소감
튼튼한 안보로 나라수호한 고구려!돈으로 나라수호한 지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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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9 윤*현 조회수 135


 

 

 

튼튼한 국방력이 아니라, 돈으로 평화를 사겠다는 나라치고

 

 

안 망하는 나라가 없다. 돈으로 사는 평화는 거짓평화에 불과!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 대북지원이라는 미명 하에 퍼 준

 

 

대북송금은 북괴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에 바친 조공에 불과!

 

 

오히려 북괴가 대한민국을 웃습게 알고 적화야욕을 채워준 꼴

 

 

[자료]돈으로 평화를 산 중국 (출처 : Network of Corea history)

우리는 중국하면 강대국,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국이라 생각한다. 중국은 넓은 영토, 무한한 자원, 그리고 13억이 넘는 인구를 지닌 대국이다. 하지만 중국이 과연 대단한 나라인가? 사실 중국은 넓은 땅 덩이에 비해 그리 대단한 나라는 아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만큼 이민족의 침입을 많이 받은 나라는 없다.

한나라 유방이 중원을 통일하고 그 솟아오르는 힘으로 북방의 위협인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유방은 초한대전이전부터 각 군벌들간의 전쟁에서 단련된 백전노장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군사적으로 북방 기마민족과는 근본적으로 게임이 되지 않았다. 유방은 오만하게 흉노족을 정벌하고자 했다.

당시 흉노족은 모돈선우라는 영걸이 나타나 흉노족의 힘이 막강할 때였다.
유방의 30만 대군은 기세좋게 북방으로 진격했으나 흉노족의 포위에 걸려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포위된 유방은 온갖 뇌물을 다 바치고 앞으로 매년 엄청난 조공을 할 것이며 모돈선우를 황제나라 어버이로 모시고 유방은 신칭을 하기로 했다. 흉노족 일대의 영걸 모돈선우는 이 정전조건에 매우 만족하고 유방을 풀어 주었다.

중국 사서는 유방이 모돈선우의 신하가 된 사실을 극구 숨긴다.
그리고 바친 조공도 오랑캐에 대한 하사품이라 왜곡을 하였다.

당나라 시대 때도 마찬가지다.
당시 북방에서 위세를 떨친 위구르족들에 대해 중국은 갖은 선물을 다 바치고 구걸외교를 했다. 황소의 난과 같은 일대 국가위기도 위구르족의 전사들이 아니면 평정할 엄두도 못냈다.
하지만 사서는 당나라 황제가 위구르족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역사왜곡을 한다.

송나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약체로 평가받는 송이긴 하지만...
송나라는 거란족의 요, 탕쿠트족이 세운 서하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요나라에는 매년 금 20만냥과 비단 50만필을 서하에게는 금 10만냥과 차 2만근을 보내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명나라 때도 마찬가지다.

전세계를 지배하다가 몰락한 몽고족의 기마대는 여전히 강력한 세력으로 북방에 남아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개국시조 주원장의 아들이자 명나라 최고의 영걸인 영락제가 즉위하고서는 고비사막을 넘어 몽골초원에까지 명나라 군대를 진주시켰지만 바람같이 사라지는 몽고기병대를 토벌하지는 못했다.

중기에 들어오면 몽고족이 아니라 투르크계통의 오이라트족 에센 타이지가 몽고초원을 통일했다. 그들은 명나라를 위협하자 이미 나약해빠진 명나라는 이 몽고족에 대해 마시장을 열고 울며겨자먹기로 수십만 마리의 몽고말을 비싼 값에 사주었고 몽고의 사신이 오면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는 선물을 안겼다.

처음에는 엄격하게 천명까지 정원으로 하여 오라는 사신이 무려 삼천명씩이나 왔다. 명나라는 이 삼천명에게 모두 값비싼 선물을 안겼다.

말하자면 돈으로 북방의 평화와 국가안보를 산 셈이다.

그래도 명나라 입장에서 북방에 수십만의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비보다 이게 훨씬 싸게 먹혔다.
땅에 대한 욕심이 없는 몽고족 입장에서 중국을 집어삼키지 못할 바에야 목숨걸고 군대를 동원하는 것보다 명나라를 위협하여 평화적으로 삥을 뜯는게 그 또한 구미에 맞았다.  

명나라는 돈으로 명분도 얻고 북방의 국가안보도 지킨 셈이다.

하지만 역사기록은 어떻게 되는가?

몽고의 오이하트 4부의 패자 에센이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러 오자 황제께서 사은품을 하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물자가 부족한 몽고족 입장에서야 하사품이라 하든 뭐라고 치든 재물만 두둑히 뜯어내면 그만이다. 그러나 역사의 마지막에는 결국 명나라의 방대한 사서만 남았다.
몽고가 보잘 것 없으나마 조공품을 들고 황제에게 조공하러 왔을 때 천하의 주인인 황제께서 은혜로운 마음으로 변방의 오랑캐에게 하사품을 내린 것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게 실제와는 정반대인 그 날들의 황당한 중국역사이지만 글자로 남겨진 사서만이 진실이 된다.

에이 그럴 리가 있느냐고?......
이것이 진실된 역사이고 이조차 사서는 전부 엉터리로 기록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명나라가 몽고족에게 한번 선물을 제대로 안주다가 서로 충돌이 일어나서 마치 코미디처럼 군사지식이 전혀 없는 조정의 실력자 왕진이라는 환관의 고집으로 몽고족에게 도전할려고 50만대군을 일으키고 그도 왕진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황제가 직접 친정을 하였다가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야전에서 생포를 당하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이 것이 유명한 토목의 변이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우여곡절 끝에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는 다시는 몽고족에게 변변한 저항을 한번 하지 못하고 망할 때까지 비싼 경비를 들여 북방의 평화를 구걸하였다.
하지만 사서는 그래도 명분은 황제가 몽고족에 물품을 하사한 것으로 뻔뻔스럽게 기록을 하였다.

허풍이 심하기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중국인들의 행태가 결국은 역사상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남아있는 것은 대개 중국의 사서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고구려와의 관계도 이런 식이라 보면 된다.

고구려가 중국의 책봉을 받은 것은 통일왕조가 들어선 수, 당 시대 때이다.
그런데 수양제나 당태종이나 왜 책봉국을 그렇게 수백만의 군사를 동원해 정벌하고자 했을까?
책봉은 외교적인 일종의 형식일 뿐 수 당을 진정으로 황제국으로 인정하지 않자 오만한 양제나 당태종이 분노했던 셈이다.

그러나 허풍이 세고 역사를 철저히 왜곡한 중국의 사서는 고구려가 마치 중국의 책봉을 받은 변방국가로 조작한 것이다. 이를보면 중국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이 얼마나 형편없고 잘못되었는지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중국이 자랑하는 한나라 역시 우리민족에게 돈으로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예를들면 한나라는 고구려와의 경계선에 책구루를 설치하여 그 곳에 한나라의 물품을 갖다놓고, 고구려로 하여금 그 물품을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이는 한나라가 고구려의 잦은 침략에 시달린 나머지 물품을 주며 고구려의 침략을 막은 것을 마치 하사했다는 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고구려 6대 임금인 태조는 자주 한나라를 공격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는데 일생을 바친 임금이었다. 태조 때 하도 한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의 영토와 주민들을 잡아가자 한나라에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한나라 주민을 돌려주면 어른은 비단 48필, 아이는 그 반의 값을 주겠다고 사정할 정도였다.  

당나라 이세민이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안시성에서 양만춘에게, 요택에서 연개소문에게 크게 패한 후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궁과 궁복을 하사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를 받고도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중국측 기록도 당나라가 고구려에 크게 패해 전쟁배상금을 문 것을 거꾸로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보면 중국은 대단한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갖은 침탈을 당한 나라였다.   군사력이 약해서, 그들은 돈과 물품으로 평화를 살 정도였다. 돈으로 평화를 구걸한 나라, 이것이 바로 중국 역사의 흐름이고 그들의 실체이다.

우리는 중국이라는 환상에 잡혀있지 않은가?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 던지고 역사를 다시 보자.
그러면 중국을 호령한 북방민족들의 기상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중국이라는 환상을 벗어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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