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는 {단군}조선의 노비라는 뜻이다
5호16국의 주역인 선비족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
오나라 왕 고구려 동천왕에게 보낸 국서 내용,"고구려는 선우(초원의 제왕)"
선비족이 세운 수.당이 단군한국을 계승한 고구려를 침략한건 폐륜행위였다
선비는 고구려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의 정복 활동 때 선비를 활용하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박 경철 박사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전투에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선비가 고구려의 부용세력(附庸勢力)이었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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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정복에 성공한 당 고종, 당 고종은 고구려를 정복해 천하를 통일했으나 왕비인 측천무후가 690년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창건해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가 됨으로써 가장 무능한 황제로 낙인찍혔다. |
여기에서 부용세력의 의미는 로마제국의 예를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의 해방노예들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했다. 이는 로마의 정복지역 통치방식 중의 하나로 부용민(clientes) 제도라고도 한다. 부용은 원래 소국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그것이 대국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을 참조하기 바란다.
인간이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사실상 중국의 역사는 수·당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오호십육국은 제외하더라도 몽골족의 원나라,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만주족의 청나라 등 모두 고구려보다도 더 열악한 부족단위에서 시작하여 천하를 제패했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넓은 영토를 지닌 강국으로 수나라와 당나라를 세운 선비족을 부용세력으로 지배하던 세력이다. 더구나 요동방어선을 장벽으로 삼고 있는 제국중의 제국이다.
고구려 중국 선제공격 사실 잘 알려져
요동방어선은 중국의 고구려 침공을 막기 위한 방어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런데 선비를 부용세력으로 여기고 있는 고구려가 내부를 단속한 후 축적된 힘을 중국을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는 선비족의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표출할 때 고구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가는 미지수였다.
고구려가 중국의 공격을 막는 데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을 선제공격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을지문덕은 중국 수나라의 공격을 격퇴하고서는 그 여세를 몰아 중국을 공격한다면 대륙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중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수나라와 당나라가 중국을 점령했지만 선비족으로서 자신들보다 큰 세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고구려는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하는 걸림돌이었다. 그러므로 수와 당은 왕조의 안정과 생존의 차원에서 고구려가 강성하여 자신들을 직접 공격하기 전에 고구려를 쳐 없애보려 한 것이다.
수·당이 국운을 걸고 고구려와 혈투를 벌였는데 결국 수나라는 고구려 때문에 멸망했고 고구려는 당나라 때문에 멸망했다. 아쉬운 것은 고구려의 붕괴가 고구려의 전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 고구려 내부의 자중지란 등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당나라 과거시험에서 고구려 정벌방법 묻기도
최근 국내 학계에서는 당나라가 고구려 침공의 여론몰이를 위해 과거시험에 정벌 방법에 관한 문제를 출제한 문헌이 최근 처음 발견되었다. 돈황 문서로 잘 알려진 『토원책부(兎園策府)』라는 필사본의 '정동이(征東夷)'라는 항목에 고구려 원정에 대한 의견을 묻고 원정의 당위성과 정복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대목이 있다고 인천시립박물관의 윤용구 박사가 말했다.
『토원책부』는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일곱 번 째 아들인 장왕(蔣王)의 지시로 두사선(杜嗣先)이 650년대에 만든 책으로 과거시험에 출제될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을 자문자답식으로 서술했다.
모두 30권 분량이었으나 현재는 서문과 권1만이 돈황문서로 전해지는데 자문자답 형태의 질의응답에는 고구려 원정의 필요성과 화전(和戰) 양면의 전술과 모범답안이 무엇인지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또 고구려 정복을 통한 천하통일의 정당성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정벌 여론조성을 위해 과거급제 시험에 ‘유격전, 전쟁터의 지형, 기상, 심리전 등을 논하라’는 문제도 출제돼 있다. 당나라가 고구려 공격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잘 알려주는 예이다.
돈황문서란 중국 3대 석굴 유적 중 하나인 돈황 막고굴에서 발견된 고문서 일체를 일컫는 말로써 20세기 초반 이후 서구인들에 의해 대규모로 약탈돼 현재는 영국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등에 주로 보관돼 있다. 유명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돈황문서의 하나로 프랑스로 반출됐다.
진시황 이후 중원 패권 북방기마민족이 차지
그 시작이 오호십육국(1五胡十六國)이었고 이를 회복하고 중국을 통합한 나라가 수와 당이라고 설명된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매우 놀라운 점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이 시대를 '혼란기' 혹은 '암흑기'라 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시기에 서진이 흉노족에게 점령당한 후 한족이 대거 강남땅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조조의 위나라를 이어받은 서진이 단명하자, 사마예가 강남땅에서 동진을 일으키고 화북지역에는 소위 오호십육국 시대라 해서 갈, 저, 흉노, 선비, 강족 등 많은 왕조가 들어서기도 하고 망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서 저족 출신의 부견이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전진왕조를 세우고 강남의 동진과 대치한다.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한족은 외래문명에 대해 보수적인데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이민족인 다수의 기마민족 왕조가 세워지자 자연적으로 한족도 외래 문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불교수용도 그 중 하나로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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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멸망 때의 상황. |
후한 말에 들어온 불교가 이때에 이르러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됐는데 이는 북방의 소위 ‘오랑캐 왕조' 즉 기마유목민족 계열이 들어선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이 중국사에서 이 시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번한잡거' 현상 때문이다.
이것은 이민족과 한족이 같은 화북 땅에 살기 시작하면서 민족의 동화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중국의 통치를 사실상 흉노계열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연할 결과로 볼 수 있다. 북조 중에서도 북위 효문제 시대에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폈는데 그는 선비족이 한족의 옷을 입고 한족의 문화를 수용하고 한족과 결혼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수문제 · 당고조 모두 한족아닌 이민족 출신
그런데 중국을 통일했다는 수나라와 당나라도 족보를 따진다면 모두 흉노의 일파인 선비족이라는 점이다. 수문제는 황제가 되기 전 북주(北周)의 승상으로 북주는 지금의 내몽골 지역의 음산 산맥에 위치한 군사기지인 무천진 군벌로 대부분 한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이다.
당나라를 세운 당고조 이연도 한족 출신이 아니다. 이연도 선비족인 척발씨(拓跋氏)의 후손으로 역시 같은 북방민족 출신인 수나라에 항복하여 북방민족 제압의 근거지였던 태원에서 군사령관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이연은 당 왕조를 세운 후 한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자기의 선조가 춘추시대의 노자(노자의 성은 이씨임)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노자의 『도덕경』을 발간하고 도교를 장려했다. 학자들은 이연이 통상 북방민족이 항복해 오면 중국 역대 왕조들이 이씨 성을 하사하는 관례에 따라 이씨 성을 받았다고 추정한다.
당태종의 충복으로 볼 수 있는 장손무기는 당고조 이연과 같은 척발씨로 북위 때 전공을 많이 세워 성씨를 장손(長孫)으로 바꾼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북주의 표기대장군이고 아버지는 수나라의 우효위장군이며 그의 여동생이 태종의 처 문덕황후다. 그는 혈통이 척발씨이므로 어렸을 때부터 이세민과 절친하게 지냈다.
태종의 또 다른 충복인 우지녕도 선비족의 귀족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수나라에서 동주총관을 지냈고 아버지는 수나라에서 내사사인을 지내는 등 정통적인 북방기마민족 가문이다.
중국을 사실상 통치한 오호십육국들의 원래 시발점은 고구려처럼 북방기마민족으로 부족체제의 작은 집단이었다. 그 정도의 작은 집단도 경우에 따라서는 통일왕조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것은 기동력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북방기마민족이기 때문이다.
대륙을 질타한 원동력, 등자의 사용 (출처 : 사이언스타임즈)
서기 378년 터키 북서쪽 아드리아노플에서는 동로마제국과 고트족이 대격돌이 벌였다.
결과는 로마의 참혹한 패배로 끝났으며 무적의 로마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고트족의 비결은 바로 등자에 있었다.
등자란 말 등의 안장에 매달아 사람이 발을 걸칠 수 있게 만든 승마 기구로서, 두 발이 안정되어 활을 쏘거나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자유롭게 칼과 창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이다.
등자의 기원은 기원전 4세기경에 흉노족에 의해 만들어져 훈족을 통해 서양으로 유래된 것으로 알려 졌으며 13세기경 온 대륙을 휩쓸던 징키스칸의 저력도 여기에 있었다고 한다.
단순한 원리와 구조지만 2천여년에 걸쳐 세계의 역사를 흔드는 엄청난 발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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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총의 고구려벽화. 말을 타고 뒤로 활을 쏘는 파르티안 기사법은 북방 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 기사법이다. |
파르티안 기사법은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무용총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듯 무사가 말을 달리면서 뒤로 몸을 틀어 각궁의 줄을 귀에까지 당기고 짐승을 겨누어 쏘는 방식이 파르티안 기사법이다. 이런 자세는 경주에서 발견된 수렵문전(狩獵紋塼)에도 보이는데 파르티안 기사법은 기본적으로 북방 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 기마궁술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사법은 말만 잘 타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활이 몸을 돌려 뒤로 쏘는 데 적합해야 하고 또한 몸을 뒤로 돌릴 때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버팀대가 있어야 한다. 전자는 만궁이고 후자는 등자이다. 만궁과 등자에 대해서는 ‘「사상 최강 고구려의 원동력은 과학(4), (5)」(사이언스타임스, 2007.6.27 및 2007.7.3)에 약간 다뤘지만 이곳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에는 사법을 연습하는 그림이 현실 서쪽 벽에 그려져 있다. 말을 탄 4명의 무인과 3명의 평복 차림 인물이 있고 표적은 5개이다. 그림 우측에 ‘이것은 서쪽 뜰 안에서 마사희(馬射戱)하는 것이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그 외에도 마장(馬場) 중앙에 있는 3명 중 가장 왼편의 인물은 ‘사희주기인(사희기록을 주재하는 사람)’이라고 씌어 있는데 이는 말 탄 무사들의 성적을 심사하고 기록하는 심판관으로 보인다.
선수는 4명이다. 두 사람은 말을 달리며 활시위를 당겨 과녁을 겨누고 있다. 나머지 두 사람은 한 순을 돌아 나왔거나 아니면 준비 자세를 취하는 중이다. 과녁은 5개의 장대 위에 송판을 붙인 것 같은데 2개는 누가 쏘아 맞혔는지 두 동강이 난 채 땅 위에 떨어져 있다. 이 그림에서도 과녁을 겨눈 채 말을 달려 나가는 왼쪽 무인은 완전한 형태의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하고 있다.
원래 파르티안 기사법이 개발된 것은 말 타고 활을 쏠 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활을 앞으로 쏘려면 말 머리의 방해로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것이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아무튼 이 기술 덕분에 기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중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 파르티안 기사법은 일반적으로 등자라는 획기적인 마구(馬具, 말갖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마구는 모두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사람이 말 등에 올라앉기 위한 안장, 발을 딛는 등자, 말 다래 그리고 그것을 장착하는 말 띠와 띠고리이다. 둘째는 말을 다루기 위한 자갈· 굴레· 고삐 등이며, 셋째로 이들 기구들의 장식으로 행엽(杏葉)· 운주(雲珠)· 방울 등이다.
마구 중에서 가장 늦게 출현한 '등자'
마구 중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이 말 자갈이고 가장 늦게 출현한 것이 등자이다. 등자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의미한다. 등자가 발명되기 전에 말 등에 올라탄 기수는 자리가 불안정하므로 허벅지와 발로 말의 몸통을 꽉 조여서 떨어지지 않도록 힘을 주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노련한 기병조차 한두 시간만 말을 타고 달려도 엉덩이와 사타구니에 온통 멍과 물집이 생기기 마련이다. 또한 등자가 없는 경우 혼자 말에 오르기조차 어려우므로 기수는 다른 사람의 허리를 밝고 올라가거나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긴박한 상황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쟁터에서 말 타는 것조차 어려우므로 말의 효용도는 단지 이동에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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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자의 발명으로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 등자가 어떤 경로로 유럽까지 보급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7~8세기경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을 통해 전파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서유럽에서 기원 8세기경까지 유럽의 장수들이 말을 탄 이유는 전투장으로 가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전장에 말을 타고 가서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말에서 내려 전투에 참여했다. 8세기 전에 기마병들이 말을 타고 공격하는 영화의 장면들은 모두 허구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단순한 듯이 보이는 등자가 개발되자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서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비장의 무기 만궁
등자가 마련된 말을 타면서 흔들림 없이 뒤로 몸을 돌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세에서 화살을 날릴 수 있는 활이 있어야 한다. 활은 모양에 따라 직궁(直弓)과 만궁(彎弓)으로 구분된다. 직궁은 탄력이 좋은 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양쪽에 줄을 걸어 약간 휘게 만든 단순한 형태의 활이다.
이에 비해 만궁은 활줄을 걸치지 않을 경우 보통 활이 휘는 방향과는 반대로 뒤집어져 휘게 된다. 활줄을 풀었을 때 만궁이 뒤집어져 휘는 각도가 활에 따라 다른데 한국의 전통 활인 ‘국궁’은 그 휘는 정도가 만궁 중에서도 가장 심하여 활줄을 풀었을 때 거의 완전한 원을 이룬다.
이런 만궁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인으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인들이 예맥(濊貊)인을 부르는 호칭인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를 연결한 것으로 ‘사람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활에 관한 한 고대 한국인들의 기술은 대단했다는 것은 중국 측의 사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후한서』 : 고구려의 별종이 소수(小水)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수맥(小水貊)이라 하였는데 그곳에서는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다.
『진서(晉書)』 : 돌로 만든 살촉과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 석자 다섯 치의 단궁과 한 자 몇 치쯤 되는 길이의 고시가 있다. 그 나라의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산출되는 돌은 쇠를 자를 만큼 날카로운데 (그 돌을) 채취하려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해야 한다. 주(周) 무왕 때 그 고시와 석노를 바쳤다.
또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나오는 활과 화살에 대한 기록도 다음과 같다.
① 부여(夫餘) : 활· 화살· 칼· 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다.
② 고구려(高句麗) : 고구려의 다른 성이 작은 물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소수맥은 좋은 활을 생산했는데, 이른바 ‘맥궁(貊弓)'이란 것이 그것이다.
③ 읍루(挹婁) : 그곳 사람들은 활쏘기에 뛰어나 사람을 쏠 때에는 모두 눈을 적중시킨다. 화살에는 독이 칠해져 있기 때문에 적중되면 모두 죽는다.
④ 예(濊) : 낙랑의 단궁(檀弓)이라 불리는 활은 이 땅에서 생산된다.
⑤ 진한(辰韓) : 진한은 국명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狐)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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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궁과 화살통. 한국의 각궁은 만궁 중에서도 휘는 정도가 가장 심하며 활줄을 풀었을 때 거의 완전한 원을 이룬다. | '진서(秦書)'에는 ‘고구려는 부견이 즉위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낙랑단궁을 보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낙랑단궁은 맥궁과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중국인들이 낙랑이라고 할 때의 낙랑은 한사군 중의 낙랑군이 있던 곳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를 가리킨다.
『삼국지』는 관로(管輅, 208~256)의 놀라운 점술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뤘다. 관로의 자는 공명(公明). 평원(平原) 사람으로 얼굴이 추루한 중에 술을 좋아하고 성격이 호방한데 천문지리와 관상 보는 법에 능통했다.
그가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지 낭야 태수가 그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선비 백여 명을 초청해 놓고 그를 부르니 관로는 태수에게 “저는 나이가 아직 연소하여 담이 굳지 못하니 우선 술 석 되를 마신 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중요한 회의나 연설 등을 할 때 약간의 술을 마시고 들어가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관로는 적어도 석 되씩 마셨다는 것이다.
여하튼 관로의 점술은 매우 유명하여 안평태수 왕기(安平太守 王基 190~261)가 그의 부인이 두풍을 앓고 아들이 가슴앓이 병이 있으니 점을 쳐 달라고 했다. 관로는 점을 친 후 이렇게 말했다.
“이 집 서편에 죽은 사람의 시체가 둘이 있는데 한 시체는 창을 가지고 있고 다른 시체는 활을 가지고 있는데 머리는 벽 안에 두고 다리는 벽 밖에 두었으므로 창을 가진 시체가 머리를 찌르므로 항상 두통이 나고 활을 가진 시체는 배와 가슴을 찌르는 까닭에 항상 가슴앓이를 하는 겁니다.”
왕기가 곧바로 땅을 파니 그의 말대로 두 개의 관이 나오는데 한 관에서는 시체와 함께 창이 나왔고 다른 관에서는 각궁(角弓)과 화살이 나왔다. 태수가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니 비로소 아내와 아들의 병이 나았다고 적혀 있다. 『삼국지』에서도 각궁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이형구, 김영사, 2004 『과학이 세상을 바꾼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크리에디트, 2007 『전쟁으로 보는 중국사』, 크리스 피어스, 수막새, 2005
고구려의 기본 전력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기본 전력이 타국에 비해 앞섰기 때문이다. 우리 한민족의 무기인 활, 화살 등 기본 장비가 중국보다 월등했다. 특히 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를 사용하여 화살을 전후좌우로 발사할 수 있는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했다. 또한 이들 기본 전력을 보다 극대화시킨 개마무사도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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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계림 이강의 물소,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물소 뿔은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서 말을 타고 동물들을 사냥하는 무사들의 활은 각궁으로 만궁 중에서도 예맥각궁(복각궁)과 형태가 매우 흡사하며 같은 시대에 중국이 사용하던 활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만궁을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한국인의 조상인 예맥인으로 추정된다. 고대 중국인들이 예맥(濊貊)인을 부르는 호칭인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큰 대(大)’자에 ‘활 궁(弓)’자를 연결한 것으로 ‘사람이 활을 쏘는 모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각궁은 물소의 뿔로 만든다.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서는 살지 않으므로 물소 뿔은 결국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자들은 이 사실을 들어 과거에도 우리 선조들이 이들 지역과 활발한 무역을 했음이 틀림없다고 설명한다.
고구려의 활은 기병용과 보병용이 다소 다르다. 기병용은 보통 80센티미터(다 폈을 때의 길이이므로 실제로 사용할 때의 길이는 60센티미터), 보병용은 120~127센티미터 정도이다. 위력은 사수의 힘에 따라 큰 차이가 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는 갑옷도 뚫는다. 어떤 장수는 화살 한 발로 사람과 말과 안장을 함께 꿰뚫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고구려에서 만궁만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와 친연성을 갖고 있는 흉노(훈족)의 활동 무대에서 만궁과는 다른 한식궁도 발견된다. 한식궁은 뼈나 뿔로 만든 활고자를 부착한 한나라 고유의 중형 활이다.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말을 질주시키면서 뒤로 몸을 틀어 각궁을 귀에까지 바싹 당기어 명적으로 짐승을 겨눈 무인의 활 쏘는 모습이다. 이런 자세는 경주에서 발견된 수렵문전(狩獵紋塼)에도 보이는데 이를 파르티안 기사법이라고 한다. 파르티안 기사법은 북방기마민족의 전형적인 고급기마술이다.
원래 파르티안 기사법이 개발된 것은 말 타고 활을 쏠 때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앞으로 활을 쏘려면 말의 머리 때문에 방해를 받고 시야에 사각지대가 생긴다. 그러므로 말을 타고 사격할 때는 목표를 측면에서 뒤로 가도록 하고 쏘는 것이 시야도 넓고 효율적이다.
신체 구조상으로도 앞으로 쏘기보다 뒤로 돌아 쏘는 경우가 사격 자세도 안정적이어서 명중률도 높다. 아무튼 이 기술 덕분에 기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360도 중 어느 방향으로든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파르티안 기사법은 일반적으로 등자라는 획기적인 마구(馬具, 말갖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등자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생기는 다리의 피로감을 예방하기 위해 발을 받쳐 주는 가죽 밴드나 발주머니를 의미한다.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써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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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케도니아의 밀집장창대. 창이 워낙 길어 5열째 병사들의 창까지 대열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들이 구사한 삼각형밀집방형진은 평지에서 벌어진 고대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 |
등자의 발명은 오랫동안 유목민들로 하여금 기마술에 있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케 하는 데 공헌했으며, 일반적으로 등자는 흉노(훈족)가 발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중국의 한(漢)대 부조에는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당시까지 중국의 기병이 돌격할 때 등자 없이 말을 탔다고 볼 수 있다. 말 타는 기술이 수준급이라면 모를까 막상 적과 층돌하면 기사는 그 반동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 등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다. 말에서 떨어진 기사는 상대에게 격멸되기 십상으로 초창기 중국의 기병이 고구려처럼 위력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의 말은 결코 크지 않다. 『삼국지』에도 ‘말들의 키가 작아 산을 오르는 데 능하다’고 적혀 있다. 한편 부여에서는 ‘명마가 난다’고 했다. 고구려 시조인 고주몽이 어렸을 때 부여왕의 ‘말을 기르고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쓰고 있다.
온달장군의 아내인 평강공주는 시장에서 상인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 속한 말로 병이 들어 혹은 비루먹어 버리는 말을 사가지고 길러 곧 이것을 되바꾸라고 일렀다. 공주가 말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말사육의 실제적인 기술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인 대다수가 말을 일상 생활화했음을 암시해 준다.
고구려의 자랑 개마무사
한국의 역사가 항상 외적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고구려의 태조왕과 동천왕은 중국을 수시로 선공하여 기선을 제압했고 차대왕은 중국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고구려가 이와 같이 중국을 공격하고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어대사전』에는 전쟁을 ‘무력으로 국가 간에 싸우는 일’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 간의 전쟁은 이와 같은 간략한 설명으로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전쟁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없다.
비교적 단순한 전쟁이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므로 전쟁 자체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벌인 수많은 전투에서 성공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에 고구려가 운용한 전쟁의 기본적인 요소부터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구려가 사상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앞에서 설명한 기본 전력을 바탕으로 다른 국가가 구성할 수 없는 강력한 부대를 운용했기 때문이다. 바로 유명한 중장기병 개마무사이다. 사실상 고구려가 중국을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었던 것은 개마무사의 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장기병이란 말과 사람 모두 갑옷으로 중무장한 것을 말한다. 갑옷은 찰갑(札甲, 미늘갑옷)으로 가죽 편에 철판을 댄 미늘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였다. 투구, 목가리개,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 덮은 갑옷을 입으면 노출되는 부위는 얼굴과 손뿐이다. 발에도 강철 스파이크가 달린 신발을 신는다. 말에게도 얼굴에는 철판으로 만든 안면갑을 씌우고 말 갑옷은 거의 발목까지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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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악 3호분 개마무사. ⓒ |
개마무사의 주무기는 창이다. 이 창은 보병의 창보다 길고 무겁다. 기병용 창을 삭(?)이라 하는데 중국식 삭은 보통 4미터 정도인데 반하여 고구려군은 평균길이 5.4미터에 무게는 6~9킬로그램 정도 된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대형 파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5.4미터가 넘는 창을 어깨와 겨드랑이에 밀착시키고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달려오는 탄력까지 모두 합하여 적에게 부딪히면 보병으로 구성된 적군의 대형은 무너지게 마련이다(물론 모든 창이 이처럼 길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
이와 같이 개마무사가 밀집대형 혹은 쐐기꼴(∧) 대형으로 긴 창을 앞으로 내밀고 돌격하여 적진을 허물면 대기하고 있던 보병 등이 신속하게 투입되어 전세를 장악하면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전쟁은 항상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고구려가 개마무사 등 중장경기병을 활용하여 전투를 이겼다면 상대방은 곧바로 패전한 이유를 분석하여 이에 대적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효율적인 군편제 운용
개마무사의 약점은 말 갑옷의 무게가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몸무게(약 60킬로그램)와 갑옷 무게를 합쳐서 8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면 적어도 130킬로그램 이상의 무게를 말이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말들에 비해 항상 두 명 이상의 장정이 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병력이 소규모일 때는 재빠른 전진도 가능하지만 대규모 부대가 격돌할 때의 중장기병은 밀집대형을 이루며 매우 둔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우 보병이 오히려 기마병에게 효율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전쟁의 기본이 ‘보병’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병이란 한 사람에게 무기 하나씩 들려주는 정도로 기본적인 전투력을 갖추는 병과이다. 더구나 보병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일단 ‘값이 싸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인적자원만 공급된다면 많은 숫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단원은 임용한 박사의 글을 많이 참조했다.
그러나 보병의 약점은 보병 개개인의 경우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일정한 숫자를 확보하지 못하면 보병은 별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보병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전제 아래 대열을 유지하면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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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마총 마구 전시물. 기수는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등자에 다리를 고정시킴으로서 달리는 중에도 상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등자는 흉노가 발명했다고 여겨진다. ⓒ |
보병이 대열을 지어 뭉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자신을 죽이려고 준비하는 적군이 몰려오거나 적에게 다가갈 때 누구나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 공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제대로 싸울 리 없으므로 지휘관은 이들이 하나의 집단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경주한다.
병사들이 공포를 떨쳐버리고 자발적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 ‘사기’다. 그런데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건 생명체로서 본능이기 때문에 아무리 정신교육을 잘 시킨다 해도 쉽사리 떨쳐버릴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병을 운용할 때 개인 활동을 금지하고 대열을 짓도록 하여 장병들이 심리적인 안정을 갖도록 유도한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같이 싸워줄 전우가 있다면 용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보병이 대형을 유지한다는 것도 제식훈련처럼 약간 떨어져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장병들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바짝 붙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바 ‘밀집대형’을 이루어 대열 전체가 하나의 기계와 같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밀집대형이 전투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고대 그리스군이 숫적으로 압도적인 페르시아와의 전투 결과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유명한 삼각밀집대형을 창안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는 일개 중대를 160명으로 편성하여 한 줄에 20명씩 여덟 줄을 이루고 행진을 했다. 그들 모두 기다란 창과 방패를 갖고 밀집해서 행진을 했으며 적군을 만나면 삼각형으로 형태를 변형하여 수비 태세에 들어간다. 이를 유명한 ‘삼각형밀집방형진’이라고 부른다. 전면에 있는 군인이 부상당하면 바로 그 자리를 뒤에 있던 장병이 채우도록 하여 대형 전체는 항상 삼각형으로 유지되었다.
‘환타생’이라고 불린 이 삼각형밀집방형진은 고대 전투 사상 양측의 병력이 직접 충돌하는 평지의 보병전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전설을 갖고 있는 대형이다.
그러므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략했을 때 그리스인들의 이 같은 진형을 정공법으로는 격파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직접 전투를 피하고 포위한 후 화살을 쏘거나 갈증과 허기로 지쳐 쓰러지게 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러나 이런 밀집대형도 로마군단의 변형 작전에 의해 격파되었다.
로마군은 그리스 대형에 맞서기 위해 먼저 어린 병사들로 구성된 투창병을 내세웠다. 로마군이 사용하던 투창은 끝이 무겁기 때문에 그리스 진형의 앞 대열에서 장창을 사용하더라도 떨어뜨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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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족의 기마 전투 장면. 훈족의 궁수가 자신을 추격하는 게르만 창기병을 향해 몸을 틀어 화살을 날리고 있는 모습으로 유럽에 남아 있는 유일한 훈족의 그림이다. ⓒ |
투창병들이 방진의 앞 대열과 중간 대열을 흐트러뜨리는 사이, 키가 작은 로마 군병들이 작은 단검을 들고 방진 밑으로 침입하여 공격한다. 이 때문에 대열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마의 주력군이 돌진하여 방진을 무너뜨렸다.
로마군은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라 소대형과 백인대 등의 작은 부대로 구성된 집합체로 이들의 역할과 간격을 적절히 배치해 마케도니아의 밀집대형을 무너뜨렸다. 로마군의 승리는 아무리 견고한 방진이라도 침착하게 맞선다면 이를 뚫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상황에 따라 변형 작전을 구사하였고 후대에는 귀갑형(거북형)이라는 유명한 밀집대형을 발명한다.
그러나 이들 귀갑형도 100전 100승을 한 것은 아니다. 로마가 운용하는 밀집대형의 위력을 잘 아는 국가는 로마군의 대형을 먼저 허물어뜨리거나 허물어지기 직전의 상태가 되도록 유도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즉 아군이 적의 대형을 뚫고 들어가 적의 후면이나 측면을 먼저 포위하는 방식을 구사했다.
개마무사는 강력한 전력의 방편
아시아 동북방에서 최강의 전력을 보유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대에는 더욱 활발한 정복 정책을 추진해 선비의 후예인 거란을 정벌하는 등 서부지역에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해 당시 중원의 최강세력인 북위(北魏) 제국에 필적할 수 있는 우월적 지위를 확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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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다르크」의 한 장면. ⓒ | 거란은 가비능을 원조로 하는 선비의 분파로서 원래 시라무렌(Siramuren) 유역과 라오-사무렌(Lao-Samuren) 유역인 요해(遼海) 지방에 거주하면서 수렵, 어로 및 말 사육에 종사하던 유목민족으로 훗날 ‘요(遼)’를 세운다
고구려의 지배집단은 전쟁을 자신들의 주체적인 생존조건으로 인식하고 군사역량을 제고시키는 데 주력해 ‘전사국가(戰士國家)’화 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세력에 대한 군사적 팽창정책을 관철하면서 내부적인 통합으로 정치, 사회적인 중앙집권화정책을 견지해 나갔다. 이런 내외의 정비를 통해 후대에 들어서 ‘전제적군사국가(despotic military state)’에서 탈피해 동북아시아 일대에 독자적인 생존권(lebensraum)을 확보한 하나의 제국(empire)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고 박경철 교수는 주장했다.
박경철 교수는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여기에서 흉노는 동서 및 남북으로 나뉘기 전의 흉노를 의미한다)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작전에 수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피정복민과의 관계가 부용관계였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부용(附庸)은 원래 소국(小國) 그 자체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대국(大國)에 복속돼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로마제국이 당시 해방노예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하는 부용민(clientes) 제도를 제국의 피정복지 통치방식으로 채용했는데 고구려와 선비를 포함한 피정복 이민족과의 관계도 이런 보호ㆍ종속관계라는 것이다.
고구려는 말갈, 선비, 거란, 지두우 같은 다른 종족에 대해서는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 즉 그들 고유의 생존영역을 비호 보장해주는 대가로 그들로부터 조부(租賦) 특히 노동력과 군 병력을 확보했다. 김광진 박사는 이를 ‘공납적 수취관계(貢納的收取關係)’에 기반한 ‘속민제도(屬民制度)’ 또는 ‘이종노예제(異種奴隸制)’로 파악할 수 있다고 적었다.
앞에서 개마무사로 무장하려면 경제력과 개마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고구려의 부용세력인 선비가 개마무사로 무장했다는 것은 오히려 고구려가 이들에게 개마를 공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에 따라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오환돌기를 장갑기병으로 보는데 이들 역시 선비의 세력이라면 고구려의 부용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중국이 개마무사를 채택한 것은 개마무사를 도입한 고구려의 부용세력이 한나라군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같은 추정의 근거로는 한나라군에 중장기병으로 반드시 무장하고 있어야 할 등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등자는 개마무사가 중무장을 한 후 진격할 때 안정적으로 말을 타기 위해 필요한 마구이다. 기마민족이 정주민의 기마대를 능가할 수 있었던 것은 등자의 발명이다. 이를 보면 MBC-TV의 드라마 「주몽」에서 한나라군이 개마무사를 동원하는데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등자가 없는 상태에서 개마무사를 활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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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마무사 장비. ⓒ | 이런 정황은 개마무사는 북방기마민족에 의해 등자가 개발된 후에 고구려와 같은 철기 제작기술이 앞선 국가에서 발명됐다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설명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개마무사는 기병을 중시하는 정주국가에서 선택할 수 있는 병종이라는데 의문이 생긴다. 고구려는 개마무사가 무한대로 활동하는 평야에서의 전투보다는 산성전투의 이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거점 중심의 전투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특히 순수한 기마민족인 경우 중기병은 보유하지만 개마무사를 보유한 경우는 흔하지 않다.
초원을 바탕으로 하는 기마민족의 경우 정주국가에 비해 항상 수적으로 열세에 있기 때문에 정면대결보다는 히트앤드런(Hit and Run)식 전투를 선호했다. 그런 면에서 개마무사가 기마민족의 전투 속성을 감안하면 적합한 무장 체계가 아니라는 지적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특히 기마민족은 장거리 이동이 주무기이므로 개마는 신속한 기동력을 떨어뜨리는 단점도 있다.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의 아틸라나 칭기즈칸이 중장기병보다는 경기병을 선호한 이유이다.
그러나 활과 산성 전투를 중시하는 고구려에서 개마무사를 보유했다는 사실이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고구려가 산성 전투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오히려 개마무사가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핵심이 될 수 있다. 적군이 성을 점령하기 위해 진공해 오더라도 곧바로 성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대부분 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공격 장비들을 점검한 후 각종 장비와 인원을 동원해 공격에 임한다. 중국의 경우 고구려의 수성작전을 잘 알고 있으므로 최첨단 공성용 공격 장비를 휴대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공격군이 진을 완전히 만들기 전 또는 약점이 보일 때 성문 주변에서의 제한적인 기습작전이나 추격전에서 중장기병은 커다란 이점을 보일 수 있다. 내호아의 수군이 평양성을 공격했을 때 개마무사가 활약한 것도 이와 같은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적어도 중국과는 달리 북방기마민족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독자적으로 개마무사를 채택했다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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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고이산성) 입구. 고구려는 중요한 철광지를 지키기 위해 요하 동쪽 평야지대와 산간지대의 경계선인 무순에 신성을 쌓았다. 현재는 정상에 요나라 탑이 있다. ⓒ | 이러한 여러 가지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제일 먼저 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생산되는 무순의 신성(고이산성)을 부단히 점령하려고 한 이유이다.
필자는 신성을 찾아보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
원래 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총 길이 4킬로미터에 이르며 성 안에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넓은 분지가 있어 고로봉식 산성의 특징을 엿볼 수 있고 중앙분지 안의 큰 초석을 중심으로 주거지 흔적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산성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요나라 전탑이 정상에 세워져 있고 고이산공원으로 개발됐기 때문이다.
관광지 개발에 따라 지형이 완전히 변형돼 있어 조그마한 산성의 흔적이라도 찾고자 했으나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현지 중국인 안내원을 통해 수소문을 했지만 중국인들조차 산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같은 장소를 뱅뱅 돌면서 한나절에 걸쳐 일일이 수소문한 결과 저녁 무렵에 과거 산성의 입구라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신성의 입구는 찾는 도중 여러 번 지나쳤던 곳인데 과거에 혈투가 벌어졌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10여 미터의 토성 흔적만 남아 있었다. 전에는 입구임을 알려주는 석비가 있었다는 말에 주위를 세밀히 살펴 어렵게 찾아낸 석비는 풀 속 흙구덩이에 쓰러진 채로 방치돼 있어 아쉬움을 더해주었다.
동양보다 낙후된 서양의 철 생산 기술
동양에서 고구려가 개마무사를 처음으로 개발했다고 하면 말의 몸통 전체를 둘러싼 정통 개마가 서양에서는 언제 등장했는지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개마는 동천왕보다도 거의 1천년 후인 십자군 전쟁 때부터 나타난다고 추정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십자군 시대의 기병이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체인 메일을 걸치고 있으며 투구는 노르만헬멧을 사용했다가 나중엔 헬름이라는 양동이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투구를 사용했다. 말을 탈 때는 창을, 말에서 내려서 싸울 때는 70~80센티미터 길이의 검을 사용했다.
말까지 중무장시킨 십자군의 유럽 기병은 아랍인들이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무장을 자랑했다. 아랍군의 활은 십자군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도 우수한 기병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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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러져 있는 신성(고이산성) 표지석. 중국은 신성을 점령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했으나 신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 | 유럽의 개마무사가 동양과 조우한 것은 1221년 페르시아의 우르겐지에서 몽고족과 전투를 벌였을 때인데 이때를 서양에서 개마무사가 나타난 시초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유럽의 개마무사는 몽골 기병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몽골은 유럽 기병의 약점을 파고들어 러시아는 7일, 헝가리는 5일 만에 정복했다. 독일에서 온 3만 명 가량의 튜튼 기사단도 전멸시켰다.
아랍인들도 십자군의 영향을 받아 개마무사를 도입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맘루크로 불리는 이슬람 노예기병이다. 이들은 S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검을 사용했는데 사라센군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군대로 십자군 군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실제로 이들은 이집트에서 무적을 자랑하던 몽골 기병들을 무찌른 적도 있다.
중세시대에 장갑기병이 태어난 이유는 강력한 쇠뇌가 개발됐기 때문이다.
영화 「쟌다르크」에서도 주력 무기의 하나가 쇠뇌였다. 쇠뇌는 일 분에 3발 정도 발사할 수 있었음에도 강력한 위력으로 활보다 장병과 군마에게 치명상을 주었다. 그러므로 쇠뇌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30킬로그램짜리 갑옷을 입고 말에게도 그에 버금가는 무게의 마갑을 착용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중무장을 한 덕에 충격력은 대단했지만 단점도 매우 많았다. 몸이 너무 무거워져 방향을 신속하게 바꾸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투구의 무게도 상당해서 앞은 볼 수 있지만 고개 돌려 바로 옆을 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눈구멍과 숨구멍만 뚫려 있어 시야도 좁았다. 또한 시종이 없다면 갑옷을 입고 벗는 것은 물론이고 말에서 내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전투 도중 낙마할 경우 포로가 되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유럽의 제철 기술이 동양에 비해 매우 낙후했기 때문에 강철다운 강철로 만든 철갑은 14~15세기 무렵 유럽 독일지역에서 처음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도 동양으로부터 전수된 화약무기에 의해 곧바로 사라지고 만다.
<참고문헌>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기사(騎射)에 관해」, 이진수, 고구려연구회 논문자료, 2003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김성남, 수막새, 2005
「한국의 산성, 고구려 고이산성(古爾山城, 신성)」, sycjs, http://blog.naver.com/sycjs, 200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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