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단고기-고구려본기]"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산월.좌월이있었다. 문자명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양자강이남의 홍콩지역)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고대 고구려.백제.신라사는 대륙과 바다를 유기체적으로 연결하여 역동적으로 분석해야 바로 이해될 수 있다. 서해와 발해만 주도권을 고구려가 잡느냐 백제가 잡느냐에 따라서 지나동해안지역의 지배구도가 달라졌다 광개토태왕시기부터 고구려에게 밀리던 백제가 동성대왕 시기에 다시 지나동해안 지역을 회복했으나, 동성대왕이 산동지역에서 웅진의 백가세력에게 시해당한 이후 지나동해안 백제군(담로)세력은 고구려에 통합되었다. 신라의 경우도 한반도 동부에 머문 나라가 아니라, 마한의 해양세력인 석탈해가 사로왕이 되면서 남지해를 건너 월주지역에 영토를 개척하여 한반도신라인들이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그러나,역시 지나땅에서도 고구려.백제의 강성함에 짓눌러 살아야 했다.
다물이 국시인 고구려 문자태왕시기 고구려/단군한국의 고유 영토임을 증명하는 지도다 그리고 동방의인이 출현한 한민족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회복하게 될 코리아의 가까운 미래지도
광개토대왕이 고구려를 수없이 침략한 모용선비족의 연나라에 대해 즉위한 후에 연나라 숙군성을 공격하자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기록이 전한다. 당시 중국대륙에서 고구려의 세력판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 북한에 있다. 바로 덕흥리 고분이다. 평안남도 대안시에 있는 덕흥리 고분이 발견된 것은 지난 1976년이다. 발견 이후 지금까지 무덤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두고 논란이 많은 곳이다. 당시 고구려로 들어가 보자. 벽면에 보이는 이가 무덤의 주인인 진이다. 덕흥리 고분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덤에 쓰여진 글자때문이다. 무덤의 주인이 사망한 해를 보면 광개토대왕때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영락 18년이라는 광개토대왕의 연호를 쓰고 있다. 또 무덤주인이 역임한 관직 가운데 소대형은 고구려의 관직이다.
그런데 문제는 유주자사다. 유주자사를 지냈다는 무덤의 주인. 무덤엔 주인공의 살아새전 모습을 자세히 그려두고 있다. 무덤주인을 향해 늘어서서 인사하는 이들이 보인다. 각 인물마다 그가 다스리는 지역을 명시해놓았다. 이들은 모두 지방을 다스리던 통치자들로 태수였다. 그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앞자리에 서있던 이 신하는 연군태수다. 연군은 북경의 동서쪽에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중에는 현재 북경부근으로 비정되는 범양태수도 있다. 이 밖에도 북경 일대에 상곡, 어양, 광령, 대군 태수들도 자리를 같이 했었다. 이들은 모두 유주자사가 다스리는 지역의 지방통치자들인 것이다. 유주자사 진, 이렇게 무덤에 그림이나 글씨를 보면 무덤의 주인이 북경지역을 다스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로 이때문에 고구려가 한때는 북경지역까지 실제로 지배했다는 의견이 학계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수수께끼의 덕흥리 고분, 덕흥리 고분은 어떤 형태로든 고구려의 영향력이 북경지방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때 고구려 영토는 요동정도로만 알려져있다. 하지만 고구려의 세력권은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북부여에도 고구려는 지방관을 파견해서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또 동쪽에 있는 동부여도 고구려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비려전을 보면 당시 북쪽으로는 지금의 내몽고까지도 고구려의 영향권 안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또 한때는 서쪽으로 북경까지도 고구려의 영향이 미쳤다.
북경 순의구에 있는 고려영진 인민정부
북경 동북쪽 순의구(順義區)에 고려영(高麗營)이란 곳이 있다.
고려영(高麗營)은 구체적인 유적지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고려영’은 ‘고려의 군영‘이란 뜻이다. 하지만 ’고려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려영에 대해 처음으로 주목한 이는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安市城)에서 막혀 쩔쩔매고 있는 동안,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내몽고를 우회하여 지금의 북경지역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고려영은 이때 세운 군영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사에서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지만, 재야사학자들 사이에 호소력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적은 내용이 주목을 끈다. 박지원은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일찍이 북경의 동악묘(東岳廟)에서 5리 정도 위치한 황량대(謊糧臺)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짓으로 곡식 창고를 만들어서 적을 속이려고 했다고 기록하였다. 청나라 때 고조우(顧祖禹)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라는 지리서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이하 생략
북경 고구려 유적 답사기 북경, 그곳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북경 일대까지 진출한 강대한 독립국가, 고구려! 묻혀 있던 고구려 역사의 실체를 드러내다
❙분류 : 역사 / 북경 고구려유적 답사기 ❙지은이 : 김호림 ❙판형 : 변형판(168*225) ❙발행일 : 2012년 3월 28일 ❙면수 : 380쪽 ❙ISBN : 978-89-6327-188-0
본문 올컬러, 국내외 처음 공개되는 고구려 유적 사진 수록!
“답사를 통해 새롭게 만난 고구려성은 대부분 연산 기슭에 위치, 중원에서 요동으로 통하는 하북성 동부의 요로에 포진되어 있었다. 이런 성곽들은 고구려의 전방방어체계를 이루는 전연지대前緣地帶의 군사 시설물로, 고구려가 중원의 세력을 감시하고 그들의 침입을 맨 먼저 감지하는 ‘촉각觸角’이었다고 볼 수 있다.”
1. 산해관 남쪽의 고구려유적을 찾아서
대륙 저쪽의 산과 들에는 백의겨레의 옛 모습이 비껴있다. 촌락과 성곽, 사찰, 탑, 우물 그리고 산과 강, 섬, 호수, 바위, 나무에는 백의겨레의 자취가 깃들어있다. 옛 땅에 남아있는 지명은 그 천년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북경에는 황제가 살았다고 하는 자금성 못지않게 호기심을 끄는 게 있다고 한다. 그것은 중국의 수도 북경 인근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고려’라는 이름의 지명들이다. 북경 동쪽 근교에 고려마을이라는 의미의 ‘고려장高麗庄’이 있으며 북쪽 근교에 고려군대의 주둔지라는 의미의 ‘고려영高麗營’이 있다. 저자가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명 ‘고려장’과 ‘고려영’에서 등장하는 ‘고려’는 고구려의 약칭이었다. 고구려가 어찌하여 이역의 수도까지 와서 마을을 짓고 군영을 설치하였을까…… 그 뒤에 숨은 이야기를 찾기 위해 시작한 10여 년의 긴 답사의 산물이 바로 이 책이다. ‘고려’라는 이름의 지명이 한두 개에 그친 게 아니라 마치 넝쿨에 매달린 열매처럼 연달아 나타났던 것이다. ‘고려포高麗浦’, ‘고려동高麗洞’, ‘고려정高麗井’ …… ‘고려’라는 이름은 중국 대륙의 한복판에도 깊이 박혀 있었다. 양자강 일대의 옛 수도 남경에 ‘고려산高驪山’이 있었고 진시황의 병마용으로 유명한 서안에 ‘고려거高麗渠’라는 마을이 있다.
저자는 처음에 산해관 남쪽에서 나타나는 이런 지명을 모두 당나라 때 이주, 유배되었던 고구려 유민과 포로들의 흔적 정도로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라는 이름의 지명 전부를 그렇게 쉽게 해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나의 예로 ‘고려성高麗城’을 당나라에 끌려온 고구려 유민이나 포로들의 거주지라고 하는 것이다. 솔직히 ‘고려성’을 ‘고려인 수용소’로 우기는 이런 황당한 주장은 억지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성城’, 다시 말하면 성의 영향력 범위를 그 나라의 영토로 확정지었기 때문이다.
2. 지명을 따라 찾은 전설 같은 고구려의 이야기
지명은 토착 원주민들의 생활의 반영이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들은 단순한 전설이나 민간설화가 아니라 그 고장의 진실한 역사를 투영하고 있다. 역사적 사건은 지명으로 인하여 문헌보다 더 오랫동안 또는 뚜렷하게 남게 된다. 산해관 남쪽에 남아 있는 ‘고려’의 지명은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얽힌 많은 비밀을 풀어나갈 수 있는 키워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고려’라는 이름이 들어 있지 않는 다른 지명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적지 않은 지명이 고구려와 직․간접적인 상관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료가 몹시 결여된 상황에서 이런 지명의 역할은 극명하게 두드러지고 있다. 옛 지명을 추적하는 현장에는 고구려인은 물론 고구려와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는 전대의 상나라 유민과 후대의 발해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고구려의 적석총이 있었다고 하는 ‘고려성’이 있었으며 기자箕子가 살고 있었다고 하는 ‘조선성朝鮮城’이 있었고 말갈인들이 와서 이뤘다고 하는 마을 ‘발해진渤海鎭’이 있었다. 또 고구려와 같은 시대의 신라인들이 살고 있던 신라채新羅寨가 있었다. 한편 고구려와 아무런 연줄이 없는 것 같은 지명도 적지 않았다. 하북성 동부의 신나채는 새로 옮긴 마을이라는 의미로, 실은 당나라 정관연간(627~649년) 지금의 노룡현 진관향 지역에 살고 있던 고구려인들이 한데 모여서 생긴 마을이라고 한다. 또 하채 마을은 군영을 세운다는 의미로, 당나라 설인귀의 군대가 요동으로 고구려를 치러 갈 때 동쪽의 토이산을 공략하기 위해 이곳에 주둔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옛 지명에는 그야말로 전설 같은 고구려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3. 고구려로 가는 천년의 길
당시의 영토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었다. 진한 이래 황하 이북 특히 하북성 지역은 삼국, 동진과 서진, 5호16국, 남북조 등 여러 시기에 걸쳐 퍼즐처럼 사분오열 되었다. 중원은 수시로 군웅이 각축하는 혼란한 국면에 빠졌고 또 북방민족의 정권과 밀고 당기는 쟁투를 빈번하게 벌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귀속은 춘삼월의 날씨처럼 변화무상하였으며 서로의 경계가 톱날처럼 들쭉날쭉하였다. 고구려 역시 여러 시대나 사회에 따라 강역이 동서로 넓어지기도 했고 또 남북으로 좁아지기도 했다. 이 와중에 산해관 남쪽에 나타나는 유수의 ‘고려성’은 고구려가 분명히 어느 한 시기 하북성의 많은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했다는 증거물로 된다. 18세기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갔던 박지원의 여행기록 열하일기를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열하는 지금의 하북성 동부의 승덕承德을 말한다. 이 여행기록에 따르면 열하에 있는 태학 대성문 밖의 동쪽 담에 건륭 43년(1778년) 황제가 내린 글을 새겨서 액자처럼 박아두었다고 한다. 거기에 이르기를, “열하지방은 고북구古北口 장성의 북쪽이며…… 진한 이래로 이곳은 중국의 판도에 들어오지 않았고 위나라 때 안주와 영주 두 고을을 세웠으며 당나라 때는 영주 도독부를 두었으나 먼 지방에 옛 명칭을 그대로 따서 지방 장관을 둔 것에 불과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하북성 동부지역에는 오랜 기간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민족의 정권이 존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답사를 통해 새롭게 만난 고구려성은 대부분 연산 기슭에 위치, 중원에서 요동으로 통하는 하북성 동부의 요로에 포진되어 있었다. 이런 성곽들은 고구려의 전방방어체계를 이루는 전연지대前緣地帶의 군사 시설물로, 고구려가 중원의 세력을 감시하고 그들의 침입을 맨 먼저 감지하는 ‘촉각觸角’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답사 도중에 고조선의 강이라고 하는 ‘조선하朝鮮河’에 발목을 적셨고, 고구려 경계의 비석이나 다름없는 ‘지경바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고구려의 성곽은 심지어 유주幽州(지금의 북경) 일대를 지나 하북성의 중남부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을 밝혀 내었다. 실제 고구려는 산해관 남쪽 고조선의 옛 땅에 한때 고토수복의 ‘다물多勿’ 깃발을 꽂았으며 훗날에는 또 그들의 유민과 후손들이 이 고장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꿨던 것이다.
4. 기록이 없고 증거물이 없는 역사는 허구의 전설로 남는다
여전히 중국 내 고구려 유적은 많은 부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래서 이런저런 설을 두고 학계는 지금도 시야비야 논쟁의 열풍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고구려의 서쪽경계가 만주의 요하遼河 일대이며 기껏해야 대릉하大凌河 일대에 미쳤다는 주장이 예나 지금이나 계속 정설로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의 강역이 북경 근처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걸 그냥 잘못된 속설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무작정 탓할 수만도 없다. 문헌으로만 증명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부족하고 또 산해관 남쪽의 고구려 유적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유적의 대부분은 자연과 인위적인 파괴로 소실되었거나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었다. 이마저 상당 부분의 기록은 근래에 출판된 지명지地名志나 현지縣志 등 지방문헌에서 자의든 타의든 적지 않게 누락되고 있다. 촌락과 성곽, 사찰, 섬, 우물, 나무 등에 담겨있는 옛 이야기는 그렇게 무심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기록이 없고 증거물이 없는 역사는 제 아무리 고집한들 더는 진실이 아니라 허구의 전설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6. 지은이 김호림(jinhulin@hanmail.net)
김호림(jinhulin@hanmail.net) 1965년 중국 연길시 소영자에서 태어났다. 연변대학교를 졸업(1989년)하고 현재 북경의 중앙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이민 3세로 조선족, 동포, 교포, 한겨레라고 불리는 ‘나’의 뿌리를 찾아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중국 대륙에 남긴 발자취를 따라 답사하고 기사화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평양 중앙방송에서 방송 연수를 마치고 이어 서울 <조선일보> 방일영문화재단 펠로우쉽으로 있으면서 백두산 천지에서 한라산 백록담까지 추억의 긴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펴낸 책으로는 고향 연변의 고구려 유적 곳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꼼꼼히 기록한 연변 고구려유적 답사기인 간도의 용두레 우물에 묻힌 고구려 성곽(2011)이 있다.
자유 시장 복지 공존의 코리아
지구촌 한민족 통합과 인류구원
불멸의 이순신 OST -전곡 듣기 1.타이틀 2.불멸의 테마 3.의혹 4.바다에서(오보에 솔로) 5.전쟁의 기운 6.연민의 마음(piano.) 7.우정의 테마 8.의심 9.밀려오는 먹구름 10.조선수군 11.출전 12.진격의 깃발 13.승리의 바다 14.회상의 테마 15.비풍가(마야) 16.기습 17.노량에서 18.전쟁의 운명 19.죽음의 바다
[불멸의 이순신 OST - 전곡듣기]
코리아(고구려) 국시는 단군한국의
영토와 경천애인의 정신을 모두
회복하겠다는 다물이다! 국제적 국호가
코리아인 대한민국의 미래 역시 다물이다
돈황석굴 제249굴 고구려수렵도
광개토태황의 감숙성 정벌 고증
[광개토태왕비]토욕(감숙성) 정벌
단군한국(대부여)의 황통과 국통을 계승한
고구려가 회복하고자 한 단군한국의 영토
태왕께서 단군한국의 서쪽 끝인 감숙성까지 다물하시다
단군한국=>동명부여족=>백제=>일본
일본백제의 대동아 공영권의 실체는 고대 단군한국 영토
우리가 그릇이 그리도 작더냐!
옹졸하니 분열과 망국이다! 우리는
대륙을 누비던 천손족이 아니더냐!
온누리를 비추는 해민족의 정신과
기상을 고구려 상무정신으로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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