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 지나군의 침략을 격퇴하는 차원에서 한 방을 노린 고구려의 청야전술
반격해서 적을 추격, 완전하게 패배시키기 위해선 상대방이 견뎌낼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충격이 필요하다
지나 땅을 통일시킨 후한이나 후대의 수나 당이 몇 십만 심지어는 백만이 넘는 전투병력을 한 개 전선에 투입시킬수 있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많이 잡아도 5백만이 넘지 않았을 고구려의 인구를 생각해 볼 때 전투병력을 늘일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구려는 청야수성전술을 도입한다.
대규모 적병이 침입하면 우선 공간을 내어 주고 전선을 확장시켜서 적의 보급선을 늘어뜨리고 동시에 적에게 사용될 각종 물자를 소각 내지는 모두 성으로 이동시킴으로서 적을 전투역량을 소모시킴과 동시에 공세한계점을 강요하고 마침내 적이 물자부족으로 퇴각하게 되면 준비해 두었던 강력한 예비대로 반격해서 적을 추격, 소멸시키는 전술은 고구려의 독창적인 전술은 아니었지만 고구려만큼 잘 써먹은 나라도 드물었다.
추운 날씨와 험한 지형은 이러한 전술이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때 퇴각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해서 소모시키기 위해선 강력한 예비대가 필수이고 이러한 상황에서 철기가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될수 있을 것이다.
현재 개발되고 있는 KDX – 3(한국형 구축함)도 구축함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거대한 배수량에 많은 미사일을 적재할 예정이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보유할수 있는 척수의 제한으로 인해서 이 적은 숫자를 커버하기 위해서 무리할 정도로 많은 무장을 하게 된 것이다. 림팩훈련에 투입된 울산급의 무장을 보고 외국해군에서는 농담삼아서 “포켓전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고구려의 철기도 이와 같은 측면에서 양성되고 보유되었을 것이다. “강력한 한방”을 날리기 위해서 단 한방의 충격으로 상대방을 완전하게 패배시키기 위해선 상대방이 견뎌낼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 필요하다. 더욱이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대는 후퇴시에도 상대방에게 헛점을 보이지 않는다. 동천왕의 철기를 패배시킨 관구검의 위나라 군대 역시 비록 두 차례나 패배해서 처음 투입병력의 절반이 소모되긴 했지만 – 역시 개인적인 견해지만 관구검이 이끈 군대가 1만명보다 많았다고 생각한다 – 방진을 짜고 난 이후에는 거의 같은 병력의 기병 그것도 철기를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이런 측면을 감안하면 역시 퇴각하는 적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는 역시 강력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철기의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철기는 여러 차례 되풀이 얘기했지만 천하무적은 아니었고, 오히려 운용상의 여러가지 제약이 분명히 있는 병종이다.
굳이 관구검을 들지 않더라도 스위스의 농민들은 장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장기병들을 여러 차례 격파했었고, 남송의 악비가 이끌던 보병은 신비궁이라는 강력한 발사무기와 전체 길이 3미터에 되고 날이 60센티미터나 되는 도끼를 이용해 금의 중장기병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신라군 역시 나당전쟁에서 당군의 주력을 이루던 기병을 장창병과 궁병으로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크레시 전투에서도 영국군은 장궁을 이용해 프랑스의 기사들을 학살한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이 들어진다는 자체가 중장기병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강한 방호력을 지닌 철기는 일정부분 적의 발사무기를 무력화시킬수 있었고, 긴 창을 이용한 돌격은 전투에 익숙한 병사들에게도 분명히 견디어 내기 힘든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고구려에서 철기가 얼마나 활용되었고, 실전에 대규모로 투입되었는지의 논쟁은 앞으로 명확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될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고구려에서 철기가 실전에 대규모로 투입되었는지 아니면 왕과 고위귀족들의 호위대나 의장대로만 사용되었는지는 그 누구도 자신있게 얘기할 수는 없을 테지만 사료상의 기록과 벽화에 나온 그림을 보고 추정해 보건데 생각만큼 대규모는 아닐지라도 분명 철기만으로 이루어진 부대가 존재했고, 실전에도 투입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만약 대규모로 투입되지 못했다면 짧은 전투지속 시간을 고려해 보건대, 처음에 언급한 대로 아마 일종의 “결전부대”개념으로 승패를 결정지을수 있는 순간에 투입되었을 것이다.
아니며 적의 대오에 맨 처음 돌입하는 일종의 “방패”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북방 유목민족들이 한족의 강력한 발사무기를 견디기 위해서 말에 갑옷을 씌우기 시작했다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고구려 역시 이런 상황에서 철기를 투입시켰을 수도 있다
612년의 살수에서의 대학살에서도 아마 고구려의 철기가 제일 먼저 우둔위 대장군 신세웅이 이끄는 수나라군의 대오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을 것이고 645년 추위에 떨면서 퇴각하는 당태종을 추격 한 것도 철기로 무장한 찰갑 기마군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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