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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전원책의 이것이 정치다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진행하는고품격 시사 토크쇼 시즌 2
정치권의 정쟁 정략에서 벗어나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을 분석하는
살아있는 정치 비평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전원책의 이것이정치다 - 시청소감

전원책의 이것이정치다 - 시청소감
연개소문은 이세민 쫒아 장안성에서 항복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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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8 윤*현 조회수 341

모본왕 '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왜 중공은 고구려(코리아)와 통일코리아을 두려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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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본왕 태원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5세기 고구려 전성기 시절에도 요하를 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 하는데,




AD49년에 고구려가 중국 대륙 깊숙한 산서성 태원을 공격하였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고구려국본기/모본왕 편]



고구려 전성기도 아닌 초기 즉 고구려 모본왕( AD48~53:고구려 5대왕, 대무신왕의 장자) 2년, 즉 서기 49년에 고구려 군사가 북경 서남쪽 산서성 태원을 공격한 기록이 있어 우리를 당황케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모본왕 2년(49년)의 기록을 살펴보자.


[원문]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三月 暴風拔樹 夏四月 殞霜雨雹 秋八月 發使賑恤國內饑民


[해설]
2년(서기 49) 봄에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쳤으나, 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나라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본문에 나오는 지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일부 이설이 있다.)


* 북평 : 현재 하북성 부평
* 어양 : 현재 하북성 북경 북쪽 회유
* 상곡 : 현재 하북성 탁록
* 태원 : 현재 산서성 태원 (산서성 서남부 끝 이라는 설도 있다.) 
 



 이 지명을 지도에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5세기 고구려 전성기 시절에도 요하를 넘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라 하는데, AD49년에 고구려가 중국 대륙 깊숙한 산서성 태원을 공격 하였다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하여 고구려 역사를 자국에 편입하는 작업을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 시점에, 정사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 조차도 교육하지 않는 현실은 시정되어야 한다.

AD49년에 고구려가 북경을 지나 산서성 태원까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였다는 것은 고구려 강역이 지금보다 더 확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AD49년 북경유역이 고구려 영향권에 있다는 사실을 삼국사기는 분명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들을 누군가 바르게 정리하여 올바른 역사교육을 실시해 주길 기대해 본다.








모본왕 태원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연개소문의 당태종 추격로. 장안성에 입성해 당태종의 항복을 받는다.


한민족 정통사서<환단고기>에 보면, 평강상호태열제(평원왕) 18년 온달장군을 보내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北周)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동쪽은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관(楡林關)은 지금 산서성의 경현의 동북에 있는 관문으로 중국의 장안(長安)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이다. 이와 비슷한 기록이 <삼국사기 열전>에 있는데, 후주(後周)의 무제가 요동을 치니 온달이 선봉이 되어 싸워 이겼다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알려져 있는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정벌하려 왔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고 허둥지둥 도망을 가고 고구려는 맹추격을 한다. <한단고기>에 나와 있기를, 세민(당태종)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연개소문은 양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장안(長安)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다.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양자강 북쪽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    위는 온달장군의 유림관 진출로. 유림관은 장안성의 북방 관문. 아래는 연개소문의 당태종 추격로. 장안성에 입성해 당태종의 항복을 받는다.

 
이렇듯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에 모두 장안성에 대해 언급이 되어 있다. 장안성은 현 섬서성 서안(西安)으로, 서안은 낙양(洛陽)과 더불어 중국 고대 역사의 심장이다. 그리고 서안 외곽에는 중국 정부가 쉬쉬하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피라미드 군(群)이 있다. 이 피라미드의 주인공은 한족(漢族)이 아니라 고조선이나 고구려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 정부는 발굴 초기 이 피라미드들이 자기네 유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자 발굴을 중지했고 피라미드를 은폐하기 시작했다. 만일 이 피라미드가 정상적으로 공개 발굴된다면 서안이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이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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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광개토태왕 시기는 동방 어느 나라도


고구려에 대적할 나라가 없었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은 아들 장수왕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세계 최대비문과 가묘(태왕릉)을


만들어 세계 최대 규모의 수묘인 300인으로


지키게 하여 비밀을 모르게 하고 초원으로


이주시킨 고구려인 54만으로 기마군을 편성하여


서진하여 유럽에 출현하니 훈족으로 불리운


고구려족이고, 그 훈족 태왕 아틸라는


광개토태왕이였다. 광개토태왕은 인류대제사장으로서


신을 팔아 권력을 쥐고 부패한 로마교황의 항복을


받아 내고 로마에서 철수하였던 것이다


아틸라의 장례식이 고구려 장례식이였다


아틸라 이후 건국한 나라가 한민족 고구려라는


의미의 한-고구려, 즉 헝-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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