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틸라 제국을 계승한 아바르 제국의 고구려 투구)
광개토태왕의 이름은 아틸라였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를 떠나 동유럽으로 가서 로마제국을 격파했다.
이것은 2007년 나광팔이란 디시 역갤러가 주장하여 네이버 ,디시 역사계를 충격으로 몰아갔던 주장이었다.
나는 이 주장을 나광팔님을 통해 직접 접한 후 여러모로 자료를 찾아보며 탐구하기 시작했다.
좀 처럼 증거들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전국의 박물관,유적들을 돌아다니며 삼국시대 갑옷,투구를
보고 다큐들을 보고 책들 200여권을 사며 생각해봤으나 좀처럼 종합적인 결론을 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요번 한 달 동안에 순식간에 다 생각해내고 다 정리하여 글로 올리는 바이다.
지금부터 연구해놓은 증거들을 차곡 차곡 제시하겠다.
이전 글에서 난 광개토태왕이 선비족 출신 왕자임을 고증하였다. http://ragwangfal.egloos.com/1687426
이번에는 광개토태왕의 이름에 대해 고증할 차례다.
광개토태왕비에는 이상하게도 광개토의 이름을 적어놓지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광개토의 이름을 '담덕(談德)'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중국 기록은 이것과는 전혀 다르게 적혀있다.
"(동진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10년(385)에 고구려가 요동·현도의 군(郡)을 공격하여 빼앗자,
후연의 모용수(慕容垂)가 그의 아우 모용농(慕容農)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고 두 군(郡)을 다시 회복하였다.
모용수가 죽자 아들인 모용보가 즉위하여 고구려왕 안(安=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으로 삼고
요동(遼東)·대방(帶方) 2국의 왕으로 봉하였으며, 안(安)은 처음으로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그 후 요동군을 빼앗아 차지하였다(後略有遼東郡)." - 양서(梁書)』권54 고구려전과 『북사(北史)』권94 고려전(高麗傳
광개토왕의 이름은 안(安)이라고 적혀 있다.
광개토태왕비의 시호에서도 광개토태왕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긴 하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고 비석은 적고 있다.
비록 시호이지만 이 시호 속에 광개토의 이름이 들어가있다. 국강상은 무덤 지역. 광개토경평은 땅을 크게 넓히고 평정했다.
안(安)은 이름. 호태왕은 고구려 태왕 중에서도 제일 높은 태왕이란 뜻이다.(호태왕이란건 대황제란 의미.)
안(安)......, 그리고 담덕(談德)....., 이 두 이름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담덕은 뭔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추정해보자면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보면
내몽고지방에서 위세를 떨친 옹칸의 부족 이름이 '텐둑tENDUC'으로 나온다.
산해경에 의하면요서에 조선과 천독이 있었다고한다.
천독이 중국발음으로 톈독이다. 즉 내몽고지방의 톈독부족과 모용씨가 연관이 있었고
담덕은 톈독 부족의 이름을 따 자신의 이름 담덕으로 한거네. 담이 일본발음으로 '탄'이 된다.
이 톈독과 선비족은 뭔가 모종의 관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해본다.
그러나 담덕보다는 안(安)이 태왕비같은 고구려의 금석비문에서 자주 쓰이고 그리고 중국사료같은 대외적 사료에서도
광개토의 이름은 안安이라 나오므로 안安이 더 직접적 이름이라 보고 수사를 계속 진행해본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4~5세기 고구려 무사)
광개토가 죽었다는 서기 413년으로부터 21년 후인 서기 434년에 동유럽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아틸라....,
물론 그전부터 태어나 그 땅에 살고있다고 전승들이 말하지만 확실하지가 않다. 아틸라에 대한건 적국에서 적은 기록들만
있는지라 명확치않은 부분이 많다. 아틸라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후 삽시간에 빠르게 영토를 확장시켜간다.
아틸라가 동유럽 초토화하고, 독일 정복하고 로마까지 진격하여 교황의 항복을 받아낸다. 교황의 항복을 받고 미련없이
쿨하게 돌아가는 모습은이나, 로마에 다다르기까지 수십개가 넘는 성들을 빠르게 쉭쉭쉭쉭 돌파하며 깨부셔버리는건
마치 백제 58개성을 점령하고 백제 도성 포위 후 백제 아신왕 항복 받아내고 백제 멸망 안시키고 쿨하게
돌아가는 광개토의 위용과 매우 비슷하다.
(유럽의 옛날 그림들에서 자주 나오는 전형적인 아틸라의 기병대의 모습. 머리에 날개 장식을 달고 있는 것이 인상적인데.
이것은 4~5세기 고구려 개마무사의 투구에 붙여지는 날개 장식과 똑같기 때문이다.)
태왕릉(고국원왕의 무덤 혹은 광개토태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금제 날개장식. 고구려 투구에 붙여지는 장식이다.
아틸라와 광개토왕의 이름 '안(安)' 이 둘은 과연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아달라 이사금'은 서기2세기경의 강력한 정복자가 나온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아달라의 모습도 신라의 영토를 묵경새재,죽령의 소백산맥까지 넓히고 백제를 크게 쳐 이겨
서북영토까지 넓히고 삼국유사에선 바다 건너로 왜국에까지 신라인을 보내 일본을 신라인 출신 왕,여왕이 다스리게
되었다는 모습까지 나온다.
"계립령 길을 개통하였다. 감물,마산 2개 현을 신설하였다. 3월에 장령진을 순행하여 수비병을 위로하고
각각 군복을 주었다. 5년 봄 3월에 죽령을 개통하였다. .... 군사 2만명을 거느리고서 백제를 치게 하고 왕은 또
기병 8천명을 인솔하여 한수漢水로부터 육박하니 백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사로잡았던 남녀를 돌려보내고 화친을
빌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제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즉위 4년 정유(157)에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미역 종류)를 따고 있던 중, 갑자기 한 바위( 혹은 한 고기라고도 한다. )
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나라 사람들이 연오를 보고「이는 비상한 사람이다.」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1
아달라(阿達羅) 이사금의 외모는 전형적인 흉노,선비족의 얼굴이다.
"아달라 이사금은 신장은 7척이다. 코가 우뚝하고 기이한 상을 지녔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매우 큰 기에 우뚝한 코에 기이한 외모....,
(로마의 동전에 나오는 훈족 아틸라의 초상화)
(5세기 말~6세기 초반 신라 적석목곽묘 '금녕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상 토기. 흉노,선비의 전통 동복(청동솥)을
말 등에 매달고 흉노,선비족의 높은 코를 하고 있는 신라의 소년 왕자다.)
그런데 아달라란 인물 자체가 완전 허구의 인물이다. 아달라라는 이름은 훈족 아틸라와 연결되는 이름이다. 하지만
서기 2세기경에 경주에서 그런 북방몽고족의 유입 증거는 발견되지않는다.
서기 2세기에는 그런 몽고 계통의 적석목곽묘는 조영되지 못했고 신라는 경주 일대의 소국에 불과했다.
그럼 아틸라와 아달라의 이름 유사성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고고학적으로 살펴보자.
신라 경주에서 5세기 말 출현하는 황남대총이란 대형 무덤은 돌무지 무덤 + 목곽묘 묘제(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를
사용하는데.
이런 무덤 형식은 이전 경주,경상도에선 전혀 발견할 수 할 수 없는 무덤 양식이었다.
신라에서 금관이 발견된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같은 적석목곽무덤은 모두 5~6세기이다.
(5~6세기 경주 적석목곽묘 집합군)
(경주 5세기 전반 황남대총 발굴 모습)
(적석목곽묘 축조 과정)
(5~6세기 경주 5세기 중엽의 서봉총 금관. 여왕의 무덤이다.)
(황남대총 금관)
(경주시 황오동 361번지 4~6세기 무렵 신라 지배층 공동 묘지 쪽샘지구 목곽묘에서 출토된 중장기병의 갑옷,마구)
(경주 황남대총 금동 말 안장)
"3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조성된 삼연 분묘에는 한나라 때 중국 중원 요소도 반영되어 있으나
영락(보요) 장식의 장신구와 마구의 부장은 선비족의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영락 장식 장신구와 마구의 부장은 한반도 삼국시대 고분에서도 공통되며, 특히 황남대총 남분 부장품 중 장신구와 마구,
그리고 훼기나 장식마구의 매납 등은 삼연 분묘의 장속에서도 관찰되는 특징으로 황남대총 남분의 축조에 삼연의 영향이
미쳤음을 시사한다.
삼연분묘의 영향은 무덤의 계보를 판단하는데 유의한 구조에서는 관찰되지 않고 마구,장신구 등의 부장품에서 관찰된다.
황남대총 남분의 삼연 문물과 관련을 보여주는 부장품들은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우호관계를 고려해볼 때 고구려를
통해 유입된 삼연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 중국 삼연 분묘와 경주 황남대총남분의 비교고찰 -강현숙
"황남대총 남분은 매장부가 지상에 놓인 분묘일체형 무덤으로 경주 일대의 선행 무덤에서 확인되지않았다.
황남대총 남분과 같은 구조의 무덤은 한반도에서 찾을 수 없다. .........." 중국 삼연 분묘와 경주 황남대총남분의 비교고찰 -강현숙
"황남대총 남분에서의 특징 중 선행 무덤에서 관찰되지 않는 요소는 분구 정상부 장식마구의 매납,토기내 바둑알 크기
돌의 부장, 주 부장공간에 장식대도,도끼날 철촉,금,은,금동장신구와 금은금동,청동 용기 및 유리기 등의 부장.
이 중 금속용기나 유리기의 부장과 장식마구를 중시여기거나 훼기 등의 장속은 중국 북방의 선비 무덤에서 관찰되는
요소.....
중국 삼연 무덤과 경주 황남대총 남분은 목곽을 사용하고 있다는게 공통점이다 ......" 중국 삼연 분묘와 경주 황남대총남분의 비교고찰 -강현숙
놀랍게도 황남대총에서 확인된건 모용씨 선비족의 요서 삼연문화(三燕文化)의 황금 장신구,마구의 다량 부장,장식마구의 매납 풍습,청동이나 철무기를 구부려 부장하는 훼기 풍습,유리기의 부장,14명을 순장한 대량 순장 풍습,황금 숭배 문화의 출현이었다.
무엇보다 몽골,선비에서 확인되는 북방 유목민족의 금관,금 장신구를 다량으로 만드는.., 황금을 숭배하는 문화가
확인된다는 것이다.
(모용씨 선비족의 삼연 문화三燕 文化 목곽묘와 목곽묘에서 출토된 유물들)
(모용씨 선비족의 삼연 문화三燕 文化 금동 말 안장)
(모용씨 선비족의 삼연 문화三燕 文化 황금관(금제 보요관) )
(삼연문화 중장기병의 비늘갑주. 광개토태왕비에도 후연의 군대는 개갑기병으로 묘사되어 있다. )
(삼연 중장기병)
(모용씨 선비족의 삼연 문화三燕 文化 조양 십이대영자 88M1 무덤에서 출토된 삼연 문화 마면투구)
(모용씨 선비족의 삼연 문화三燕 文化 조양 십이대영자 88M1 무덤에서 출토된 삼연 문화 마면투구)
이런 고고학적 정황은 사서에서도 그대로 확인 된다.
"(4세기 후엽) 신라는 눈부신 황금의 나라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권8卷八 중애천황
2~3세기까지 경상북도,경상남도에는 황금을 숭배하는 문화가 없었다. 4세기 후엽에 갑자기 등장한다.
"전진 황제 부견이 신라 사신 위두에게 묻기를 듣기에 "신라의 일이 예전과 다르다고 하니 무슨 일이 있느냐."
위두가 대답하길 "신라 역시 중국처럼 시대가 변하고 명호가 바뀌니 어찌 옛날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 -태평어람
황남대총 등 경주의 대형 적석목곽분들이 조영될 당시 중국대륙은 5호 16국 시대로 5개의 오랑캐들이 16개의 나라들을
세우며 위,촉,오를 통일한 진나라를 중국 남방 구석으로 쫓아내 버리고 자기네들끼리 신나게 싸우고 있었다.
신라는 그런 중국같은 상황이 자기네들한테도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선비족 혹은 흉노족이 경주에 최고의 지배자로서 등장한 것이었다.
남시베리아의 파지리크 쿠르간 고분군,몽골 북부의 노인올라 고분군은 흉노 계통 무덤으로
이 무덤들은 전형적인 '적석목곽묘'다.
(흉노 노인올라고분군 적석목곽묘)
그리고 몽고의 흉노계 고분들에서 출토되는 금관의 생김새는 한자의 '뫼 산(山)'자를 위아래로 붙이고
좌우에 사슴뿔 같은 가지를 세워 뼈대를 만든 뒤, 거기에 곡옥과 새의 날개 같은 장식을 달았다.
이것은 신라와 공통점인 부분들이다.
모용씨 선비족은 적석목곽묘가 아니라 목곽묘를 쓰고 있다. 돌무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모용씨 선비족의 요서 삼연문화 목곽묘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신라와 비슷한 금관 양식, 장신구,
신라의 중장기병의 기원이 되는 선비족 중장기병의 유물들도 출토된다.
이런 고고학적 정황은 사서에서도 그대로 확인 된다.
"(4세기 후엽) 신라는 눈부신 황금의 나라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권8卷八 중애천황
"(2~3세기) 진한 사람들(신라의 전신前身)은 구슬을 귀하게 여기고 금·은과 비단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 삼국지 위서 한전
2~3세기까지 경상북도,경상남도에는 황금을 숭배하는 문화가 없었다. 4세기 후엽에 갑자기 등장한다.
"전진 황제 부견이 신라 사신 위두에게 묻기를 듣기에 "신라의 일이 예전과 다르다고하니 무슨 일이 있느냐."
위두가 대답하길 "신라 역시 중국처럼 시대가 변하고 명호(名號)가 바뀌니 어찌 옛날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 -태평어람
황남대총 등 경주의 대형 적석목곽분들이 조영될 당시 중국대륙은 5호 16국 시대로 5개의 흉노,갈,저,선비족 등
북방 유목민족들이 16개의 나라들을 세우며 위,촉,오를 통일한 진나라를 중국 남방 구석으로 쫓아내버리고
자기네들끼리 신나게 싸우고 있었다. 신라는 그런 중국같은 상황이 자기네들한테도 일어나고있다고 말한다.
북방유목민족이 세운 전진 왕조처럼 신라를 시대가 변하게하고 이름과 호가 바뀌게한 신라의 지배층은
황금을 숭배하는 북방유목민족이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면 서기 4세기 후엽까지만 해도 신라는 강력한 왕권이 탄생하지못한 '사로국'이라는 경주 일대의
한 소국이었다. 이 시기의 묘제는 낙랑군의 영향을 받은 목곽묘 무덤이었다.
그런데 4세기 후엽~5세기에 몽고 계통의 적석목곽묘라는 대형 무덤이 등장하고 몽고,선비 계통의 황금제 금관,장신구
등이 다량으로 부장되고 중장기병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나타난다.
이 시기 중국 사서에 [신라新羅]라는 국호가 최초로 등장한다.
신라라는 국호를 중국의 '전진' 왕조에 최초로 알린 왕은 신라의 내물 마립간이다.
삼국사기에 그는 신라를 최초로 중앙집권,대형 왕조를 이룬 인물로 나온다.
마립간이란 왕호도 이 때 최초로 등장하는데. '마립간'의 유래에 대해서는 몽골에서 전설적 영웅이나 왕을 뜻하는
'메르겐'에서 유래했음이 제일 설득력있다.
황남대총 고분의 피장자는 60세 전후의 남자로 금동관,경흉식,금제 요대 등으로 성장하고 금동장 삼환루 환두대도를
착장한 상태로 매장됨. 내면이 붉은 칠漆관에 안치. 외관과 내곽 사이의 석단 남쪽 부분 상면에서 순장 인골이 확인.
이 사람은 KBC 역사스폐셜이나 역사학계에서 최초로 신라를 세운 내물 마립간으로 추정하고있다.
내물 마립간은 4세기 후엽에 갑자기 등장해 경주 일대로 원삼국시대 문화를 정복하고 원삼국시대 문화와
전혀 이질적인 적석목곽묘를 조영한다. 신라의 화려한 금관,금 장식구,순장 습속 그리고 이 시기 적석목곽묘에서
출토되는 중장기병 사람 갑옷,말갑옷 유물은 모두 선비족 문화인 삼연 문화(三燕 文化)와 겹쳐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찍이 일본의 '기마민족설 주창자' 에가미 나미오가 지적한대로 북방의 유목민족이 한반도로 이동해
자신들만의 왕조를 이룬 것이었고 그 무대는 경주였다.
몽고,선비에서 기마민족의 다량 유입이 경주로 유입되었다고 본다면 그 중간 통로는 당연히 바다가 아니라 고구려였을
것임은 당연하다. 학계 역시 고구려를 통해 삼연 문화가 경주로 유입되어 황남대총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연분묘의 영향은 무덤의 계보를 판단하는데 유의한 구조에서는 관찰되지 않고 마구,장신구 등의 부장품에서
관찰된다. 황남대총 남분의 삼연 문물과 관련을 보여주는 부장품들은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우호관계를
고려해볼 때 고구려를 통해 유입된 삼연의 영향으로 판단된다."- 중국 삼연 분묘와 경주 황남대총남분의 비교고찰 -강현숙
이전 글에 이미 말했듯 고국원왕부터 광개토태왕의 시기까지 고구려 적석총 고분군들에 모용씨 선비족 삼연 문화의
장신구,마구가 다량으로 출토된다. 이런 삼연 문화의 막대한 영향은 선비족이 고구려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증명한다.
(고구려 중장기병 : 고구려 4세기 황해도 안악 고분 벽화)
(4세기 중엽에서 4세기 후반까지의 고국원왕부터 소수림왕,고국양왕까지의 고구려 고분군에서
'삼연 문화(三燕 文化:3개의 연 즉 전연,후연,북연)' 즉 전연의 문화가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증거유물들이 많이 나왔는데.
전연 계통의 장식구,마구류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의 고구려 고분군단계(광개토태왕 시기)에 이르면 마구류,장신구에서 삼연문화의 영향이
더욱 더 커진다. )
알타이 파지리크 쿠르간 적석목곽묘 - > 노인올라 적석목곽묘 -> 요서 모용씨 선비족 삼연문화 목곽묘->
고구려 적석총의 삼연문화 -> 경주 황남대총으로 문화 전파 순서를 볼 수 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서기 342년 모용씨 선비족의 전연(前燕)에게 복속된 후 고국원왕의 다음 다음 왕인 고국양왕 때까지 평화 관계를 유지하다 전연에 뒤이어 일어난 모용씨 선비족의 후연(後燕)에 대항해 요동,현도군을 함락시키지만 다시 재탈취를 당하고 만다. 그 후 고구려와 후연은 다시 평화로운 관계가 되어 다시 복속된다.
내물 마립간에 고국양왕 말기에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고 고구려의 도움을 청하며, 광개토태왕은 내물마립간이
왜국에게 멸망당할뻔하자 5만 지원군을 보내줄 정도로 사이가 굉장히 친밀했다. 이것은 둘다 같은 삼연 문화를 공유하였기에
가능했다.
이런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우리는 '아틸라'같은 몽골계통의 이름이 어떻게 신라에서 소백산맥까지 영토를 넓힌
서기 2세기경의 '아달라' 왕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서기 2세기에는 그런 몽골 계통의 적석목곽묘는 조영되지 못했고 신라는 경주 일대의 소국에 불과했다.
4~5세기에 성립된 선비족 계통의 신라 왕조는 자신들의 근원을 좀 더 올려잡고 신라 토착 세력과의 연계를 위해
아달라 왕이라는 가공의 전설을 만들어내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아달라'란 이름이 동유럽에서는 로마를 정복하는 위대한 정복자의 이름 '아틸라'로 출현하고있는 것일까.
이것이 신라,고구려 광개토태왕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신라는 성립 초기부터 광개토태왕의 아버지 고국양왕과 그리고 광개토태왕에게 신하로 복속되어
광개토태왕비에서도 신라는 일찍부터 고구려의 속국이라고 적고 있다.
선비족 자체가 고구려를 통해 경주로 왔으니 무리도 아니다. 5세기 경주의 대형 고분에서 출토된 광개토태왕의 태왕太王
글자가 적힌 태왕호우'란 고구려계 유물은 광개토태왕의 영향력이 신라의 대형 무덤에 부장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아달라의 모습도 신라의 영토를 묵경새재,죽령의 소백산맥까지 넓히고 백제를 크게 쳐 이겨
한강에까지 다다르니 백제 왕이 화친을 구걸했다고 나온다.
서북영토까지 넓히고 삼국유사에선 바다 건너로 왜국에까지 신라인을 보내 일본을 신라인 출신 왕,여왕이 다스리게
되었다는 모습까지 나온다.
실제 광개토태왕비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고찰해보면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는 백제를 복속시키고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에까지 다다라 임나를 멸망시키고 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를 점령하고 신라인을 보내
다스리게 하는 모습이 나와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적히고 있다.
즉 아달라는 광개토왕을 모델로 하여 제작된 신라의 가상의 시조였다.
광개토왕은 자신의 이름을 아달라로 썻고 이걸 한자로 짧게 안安이라 기록했다.
광개토태왕비를 보면 서기 400년에 한반도 남부의 김해를 지배하는 왜(倭 : 임나)를 몰아낸 후
임나가 식민 통치하던 김해,부산 등의 가라(가야) 지역을 라인(羅人:가라인의 약칭. 즉 가야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는데.
이것을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이라는 문장으로 기록한다.
공교롭게도 안라安羅는 광개토의 이름 안安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 당시 공교롭게도 함안에는 안라(安羅)라는 가야가
임나에 이어 가라(가야)의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물론 안라의 세력은 김해,부산에 미치지는 못했으므로 비문의 '안라인(安羅人)'은 함안의 안라가야와는 관련없고,
안(安)은 동사로 불과하다. 라인(가라인)으로 하여금 지키게하여 그 일대를 안(安). 즉 안정시켰다는 뜻이다. 다라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함안의 안라가야는 안라인수병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하기 힘든 것 같다.
서기 5세기 초반에 함안에서는 '마갑총馬甲塚'이라는 수장급의 최고 지도자가 묻힌 대형 목곽묘가 조영되는데.
고구려의 중장기병 문화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것으로 광개토태왕의 임나 정벌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내 생각엔 둘 다인 것같다. 안라安羅는 말은 안라가야도 의미하고, 가라인들을 김해 부산에 배치해 지키게 안정시켰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이 안라(安羅)가 광개토태왕의 이름 안(安)과 아달라 아틸라를 연결시켜줄 제일 중요한 핵심이다.
이제 '아달라'왜 왜 광개토이고 왜 안安이고 왜 아틸라인지를 보자.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아달라의 한자를 아阿 달達 라羅로 적는다.
안라는 아라가야(阿那加耶)라고도 적는다.('아'가 안安으로 되는 예)
안라의 안安이 아阿로 변하는것은 광개토태왕의 이름이 아달라이고 아달라의 아(阿)가 안(安)으로도 적힐 수 있다는
아주 좋은 예시이며 광개토태왕의 이름이 실제 중국 사서에서 안安으로 적힌다는 점은 굉장히 중요하다.
자, 계속 살펴보자.
"安羅(안라)는 →"알"의 "ㄹ" 발음이 탈락하여 "아"로 발음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라의 안(安)은 원래는 '알'이란 발음이다. 그리고 '아'는 이것을 축약한 발음이다.
'알'은 무슨 뜻인가? 백제에서 한수(漢水) 즉 한강은 그 당시에 아리수(阿利水)라고 불렸다.
아리(阿利) = 한漢. 아리는 고대 한국어로 무슨 뜻일까? '크다'는 뜻이다.
한국의 고대어에서 '달達'이 '땅'을 의미한다는 건 확실한 거다.(아사달達,침미다례. 다례는 '달'을 한자로 좀 길게 쓴 거.)
그리고 한국 고대어에서 '라'는 곧 '강'을 의미하며 동시에 '나라'를 의미하며 그 나라의 영역도 의미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선 좀 더 직접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서기 500년대 초반 신라 지증 마립간에게)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시조께서 창업한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혹은 사라,혹은 신라라 하였는데 신 등이 생각건대, 신新은 덕업을 일신日新한다는 것이요,
라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그 국호를 정하는 것이 마땅한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신라에서 라(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아틸라 = 광개토)
이렇게해서 아,달,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그리고 아달라를 축약한 광개토왕의 한자식 이름은 안(安)이었다.
그리고 아,달,라는 고대 한국어로 풀어보면 크게(아阿,안安) 땅을 (달達) 넓힌(라羅) 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광개토태왕비에서는 광개토(廣開土:넓리 땅을 넓히다)라고 적히는 것이다.
그렇다. 광개토왕의 긴 이름은 바로 '아달라' 혹은 아틸라였다.
정리하겠다.
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왕 시기에 고구려는 신라를 도와주어 신라로 많은 선비족들이 유입하게하여
내물 메르겐 왕조를 탄생시켰고 신라는 광개토왕의 이름 아달라를 따와
서기 2세기경 자신들의 가상 시조인 아달라이사금을 만들었다.
아달라(광개토) 태왕
왕위에 올라 혼란스런 고구려를 안정시키고 백제를 맘껏 치고
백제 항복을 받아낸다. 하지만 광개토는 쿨하게 고구려로 돌아가서 백제에게 자비를 베푼다.
왜가 신라를 침략하여 신라 수도를 함락시키자 5만 보기병을 보내 같은 선비족인 신라를 구원하고
김해대성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와 전라도를 지배하던
왜倭(=임나)를 일본열도로 몰아낸 걸로도 모자라 끝까지 쫓아가서 다 작살을 내버리고 신라인들을 이주시켜 신라가
일본열도를 지배하게하여 고구려의 남방 평화를 이루어낸다.
그런데 새로 오른 후연의 황제 모용희가고구려가 커져가는 것에 불안해하여
전 황제 모용보의 뜻을 어기고 함부로 군을 움직여 고구려를 공격한다.아달라는 후연의
침략군들을 모조리 분쇄하고 북경 일대를 쳐서 고구려 땅으로 만들고 후연의 용성을 포위하여 쳐서 후연 개갑 중장기병 1만여명
을 깡그리 다 죽여버려 그 죄를 물었다. 그러나 후연은 멸망시키거나 고구려 땅으로 만들지않고 고구려 유민 모용운을 왕으로
세우고 본국으로 돌아온다. 시비를 계속 거는 동부여도 모조리 복속시켜 고구려의 평화를 이루어낸다.
(돟방에 더 이상 고구려를 침략하고 무시할 나라가 없는 무적강국이 되자) 아틸라는
아들인 장수왕에게 중앙집권할 것을 명하고 아달라는 자신의 가짜무덤 장군총
혹은 태왕릉을 만든 후 철갑기병들을 데리고 유연을 지나 동유럽으로 가서
자신의 이름 아달라를 계속 쓰며 '아틸라'로 로마인들에게 불리며
크게 명성을 떨쳤다.
로마 교황을 쳐서 수도 로마로까지 진군하며 동로마 독일 로마 연합 공격해도 상쾌하게 다 물리치고
로마로까지 향하며 가로막는 수십개의 성들을 쾌속으로 돌파하여 점령해버리고 로마에 당도하니 로마교황이 떨며
항복한다. 그러자 로마교황 항복만 받고 쿨하게 돌아가는 아달라의 모습은 진정 기독교인을 학살하는 악랄한 로마의 죄를
묻고 그냥 돌아가는 시원한 모습이었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아달라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 아달라의 이름의 뜻이 '크게 땅을 넓히다'이므로
그 뜻에 맞게 '광개토'라는 시호를 추증한다.
그리고 아틸라를 연호로 비슷한 발음으로 쓴게 바로 광개토태왕이 재위 때부터 재위 끝까지 계속 쓴
'영락(永樂)'이란 연호라고 추측된다. 재위 시 그를 영락대왕이라 불렀다는 것도 그런 추정에 좀더 무게를 실어준다.
고구려인들은 그를 '아틸라 태왕!' '아틸라 태왕!'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발음+연호의 개념을 도입해서 '영락'으로
부르게 한 것이다.
한편 아틸라가 동유럽에서 나이들어 죽은 후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아바르 제국(유연)이 고구려의 서북 지역
의 본거지를 떠나 동유럽으로 쳐들어와 아틸라의 의지를 이어받아 대제국을 이룬다.
아바르 제국의 시조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쿠리' 즉 고구려라는 뜻이었다. (돌궐은 고구려를 무쿠리라고 부른다.)
(아바르 제국의 고구려 투구)
(아바르 제국의 고구려 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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