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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전원책의 이것이 정치다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진행하는고품격 시사 토크쇼 시즌 2
정치권의 정쟁 정략에서 벗어나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을 분석하는
살아있는 정치 비평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전원책의 이것이정치다 - 시청소감

전원책의 이것이정치다 - 시청소감
신의주 반공학생의거 주동자 함석헌/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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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8 윤*현 조회수 186


 

갇히지 않는 자유혼이 하나님의 우주혼이다

 

 

소련괴뢰 공산정권에 반대한 신의주 학생의거 배후자로 지목된 함석헌은 반공자유주의자였다!

 

 

북괴를 추종하고 협력하는 종북숙주세력은 더 이상 반공자유주의자 함석헌을 악용하지 말라!

 

 

함석헌 정신의 계승자인 반공주의자 장준하와 문익환도 종북숙주세력은 더 이상 악용하지 말라!

 

 

1933년 함석헌은 계간지 성서조선에

<성서적입장에서본 조선의 역사>를 기고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식민사관과 극단적인 민족사관을 뛰어 넘는 역사인식의 출발이었다.
그는 조선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보고

참담한 역사를 경험한 민족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참담한 삶을 경험한 자들만이 나라와 민생을 구할 수 있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가 민족주의자 유영모와 함석헌의 자유혼이라 할 것이다!

 

[자료]씨알의 소리 -함석헌

함석헌의 생애와 글을 담은 스무권의 전집은 그의사상적 깊이를 잘 보여 준다.
그의 글은 책상 위에서 단순히 쓰여진 것이 아니라.불의의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았던

시대적 체험과 폭넓은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것들이었다.

<김언호>


함석헌선생님은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정신이죠.
또 우리아름다운 말.말을 그 속에 안고 있죠.
그래서 함선생님의 전집을 이제 스무권을 내고 또 선집을 내고

또 함선생님에 관한 논문집을 한 서너권 냈는데...

이제 그런 일들을 한것이 우선은 뭐 저희 책만드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보람된 일이고...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함석헌은 청년시절 일제가 세운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의사로서의 꿈을 키운다.
그러던 1919년 함석헌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는다.
19살에 겪은 3.1운동은 그의 사회참여의식에 눈뜨게 된 첫번째 사건이었다.
함석헌은 훗날 자서전에서 3.1운동이 그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기록한다.

<함석헌 어록>만일 3.1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입학할 때의 생각그대로 아예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의학을 했을 것이고 의사가 됐다면 나도 지금쯤은 큼직한
병원이나 경영했을지 모르오.
잘하면 나도 누구들처럼 국회의원에 출마도 했을지 모르고...

3.1운동에 참가한 후 평양고보복학을 포기한

함석헌은 민족주의운동에 지성소로 알려진 오산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함석헌은 다석 유영모 (1890 ~ 1981)를 만나 기독교정신에 비탕을 둔 동양사상을 배우게 된다.

졸업 후 일본에 잠시 유학을 갔던 함석헌은 9년뒤 모교인 오산학교의 역사교사로 부임한다.


일찍이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은 더욱 심해져 모든 학교에서 조선말의 사용과 역사요육이 금지된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속에서도 우리말로 된 역사수업을 계속해 나가던 함석헌은 결국 오산학교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후 함석헌은 식민지조선의 역사교사로서 새로운 역사관을 찾아 나선다.
1933년 함석헌은 계간지 성서조선에 성서적입장에서본 조선의 역사를 기고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식민사관과 극단적인 민족사관을 뛰어 넘는 역사인식의 출발이었다.
그는 조선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보고

참담한 역사를 경험한 민족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영신>
그 고난사관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시각이요 그 고난은 바로 하나님이

이 민족을 고난을 통해서 연단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거다.
그분이 그 분의 모든 그...글을 읽어 보면요.
가장 밑뿌리에는 그 역사적인 사회가 있습니다.
항상 역사관적인 자세가 있습니다.
그러길래 다른 그...실학자들과 어...

혹은 그...종교공부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그런점이 있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역사가로서 항상 봅니다.

*1945년 소련군의 북한진주

1945년 해방과 함께 소련의 붉은 군대가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북한 땅에 발을 들여 놓는다.
일제에 저항한 경력으로 북한지역에서 명성이 높았던 함석헌은 평안북도 문교부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그가 생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함석헌(48) / 당시 평안북도 문교부장

1945년 11월 공산당의 정책에 반기를 든 학생시위대와 소련군의 유혈충돌이 발생한다.
이른바 신의주 학생의거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 배후 조종자로 몰린

함석헌은 소련군 사령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는다.

우여곡절끝에 석방된 함석헌은 1947년 2월 노모와 가족들을 북에 남겨둔채 월남한다.


그러나 해방후에 남한사회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소련군정의 지원하에 북한에 김일성정권이 들어 서자, 1948년 8월 15일에

총선거로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 유일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 중심이 된

항일인사들을 대한민국 정부의 내각으로 구성하면서

종북극좌세력 토벌에 적극 나서게 된다.


월남 후 서울에서 스승 유영모와 재회한 함석헌.
유영모로부터 씨알이란 용어를 받아들인

그는 그 때부터 씨알사상을 개념화하고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씨알의 '씨'는 낱개로서의 씨앗을 '알'은 그 속에 담긴 알맹이를 의미한다.
씨알사상은 오천년 민족사를 일으킨 불꽃같은 것이

씨앗인 각자의 민중속에 알맹이처럼 들어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역사또한 '민중'

즉, 씨알들의 내부에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재순 한신대 신학과 교수>


전통적인 유교에서는 씨알이나 백성이나 국민을 어리석고

어린 못난사람으로 보통 소인으로 이렇게 얘길하지 않습니까?
어리석고 어린 존재로 이렇게 보는데... 그 유영모 선생님은 정반대로

어버이처럼 어른으로 씨알을 풀이했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놀라운 것이고

그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함석헌 선생님께서는

민의를 가르키는 말로 '씨알'이란 말을 이렇게 사용하게 됐죠.

<김경재 한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국가를 위해서 시민이나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시민 더 나아 가서

함선생님은 하나하나의 생명체인 씨알들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고

그들을 위해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순서를 뒤바꿔 놔서

진정한 의미로서 이제 우리 한국사회에 근대 시민정신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신 분이다.
그렇게 봅니다.

이로서 씨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함석헌
그는 초교파단체인 YMCA를 중심으로

각 학교와 단체들에서 성서강문을 하며 씨알사상을 전파해 나간다.


그리고 같은 민족이면서도 반으로 나뉘어 서로의 이념과 입장만을 내세우는

남북한 분단정권의 실상을 바라 보며 한국전쟁을 예언하는 듯한 말을 남긴다.

<김용준>

지금도 그 생생하게 기억을 하는데, 왜들 이러지

...살짝 지글지글 타오르고 있는 이 화산이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위에 살짝 덮힌 그 위에서 이제 언제 폭발할 줄 알고

이렇게 야단들이지... 이 야단들이냐 그러구 이제 그...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이제 그러구 나서 6.25가 터지지 않습니까?

3년동안 계속된 남북한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된다.

무려 600여만명의 사상자를 낸 이 전쟁에 큰 충격을 받은

함석헌은 반전평화주의자로서의 면모를 키워 나간다.


한국전쟁 이후 기독교인이였던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정권을

강화시키는데 기독교인들을 우선적으로 선별해 미군의 구호품을 나눠 준다.

대다수 민중들의 굶주림에 냉담한 채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쏟는 한국교회를 바라 보면서 함석헌은 강한 비판의식을 갖게 된다.

 

*수평선을 넘어

그는 '대선언'이란 시를 통해 한국교회를 위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이렇게 선언한다.

네 기독교인 이단자가 되리라.
산에야 어디 땅끝이 있으리오.
그 곳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친 헛깨비일 뿐이리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삶은 그것보다 더 위대하다.
삶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

당시 함선헌이 발표한 시<수평선을 넘어>중에서




다석 류영모(柳永模 1890년 3월 13일 ~ 1981년 2월 3일, 서울 출생)

왼쪽이 류영모, 오른쪽이 그의 제자 함석헌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다석 유영모(1890~1981·왼쪽 사진)는 손꼽히는 ‘기인’이다. 160㎝의 단구의 몸으로 서울 구기동에서 농사를 짓고 벌을 치며 전깃불도 없이 살던 다석은 쉰둘이 되자 간디처럼 아내와 해혼(부부 성관계를 그만둠)을 선언한 뒤 늘 무릎을 꿇고 앉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널빤지에서 잠을 자면서 철저히 고행했다.

다석은 서울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며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배웠다. 다석이 처음 교회에 나간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 다석은 정식 학교로는 요즘 중학교 2학년밖에 마치지 않았지만 사물의 이치를 통찰하는 데 일찍부터 천재적이었다. 짧은 ‘가방 끈’으로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스무 살부터 2년간 교사를 했던 그를 10년 뒤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이 교장으로 초빙한 것도 다석의 탁월성을 간파한 때문이었다.

향교를 교실로 사용했던 오산학교는 다석이 스물에 부임하기 전까지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교적 학풍이었다. 그런 오산학교에 기독교의 씨앗을 심은 이가 바로 다석이었다. 약관 다석의 기독교 강의를 40대의 남강이 경청했고, 마침내 오산학교를 기독교 사학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때까지 다석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린 보혈로써 속죄 받는다는 십자가 신앙’에 충실했다.

 

그러나 스물둘에 두살 아래 동생 영묵이 죽고, 도쿄에서 1년 동안 유학하는 사이 다양한 학문 세계를 접하고 강연을 들으면서 관점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단재 신채호의 권유로 노자와 불경을 섭렵했고, 춘원 이광수가 가져다준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동서양을 넘어선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의 3대 천재’로 꼽히던 다석은 2000년 동안 형성된 교리와 신학은 물론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조차 벗어버린 눈으로 성경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때 다석은 사도신경에 입각한 교의신학을 벗고 순수한 ‘예수의 가르침의 정수’로 귀환하고자 했다.

 

동서양의 경전을 꿰뚫어보며 수도를 쉬지 않은 다석은 마침내 쉰둘에 육체와 욕망에 붙잡혀 살아온 제나(몸과 마음을 나로 믿는 개체)가 아니라 우주에 가득 찬 허공과 하나님의 참 얼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 뒤 다석은 예수를 ‘참 하나님’이 아니라 ‘참 사람’으로 보았다. 예수 혼자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얼의 씨를 키워 로고스의 성령이 참나라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얼의 씨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사람이 이를 깨달으면 이 세상 그대로가 하늘나라이며, 몸이 죽고 안 죽고에 상관 없이 영생한다는 것이었다.

다석은 스님들보다 불경에 달통하고, 도교인보다 노자 장자에 도통했지만, 개종하지 않았다. 동서양을 모두 회통한 뒤에도 다석은 예수를 자신이 본받을 궁극의 선생이자 가장 큰 스승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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