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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책의 이것이 정치다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진행하는고품격 시사 토크쇼 시즌 2
정치권의 정쟁 정략에서 벗어나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을 분석하는
살아있는 정치 비평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전원책의 이것이정치다 - 시청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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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우상화 수단된 백두산은 하나님께 제사지낸 한민족영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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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2 윤*현 조회수 446


지구촌으로 이주해 간 동방 한민족의 영산


개천절의 주인공인 국조 커발환 환웅천황이


황도로 정하고 삼청궁을 지어 하나님께


제사지낸 배경이 한민족 영산이 된 이유다!



 

 

[규원사화/조선 숙종시대 북애노인]'태백'을 달리 일컬어 '백두'라 하였으며, 갑비고차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을 '두악'이라 하였는데, 이는 단지 단군이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이 붙은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아니라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은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한다. 무릇 '머리'라 함은 가장 높다거나 혹은 으뜸 되는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백두'가 동방 모든 산의 으뜸이 되고, 또한 동방의 사람이 하늘로부터 처음 내려온 땅이 되며, 게다가 더하여 으뜸 되는 우두머리인 단군이 항상 그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예식을 행하였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머리산(頭山)'이라 이름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갑비고차의 '두악'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수하(牛首河)'라는 이름은 알지 못하겠는데, 이 역시 단지 소머리를 물 속에 담그는 풍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는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시씨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미 백두산에 있으면서 점차 서남쪽으로 옮기고, 다시 패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삼씨(三氏)의 겨레들은 각자 더욱더 사방으로 옮겨갔다. 또한 태백이 이미 동방의 신령스러운 땅이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의식은 반드시 그 산에서 시작하였으니, 예로부터 동방 민족이 이 산을 숭상하고 공경함은 남다른 것이었다. 또 옛날에는 짐승들이 모두 신의 교화에 젖어 그 산에 편안히 깃들여 살며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며, 사람 또한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 등의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감히 하지 않았으니, 만대에 걸쳐 항상 받들고 보호하는 지표가 되었다. 무릇 우리 선조들은 모두 신시씨가 거느린 3천의 무리에서 나온 후예들이다. 뒷 날 비록 여러 씨(氏)의 구별이 있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단군 선조께서 똑같이 어여삐 여기는 신의 후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환인(桓因)·환웅(桓雄)·단검(檀儉)의 삼신이 나라를 열고 기초를 바로잡은 공덕을 항상 전하여 예기하고 잊지 않았으니, 곧 옛 백성들이 그러한 신령스러운 산을 가리켜 '삼신산'이라 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소중화 조선의 얼빠진 정치꾼들을을 질타하며)




余嘗論之, 强國之要, 有三; 一曰「地廣而物博」, 二曰「人衆而合」, 三曰「恒守其性而不失其長」. 此所謂地利.人和及[保性也. 而朝鮮, 則得地利而不全, 失人和]14)而亡其性, 此萬世之患也. 何謂得地利而不全. 夫, 朝鮮(之)地, 北連大荒, 則凍天氷地, 斷我後退之路; 西接蒙古, 而萬里流沙, 斷我左展之臂; 西南隣漢土, 而無泰岳峻峙.長江大河之限, 則其勢易於進攻, 難於防守; 東南阻大海, 而無前進一步之土. 且漢人者, 盤據萬里金湯之地, 容百族以爲衆, 蓄布粟以爲富, 鍊百萬之師而以爲强, 則恒涉野跨海, 以侵西鄙. 時有굴强桀오者, 蹶起於北方, 則爲後顧之慮, 必來겁攻. 倭, 海洋萬里, 各據島嶼, 有事則以易自保, 無事則順風駕帆, 任志來寇, 譬如床下맹之恒致其苦. 若我常强而無衰, 則可抑漢士而郡其地, 斥倭寇而鎖其海, 可號令天下, 囊括宇內也. 若我勢一弱, 則敵騎長驅, 蹂린闔國, 虜掠吏民, 焚燒閭里. 此, 所謂得地利而不全者也.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강한 나라의 요건에는 세가지가 있다 하였으니, 그 첫번째가 땅이 넓고 산물이 풍부한 것이고, 그 두번째가 사람이 많으면서 화합하는 것이며, 세번째는 항상 그 본바탕을 지키며 자기의 장점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는 지리적 이익과 사람의 화합 및 본바탕의 보전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지리적인 이익을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 되며, 사람들은 화합을 잃은 데다 본 바탕을 망각하고 있으니, 이것은 만세에 걸친 근심이라 할 것이다. 지리적인 이익을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된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무릇 조선의 땅은 북으로 대황(大荒)과 연결되어 있으니 곧 얼어붙은 하늘과 빙판 같은 땅이 우리의 퇴로를 끊고 있고, 서쪽으로는 몽고와 접하니 만리에 뻗친 사막이 우리의 왼쪽으로 뻗은 팔뚝을 끊고 있으며, 서남으로는 한나라 땅과 인접하여 있으나 태산의 험준함이나 장강의 큰 물줄기 같은 경계가 없기에 곧 그 형세가 나아가 공격하기는 쉬우나 지켜 방어하기는 어려우며, 동남으로는 큰 바다에 가로막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땅이다.

 

한나라 사람들은 만리에 뻗친 철옹성 같은 땅에 자리잡고 살면서 수많은 종족을 포용하여 이들로 그 무리를 삼고, 베와 곡식을 축적하고 1백만의 군대를 훈련시켜 이로서 부강함을 삼으며, 항상 들을 건너고 바다를 뛰어 넘어서 서쪽의 먼 변방까지 침략하여 들어갔다. 때때로 뛰어나게 강인하고도 굳세어 굴하지 않는 자가 나타나 북방에서 떨치고 일어나면, 곧 뒷날의 우환을 염려하여 반드시 와서 으르고 공격하였다. 왜(倭)는 바다 1만리의 크고 작은 섬에 제각기 살면서, 유사시에는 쉽사리 스스로를 보호하다가 무사하면 곧 순풍에 배를 몰아 마음대로 와서 노략질을 하니, 마치 마루 아래의 등에가 항상 골치인 것과 같다.

 

만약 우리가 항상 강하여 쇠퇴함이 없으면 곧 한나라 선비들을 눌러 그 땅에 군림하고 왜구를 배척하여 그 바다를 봉쇄할 것이니, 가히 천하를 호령하며 세상을 주머니 속에 넣고 주무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기세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곧 바로 적의 병사가 멀리로부터 말을 몰고 와서 온 나라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노략질하며 고을을 불사를 것이니, 이것이 소위 지리적인 이익은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昔者, 蚩尤氏卽帝位於탁鹿, 屹達陳兵於빈.岐, 藍侯建四侯於殷地, 奄薄姑王誘三監而唆武庚, 幾撓周室, 徐偃王抑宗周而王潢池之東朝三十六國. 後世, 遼.金.淸者, 皆起於舊朝鮮[地]而有中原. 高句麗之方盛也, 强兵百萬, 南擊吳.越, 北挑幽燕.齊.魯, 恒虎威於漢方. 百濟則跨渤海而略遼西.晉平, 越草海而占越州. 新羅[則]鯨濤萬里, 陳雄兵於明石, 刑白馬而盟赤關. 此皆, 我强而易於攻彼, 是得地利也.

 

옛날에 치우씨는 탁록에서 제위에 올랐고, 흘달 임금은 빈·기에 병사를 주둔시켰으며, 남후는 은나라 땅에 네 제후를 세웠고, 엄박고왕(奄薄姑王)은 삼감(三監)을 꾀고 무경(武庚)을 부추켜 주나라 왕실을 거의 휘어잡았으며, 서언왕(徐偃王)은 종주(宗周)를 누르고 황지(潢池)의 동쪽을 다스려 서른 여섯 나라로부터 조회를 받았다. 그 뒤에 요(遼)와 금(金) 및 청(淸) 등이 모두 옛 조선의 땅에서 일어나 중원 땅을 차지하였다. 고구려가 막 번성하였을 때는 강병이 1백만으로서, 남방의 오와 월을 치고 북방의 유연(幽燕) 및 제(齊)·노(魯)등과 싸움을 일으키는 등 항상 한나라 땅에 위엄을 세웠다. 백제는 발해를 뛰어넘어 요서와 진평을 공략하였고, 초해를 건너 월주를 점령하였다. 신라는 1만리 길의 거대한 파도를 넘어 명석(明石)에 뛰어난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백마를 잡아 적관(赤關)의 맹세를 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강하면 저들을 공략하기 쉬운 것이니 이것이 지리적인 이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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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揆園史話) -북애노인(北崖老人,1675년)


東方諸山, 有馬耳.摩尼等山, 俗人幷以「摩利」呼之, 曾不相別. 盖馬耳.摩尼, 幷出於頭字之意也. 今廣州有修理山, 此必「鷲山」之意也; 積城有紺岳山, 則乃「玄山」之意也; 忠州有達川, 則是「月川」之意也; 而馬耳.摩利之爲頭嶽或頭山之訛, 尤可辨矣. 太白之一名曰白頭, 甲比古次之祭天處曰頭岳, 此非檀君祭天, 必隨「頭」名之山也, 乃檀君祭天處, 必成「頭」名之山也. 盖, 「頭」者, 最上或元首之稱也. 白頭爲東方諸山之宗, 而又是東人始降之地, 兼復, 元首檀君, 恒行祭天禮于其山, 當時之人, 名之曰頭山也, 必矣. 而甲比古次之頭嶽, 亦不出於此外也. 獨不知, 牛首河之名, 亦只出於沈牛首之俗耶. 此不可斷矣. 然則, 神市氏(之)降, 旣在[白頭於山](於白頭山), 乃漸(徒)[徙]西南, 復沿浿水而南來, 三氏之族, 又各四遷也. (耳)[且]太白旣爲東方靈地, 祭天大儀必始於其山, 則自古, 東民之崇敬是山也, 不尋常. (耳)[且]古(者)昔, 禽獸悉沾神化, 安捿於其山而未曾傷人, 人亦不敢上山수溺而瀆神, 恒爲萬代敬護之表矣. 夫我先民, 皆出於神市所率三千團部之裔. 後世, 雖有諸氏之別, 實不外於檀祖同仁之神孫. 因.雄.儉.三神之, 開創肇定之功德, 常傳誦而不忘, 則古民指其靈山曰三神山者, 亦必矣.

 

동방의 여러 산에는 '마이(馬耳)'나 '마니(摩尼)' 등의 산이 있는데, 항간의 사람들은 뭉뚱그려 '마리(摩利)'라고 부를 뿐 일찍이 구별하지 않았다. 대저 '마이'와 '마니'는 모두 '頭'의 '머리'라는 뜻에서 나왔다. 지금의 광주에 '修理山'이 있는데 이는 필시 '수리산(鷲山)'이라는 뜻이며, 적성에 있는 '紺岳山'은 곧 '검은산(玄山)'이라는 뜻이며, 충주에 있는 '達川'은 바로 '달천(月川)'이라는 뜻이니, '마이'나 '마리'가 '頭嶽' 혹은 '頭山'이 잘못 전해져 그리되었음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태백'을 달리 일컬어 '백두'라 하였으며, 갑비고차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을 '두악'이라 하였는데, 이는 단지 단군이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이 붙은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아니라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은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한다. 무릇 '머리'라 함은 가장 높다거나 혹은 으뜸 되는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백두'가 동방 모든 산의 으뜸이 되고, 또한 동방의 사람이 하늘로부터 처음 내려온 땅이 되며, 게다가 더하여 으뜸 되는 우두머리인 단군이 항상 그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예식을 행하였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머리산(頭山)'이라 이름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갑비고차의 '두악'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수하(牛首河)'라는 이름은 알지 못하겠는데, 이 역시 단지 소머리를 물 속에 담그는 풍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는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시씨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미 백두산에 있으면서 점차 서남쪽으로 옮기고, 다시 패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삼씨(三氏)의 겨레들은 각자 더욱더 사방으로 옮겨갔다. 또한 태백이 이미 동방의 신령스러운 땅이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의식은 반드시 그 산에서 시작하였으니, 예로부터 동방 민족이 이 산을 숭상하고 공경함은 남다른 것이었다. 또 옛날에는 짐승들이 모두 신의 교화에 젖어 그 산에 편안히 깃들여 살며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며, 사람 또한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 등의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감히 하지 않았으니, 만대에 걸쳐 항상 받들고 보호하는 지표가 되었다. 무릇 우리 선조들은 모두 신시씨가 거느린 3천의 무리에서 나온 후예들이다. 뒷 날 비록 여러 씨(氏)의 구별이 있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단군 선조께서 똑같이 어여삐 여기는 신의 후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환인(桓因)·환웅(桓雄)·단검(檀儉)의 삼신이 나라를 열고 기초를 바로잡은 공덕을 항상 전하여 예기하고 잊지 않았으니, 곧 옛 백성들이 그러한 신령스러운 산을 가리켜 '삼신산'이라 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盖, 神市以降, 神化之漸, 逐歲益深, 立國經世之本, 自與人國逈異. 其神風聖俗, 遠播於漢土, 漢土之人, 有慕於神化者, 必推崇三神, 至有東北.神明之舍之칭焉. 及其末流之弊, 則漸陷於荒誕不經, 愈出愈奇, 怪誕之說, 迭出於所謂燕.齊海上怪異之方士. 盖其地, 與我震邦相接, 民物之[敎](交)特盛, 自能聞風驚奇. 又推演傅會曰: 「三神山, 是蓬萊.方丈.瀛洲, 在渤海中…」云云. 且患其無驗, 則曰: 「望之如雲, 終莫能至…」云云, 以惑其世主.《神仙傳》又以「海中」字, 推以斷之曰: 「海上有三神山, 曰蓬萊.方丈.瀛洲山, 謂之三島…」云云. 而於是「海上」.「六鰲」, 荒怪之說, 繼出於(閑)[閒]人之(革)[筆], 乃我國之士, 則更效嚬於此, 曰: 「金剛.蓬萊也, 智異.方丈也, 漢拏.瀛洲也.」 則此, 又返咀漢士之餘唾也.《史記·封禪書》曰: 「三神山者, 其傳, 在渤海中. 盖嘗有至者, 諸僊人及不死之藥皆在焉, 其物禽獸盡白, 而黃金銀爲宮闕…」云云. 又仙家書類或曰: 「三神山, 有還魂.不老等艸, 一名震檀」云.

 

대저 신시씨가 하늘에서 내려온 이래로 신의 교화가 점차 세월에 따라 더욱더 깊어 감에,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경영하는 근본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는 자못 다르게 되었기에, 그 신성한 풍속이 멀리 한나라 땅에까지 퍼져서 한나라 땅의 사람 가운데 신의 교화를 사모하는 자가 있었으니, 오로지 삼신을 추앙하여 동북지방에는 '신명의 집(神明之舍)'이라는 명칭까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단의 폐해에 이르러 곧 점차 허무맹랑함에 빠지고 더욱 기괴해지더니 괴이하고 허망한 말들이 꼬리를 물고 갈마들어 나왔는데, 심지어 '연나라와 제나라의 바다 위에 신선의 술법을 닦는 괴이한 사람이 있다'라고 말해지기까지 하였다. 무릇 그 땅은 우리의 진방(震邦)과 더불어 서로 접해 있어서 백성과 사물의 교류가 특히 왕성한데, 직접 그 풍문을 듣고는 놀라며 이상하게 여겼다. 또한 생각을 미루어 넓히고 억지로 이치에 맞춰 말하기를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 증거가 없음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 같은데 결국에는 능히 다다르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세상의 주목을 미혹케 하였다.《신선전》에서는 또 '海中'이라는 글자만으로 추측하고 단정지어 말하기를 「바다 위에 삼신산이 있는데 봉래·방장·영주산이라 하며, 이를 일컬어 삼도(三島)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해상(海上)'이나 '육오(六鰲)' 등의 황당무계한 말들이 한가로운 사람들의 붓 끝에서 연이어 나왔음에도 우리나라 선비들은 다시 그것을 억지로 흉내56)만 내어 「금강산이 봉래산이며, 지리산이 방장산이고, 한라산이 영주산이다」라고 말하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선비가 뱉은 침을 도리어 받아 곱씹는 격이다.《사기》의 <봉선서>에 말하기를 「삼신산이란 발해의 바다 가운데 있다고 전해진다. 무릇 가본 적이 있는 사람에 의하면 뭇 신선들과 불사의 영약이 모두 있으며, 그 곳의 사물과 짐승들은 모두 희고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으며……」57) 하였고, 또한 선가(仙家)의 서책에서 혹은 말하기를 「삼신산에는 넋을 부를 수 있거나 먹으면 늙지 않는 등의 풀이 있는데 일명 '진단(震檀)'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今白頭山, 自古有白鹿.白雉或白鷹之屬;《括地志》所云: 「其南有白山, 鳥獸草木皆白」者, 是也; 方士之說, 亦頗有所據也. 又白頭山一帶, 時産山蔘, 世人擬之以不老草. 山氓欲採取, 則必沐浴致齋祭山以後, 敢發, 其還魂.不老之名, 想, 亦原於此也. 古, 烏斯帝北巡而得靈草, 則此尤驗矣. 且白頭山産紫檀樹, 從古所稱檀木者, 是也. 而古記所傳, 九변震檀之說, 想, 必有因於此, 而「不老震檀…」云云者, 盖亦聽者之錯誤也. 然則, 燕.齊方士, 扼腕而言「海中三山」者, 亦병遊於夢中, 欺其主而又自欺也. 今我國有 「願得三山不老草, 拜獻高堂白髮親」之句, 殆爲養老者, 春祝之定文, 究其原則, 亦可噴飯. 何不, 卽往白頭山, 拜檀帝之靈, 而祈其萬壽耶.

 

지금의 백두산에는 예로부터 흰사슴이나 흰꿩 혹은 흰매의 무리가 있었으며, 이는《괄지지》에서 말한 바 대로 「그 남쪽에 '백산'이 있는데 날짐승과 들짐승 및 초목이 모두 희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니,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의 얘기 역시 상당히 근거하는 바가 있다. 또한 백두산 일대에는 때때로 산삼이 나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불로초로 생각하였다. 산에 사는 백성들이 이를 캐고자 하면 반드시 목욕하고 정성을 들여 산에 제사를 드린 후에야 감히 캐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고 하는데, '환혼(還魂)'이나 '불사(不老)'라는 이름은, 생각건대 역시 이러한 것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옛날 오사제(烏斯帝)께서 북쪽을 순행하다 신령스러운 풀을 얻었다 하였으니, 곧 그것으로 더욱 증거가 된다. 또한 백두산에는 자단수(紫檀樹)가 나는데 예로부터 단목(檀木)이라 일컫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생각건대 옛 기록에 전하는 '구변진단(九변震檀)'이란 얘기는 반드시 이러한 것에 연유함이 있을 것이나 '불로진단(不老震檀)' 운운하는 것은 아마도 역시 전해들은 사람의 착오일 것이다. 그러한 즉, 연나라와 제나라의 방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바다 속의 삼신산'을 말하는 것 역시 똑 같이 꿈속을 노닐며 그 주인을 속이고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된다. 지금 우리나라에 「원하건대 삼신산의 불로초를 얻어, 윗채에 계신 백발의 어버이에게 바치고자 한다」는 글귀가 있으니, 아마도 노인을 봉양하는 자가 젊음을 찾아 드리고자 하는 전형적인 글인 것 같은데, 그 근원을 따져 보면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할 뿐이다. 어찌하여 백두산에 가서 단제(檀帝)의 영정에 절을 하고 만수를 기원하지 않는 것인가.

 

漢.淮陽之地, 古陳國地, 本太昊之墟, 婦人崇好祭祀用史巫, 故其俗崇巫鬼.《陳詩》曰: 「坎其擊鼓, 宛丘之下. 亡冬亡夏, 値其鷺羽.」 又曰: 「東門之분, 宛丘之허. 子仲之子, 婆娑其下.」 吳札, 聞其歌則曰: 「國亡主, 其能久乎.」云. 此 又伏犧所傳, 倚數觀變之餘弊也.《孟子》[舜曰](曰: 「舜)生諸馮, 東夷之人也.」《尙書》曰: 「舜肆類于上帝, 인于六宗, 望秩于山川, 편于군神.」 虞舜以前, 曾無是事, 此或原於上古東邦祭天報本之禮, 及山嶽.河川.洋海.沼澤, 皆有奉命主治之神者也. 漢土, 自古, 以雍州積高爲神明之오, 故立치郊上帝, 諸神祠皆聚云, 則此又與檀祖祭太白, 同其類也. 齊俗有八神之祭, 八神者曰天主.地主.兵主.陰主.陽主.月主.日主及四時主也. 天好陰, 故祠之必於高山之下.小山之上, 此祭天太白之麓之類也. 地貴陽, 祭之必於澤中환丘, 此祭天頭嶽之類也. 兵主, 祠蚩尤, 蚩尤氏爲萬代强勇之祖, 作大霧, 驅水火, 又爲萬代道術之宗. 是以, 太初之世, 恒爲東方戎事之主, 海岱一帶, 曾爲其族虎據之地. 藍侯之民, 再進而建奄.徐諸國於淮岱之地, 則八神之說, 萌於是時也.

 

한나라 회양(淮陽) 땅은 옛적 진(陳)나라의 땅으로 본디 태호씨(太昊氏)의 옛터인데, 그 땅의 부인들이 제사지내 받들기를 좋아하여 화려하게 꾸민 무당을 이용하였기에 그 곳의 풍속은 무당과 도깨비를 숭상하게 되었다.《시경》의 <진시(陳詩)>에서 이르기를,

 

그 북을 둥둥치며 완구(宛丘) 아래에서 놀고 있네.

겨울이나 여름도 잊고 저 백로깃을 가지고 춤추네.

 

또 이르기를,

동문(東門)에는 흰느릅나무 완구땅에는 상수리 나무.

자중(子仲)씨 딸이 그 아래서 덩실덩실 춤을 추네. 라 하니,

 

오찰(吳札)이 그 노래를 듣고는 말하기를,

「나라는 망하고 주인은 없는데 그 향락이 오래 가겠는가.」 하였다.

이는 또한 복희씨가 전한 '의수관변(倚數觀變)'의 남겨진 폐단이다.

 

《맹자》에 이르기를 「순(舜)은 제풍(諸馮)에서 났으며 동이 사람이다」58)라고 하였으며,《상서》에 이르기를 「순(舜)에 이르러 드디어 상제(上帝)에게 성대히 제를 올리고, 육종(六宗)에게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며, 섶을 태워 멀리 산천에 제를 지내고, 여러 신들에게 두루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우순(虞舜) 이전에는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옛적에 동방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고 그 근본에 보답한다'는 예식, '산악·하천·해양·소택에 있어서도 모두 하늘의 명을 받들어 맡은 곳을 주관하여 다스리는 신이 있다'는 생각에서 근원하였을 것이다.

 

한나라 땅에는 예로부터 옹주(雍州)의 높은 산을 신명이 거처하는 곳으로 여기고 제사 터를 세워 상제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뭇 신들의 사당 또한 모두 그 곳에 모여 있다 하니, 이는 또한 단군이 태백에서 제사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다. 제(齊)나라의 풍속에 '팔신제(八神祭)'라는 것이 있는데, 여덟 신이라 함은 천주(天主)·지주(地主)·병주(兵主)·음주(陰主)·양주(陽主)·월주(月主)·일주(日主) 및 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기에 제를 올릴 때는 반드시 높은 산 아래의 작은 산 위에서 지냈으니 이는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며,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못 가운데의 둥근 언덕에서 지냈으니 이는 두악(頭嶽)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다.

 

군사를 주재하는 자는 치우씨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치우씨는 만대에 걸쳐 굳셈과 용감함의 조상으로서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몰아쳐 부렸으니, 또한 만대에 걸친 도술의 근본이 된다. 그러한 까닭에 태초의 세상에서는 항상 동방의 군사(軍事)를 주재하는 자가 되었으며, 해대(海岱) 일대는 일찍부터 그의 부족들이 자리잡고 앉은 땅이 되었다. 남후(藍侯)의 백성들이 다시 더욱 나아가서 엄국(奄國)과 서국(徐國) 등의 뭇 나라들을 회대(淮岱)의 땅에 세웠으니, '팔신(八神)' 등의 얘기는 이 때 싹튼 것이다.

 

漢.高起兵於豊沛, 則祠蚩尤, 흔鼓旗, 遂以十月至파上, 與諸侯平咸陽, 而立爲漢王, 則因以十月爲年首. 此雖, 襲於秦之正朔, 而亦有因於敬蚩尤也. 後四歲, 天下已定, 則令祝官, 立蚩尤之祠於長安, 其敬蚩尤之篤如此.《晋書·天文志》「蚩尤旗類彗而後曲象旗, 主所見之方下, 有兵」云, 則是乃蚩尤氏, 上爲列宿也.《通志·氏族略》「蚩氏, 蚩尤之後也」云, 則是蚩尤氏之後而永居於漢土者也. 蚩尤氏之英風雄烈.播傳異域之深, 推此可知, 而今世人, 殆無過問者, 則此, 又國史散滅之故也, 而後代學者, 竟不免疎迂之譏矣.

 

한나라 고조는 풍패(풍沛)에서 병사를 일으키며 치우씨에게 제사를 지내고 북과 깃발에 희생의 피를 발랐으며, 마침내 10월에 패상(파上)에 이르러 제후들과 더불어 함양(咸陽)을 평정하고 한나라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런 연유로 10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비록 진(秦)의 책력을 이어서 따른 것이긴 하지만 역시 치우씨를 공경함에서 연유되었다 할 것이다. 그 뒤 4년에 천하가 이미 안정되자 곧 축관(祝官)에게 명하여 치우씨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하였으니, 치우씨를 공경함이 이와 같이 돈독하였다.59)

 

《진서·천문지》에 「치우기(蚩尤旗) 유형의 혜성은 그 뒷 꼬리의 곡선이 마치 깃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주로 나타나는 방향의 아래에는 병사가 있다」60)고 하였으니, 이는 곧 치우씨가 하늘로 올라가서 별자리가 되었음을 말한다.《통지·씨족략》에 「치(蚩)씨는 치우의 후손이다」라 하였으니, 곧 이들은 치우씨의 후손으로서 영원히 한나라 땅에 머무른 자들이다. 치우씨의 영웅된 기풍은 다른 지역까지 매우 널리 퍼졌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으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 가운데 이를 물어 오는 자가 거의 없으니, 곧 이는 또한 나라의 역사가 흩어지고 없어진 까닭이기도 하지만, 후대의 학자들도 그것을 소흘히하고 멀리하였다는 비난을 결국에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다.

 

盖, 燕.齊之士, 沈惑於神異之說, 亦尙矣. 自齊.威宣.燕.昭之時, 遣使求三神山. 秦.漢之際, 宋無忌.正伯.僑克.尙이.門子高之徒, 則皆燕人也; 文成.五利.公孫卿.申公之屬, 皆齊人[人]也. 昔, 太公治齊, 修道術, 後世其地, 多好經術者. 則此又太公爲之助俗也, 燕.齊之士, 安得以不好怪異之說哉!

 

무릇 제나라와 연나라의 선비들은 신비하고 괴이한 말에 깊이 현혹되고 또한 이를 높이 여겼다.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및 연나라의 소왕(昭王) 때부터 사신을 보내 삼신산을 찾게 하였으니, 진(秦)과 한(漢) 때의 송무기(宋無忌)·정백(正伯)·교극(僑克)·상선(尙羨)·문자고(門子高) 같은 무리는 모두 연나라 사람이고, 문성(文成)·오리(五利)·공손경(公孫卿)·신공(申公) 등의 무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이다. 옛날 태공(太公)이 제나라를 다스리며 도술을 닦았더니, 뒷날 그 땅의 사람들이 도술 부리는 것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곧 이것은 또한 태공이 세상의 풍속을 그렇게 이끈 것이므로, 연나라와 제나라의 선비들이 어찌 괴이한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戊寅歲, (王)[壬]儉屹達元年. 有武勇, 國人畏愛之. 得奚門爲龍加. 夏人來至, (王)[壬]儉優禮之. 時, 夏德旣衰, 使人往觀其政, 又送舞樂而試之. 及後, 使奚門與藍侯率諸兵, 進征奄至빈.岐之間. 後與夏王和. 在位四十三歲, 崩. 子, 古弗立.

 

무인년은 흘달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은 무예에 용맹이 있음에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하였다. 해문(奚門)을 얻어 용가로 삼았다. 하나라 사람이 건너오자 임금이 그를 예절로서 대우하였다. 이때 하나라의 덕이 이미 쇠퇴하니 사람을 시켜 가서 그 정치를 살펴보게 하고는, 또 춤과 노래를 보내어 그를 시험하게67) 한 후에, 해문과 남후로 하여금 모든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엄(奄)에서 빈(빈)·기(岐) 사이의 지역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후 하나라 왕과 서로 화해하였다.68) 임금자리에 있은 지 4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고불(古弗)이 임금이 되었다.

 

辛酉歲, (王)[壬]儉古弗元年. 繼父志而修戎事, 然而終世無事. 루진侯獻赤玉之瑞. 在位二十九歲, 崩. 子, 伐音立.

 

신유년은 고불 임금의 원년이다. 부왕의 뜻을 이어 군사 일을 잘 다스렸으나 오랫동안 그 군사를 쓸 일이 없었다. 속진후가 상스러운 붉은 옥을 바쳤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벌음(伐音)이 임금이 되었다.


癸丑歲, (王)[壬]儉索弗婁元年. 與商戰破之, 尋和. 後, 復大戰破之, 進入其境, 遂屯海上, 庶民復漸遷徙. 在位十七歲, 崩. 子, 阿勿立.

 

계축년은 색불루 임금의 원년이다. 상나라와 싸워 이긴 후 얼마 있지 않아 화해하였다. 뒤에 다시 크게 싸워 상나라를 깨트리고 그 국경 안까지 들어가서71) 마침내 해대(海岱)의 위에 주둔하니 많은 백성들이 다시 점차 옮겨갔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아물(阿勿)이 임금이 되었다.

 

庚午歲, (王)[壬]儉阿勿元年, 令弟固弗加治樂浪忽. 遣熊加乙孫, 觀南征之兵, 立邑商地. 後, 商人互爭不和, 乃進兵攻之, 尋罷. 蓋馬侯獻九尾獸. 在位十九歲, 崩. 子, 延那立.

 

경오년은 아물 임금의 원년이다. 아우 고불가(固弗加)에게 영을 내려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였다. 웅가 을손(乙孫)을 보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간 군사들을 살펴보게 하고는 상나라 땅에 고을을 세웠다. 뒤에 상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화해하지 않으니 병사를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고는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왔다. 개마후가 꼬리가 아홉 달린 짐승을 바쳤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연나(延那)가 임금이 되었다.

 

己丑歲, (王)[壬]儉延那元年. 叔父固弗加攝政. 翌年, 商人攻我, 師至南界, 藍侯率諸軍, 戰克. 後, 互相戰.和. 國內, 增設壇所, 使諸侯, 承命禱天, 凡國中大事及風雨.災異.有求, 則祈于主神, 以遍于諸神也. 有大蛇現루진之地, 靑質黃頭, 能呑大鹿, 民有趨拜者, 乃使巨屈支斷戮之. 在位十三歲, 崩. 弟, 率那立.

 

기축년은 연나 임금의 원년이다. 숙부 고불가(固弗加)가 섭정을 하였다. 이듬해 상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여 그 군사가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는데72) 남후가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싸워 이겼으며, 뒤에는 서로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였다. 나라 안에 제단을 증설하고 제후들로 하여금 명을 받들어 하늘에 기도하게 하였으니, 무릇 나라안에 큰 일이나 비바람 등 별스런 재난이 있거나 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곧 주신에게 빌어 이로서 뭇 신들에게 두루 미치게 하였다. 큰 뱀이 속진의 땅에 나타났는데 몸은 푸르고 머리는 누런 것이 능히 큰 사슴을 삼키니, 백성들 가운데 이를 좇아 숭배하는 자가 있기에 거굴지(巨屈支)를 시켜 끊어 죽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우 솔나(率那)가 임금이 되었다.

 

壬寅歲, (王)[壬]儉率那元年. 出巡北鄙, 見小民艱苦爲生, 歎曰: 「蝸牛有室, 蜂채有餌, 安使我民有或流離耶.」 乃勸民貿遷, 以廣其用. 於是南北之民, 舟車相通. 在位十六歲, 崩. 子, 鄒盧立.

 

임인년은 솔나 임금의 원년이다. 북쪽 궁벽한 곳으로 순행을 나갔다가 아랫백성들이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달팽이도 집이 있고 벌과 전갈에게도 먹이가 있는데 어찌 나의 백성을 유랑하게만 하겠는가」라고 하며, 백성들에게 권하여 물자를 서로 교환하고 옮기게 하여 그 쓰임새를 더욱 넓히게 하였다. 따라서 남북의 백성들이 배와 수레를 사용하여 서로 교통하게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추로(鄒盧)가 임금이 되었다.

 

戊午歲, (王)[壬]儉鄒盧元年. 在位九歲, 崩. 子, 豆密立. 

무오년은 추로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두밀(豆密)이 임금이 되었다.

 

 

丁卯歲, (王)[壬]儉豆密元年. 使人記桓儉以來列聖之詞, 掛於宮門內側, 使出入朝覲者閱之. 遣兵伐商. 루진侯.多忽遣兵入東海伐鬼洲, 平其地. 在位四十五歲, 崩. 子, 奚牟立.

 

정묘년은 두밀 임금의 원년이다. 사람을 시켜 단검이래 열성조(列聖祖)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여 궁문의 안쪽에 걸어 두고는 출입하는 신하들에게 이를 읽도록 하였다. 병사를 보내 상나라를 정벌하였다. 속진후 다홀(多忽)이 병사를 보내 동해(東海)로 들어가 귀주(鬼州)를 쳐서 그 땅을 평정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4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해모(奚牟)가 임금이 되었다.

 

壬子歲, (王)[壬]儉奚牟元年. 使藍侯與沸流侯.靑丘侯, 共聚소泥水. (王)[壬]儉有疾, 使人白衣禱天, 尋愈. 卒本侯獻靈草, 能除人萬病. 在位二十二歲, 崩. 子, 摩休立.

 

임자년은 해모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로 하여금 비류후 및 청구후와 더불어 소니수(소泥水)에 모이게 하였다. 임금이 병을 얻으니 사람을 시켜 흰 옷을 입고 하늘에 빌도록 하였더니 얼마지 않아 완쾌되었다. 졸본후가 신령스러운 풀을 바쳤는데 능히 사람의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이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마휴(摩休)가 임금이 되었다.

 

甲戌歲, (王)[壬]儉摩休元年. 商人來朝. 靑丘侯報, 南夷海中出泥山, 火出水中, 泥合爲石. 在位九歲, 崩. 弟, 奈休立.

 

갑술년은 마휴 임금의 원년이다. 상나라 사람이 와서 임금을 알현하였다. 청구후가 남이(南夷)의 바다 가운데에서 진흙산이 솟아 나오고 불이 물 가운데에서 솟더니 진흙이 굳어져서 돌이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우 나휴(奈休)가 임금이 되었다.

 

癸未歲, (王)[壬]儉奈休元年, 句麗侯.于타入爲龍加. (王)[壬]儉南巡而觀靑丘之政, 至阿斯達. 復西巡而至奄(盧)[慮]忽, 大會諸侯, 尋還. 與殷人和. 在位五十三歲, 崩. 子, 登올立.

 

계미년은 나휴 임금의 원년이다. 구려후인 우타(于타)가 들어와서 용가가 되었다.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청구의 정치를 살피고 아사달에 이르렀으며, 다시 서쪽으로 순행하여 엄려홀에 이르러 제후들을 크게 모이게 하고는 얼마지 않아 돌아왔다. 은나라 사람과 화목하게 지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5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등올(登올)이 임금이 되었다.

 

丙子歲, (王)[壬]儉登올元年. 在位六歲, 崩. 子, 鄒密(五)[立]. 

병자년은 등올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추밀(鄒密)이 임금이 되었다.

 

壬午歲, 壬儉鄒密元年. 濊侯.知莫婁入爲龍加. (王)[壬]儉出巡, 至牛首忽, [諸會侯](會諸侯). 遂崩于其地, 在位八歲. 子, 甘勿立.

 

임오년은 추밀 임금의 원년이다. 예후인 지막루(知莫婁)가 들어와서 용가가 되었다. 임금이 순행을 나가 우수홀에 이르러 제후들을 모이게 하였다. 마침내 그 땅에서 세상을 떠나니 임금자리에 있은 지 8년만 이었다. 아들 감물(甘勿)이 임금이 되었다.

 

庚寅歲, (王)[壬]儉甘勿元年. 在位九歲, 崩. 子, 奧婁門立. 

경인년은 감물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오루문(奧婁門)이 임금이 되었다.

 

乙亥歲, (王)[壬]儉奧婁門元年. 遷都樂浪忽, 使眞番侯監舊都. 民有取人物者, 鷹加治之曰: 「小蛇能濁全海之水. 今不敎斯人, 世德以衰, 國其亂乎!」 (王)[壬]儉聞之曰: 「民之行, 如水就于決, 且源淸而下流自淸, 此吾凉德(耶)[所]致也. 吾皇祖肇基, 已千載, 國無大難, 民無大대, 今有此犯, 吾恐, 先祖之業, 因我而廢.」 乃大修先君之德. 於是犯者以化, 民無染惡者. 在位二十歲, 崩. 子, 沙伐立.

 

을해년은 오루문 임금의 원년이다. 도읍을 낙랑홀로 옮기고 진번후를 시켜 옛 도읍을 감독하게 하였다. 백성 가운데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지는 자가 있기에 응가가 이를 다스려 말하기를 「작은 뱀이 능히 모든 바다물을 흐리게 할 수 있듯이, 지금 그 사람을 가르치지 못하면 세상의 덕은 이로써 쇠퇴하게 되고 나라는 그로 혼란하게 되리라」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이르기를 「백성의 행실은 마치 물줄기가 터진 틈새를 따라 흐르는 것과 같으며, 또한 그 근원이 맑으면 아랫물은 자연히 맑은 것과 같은 것이니, 이는 내가 덕이 두텁지 못한 소치이다. 우리 황조(皇祖)께서 나라의 기틀을 잡은지 이미 천년이 되었으나 나라에는 커다란 어려움이 없었고 백성들은 큰 원망이 없었는데 지금에 이러한 범법이 있게 되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선조의 위업이 나로 인해 무너질까 해서다」 하고는 이내 선대 임금을 본 받아 크게 덕을 닦았다. 이로 인해 범법한 자가 교화되니 백성 중에는 악에 물드는 자가 없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0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사벌(沙伐)이 임금이 되었다. 己未歲, (王)[壬]儉沙伐元年. 在位十一歲, 崩. 子, 買勒立. 기미년은 사벌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매륵(買勒)이 임금이 되었다.

 

庚午歲, (王)[壬]儉買勒元年. 在位十八歲, 崩. 子, 麻勿立. 

경오년은 매륵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마물(麻勿)이 임금이 되었다.

 

戊子歲, (王)[壬]儉麻勿元年. 眞番侯.鄒돌入爲龍加. 南巡至唐莊京, 遂崩于阿斯達, 在位八歲. 眞番侯立, (王)[壬]儉弟多勿.

 

무자년은 마물 임금의 원년이다. 진번후 추돌(鄒돌)을 들게 하여 용가로 삼았다. 남쪽으로 순행하다가 당장경에 이르러 마침내 아사달에서 세상을 떠나니 임금자리에 있은 지 8년 만 이었다. 진번후가 보위에 올랐는데 임금의 아우인 다물(多勿)이다.

 

丙申歲, (王)[壬]儉多勿元年. 알견兪復侵西鄙, 眞番侯與濊侯.夫餘侯擊却之, 進入其境而還. 在位十九歲, 崩. 子, 豆忽立.

 

병신년은 다물 임금의 원년이다. 설유가 다시 서쪽 변경을 침범하니 진번후가 예후 및 부여후와 더불어 그를 쳐서 물리치고 나아가 그 경계까지 들어갔다가는 돌아왔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두홀(豆忽)이 임금이 되었다.

 

乙卯歲, (王)[壬]儉豆忽元年. 沸流侯獻大鼈, 長丈餘. 루진侯爲龍加. 初, 屹達之世, 東人之進據빈.岐者甚衆. 及商.湯之興而遂漸撤退, 然細民以耕桑爲業者, 猶散處其地, 久不失其俗. 至是藍侯頗强, 稍役率諸侯, 逐孤竹君, 南遷其都, 居奄瀆忽, 與殷逼近, 使黎巴達將兵, 進至빈.岐之間, 與其遺民相結, 立國曰黎, 治黎忽, 遂與殷家諸侯及西戎之人相雜處. 於是藍[氏](侯)之威漸盛而, (王)[壬]儉之命亦及乎恒山以南之地矣. 在位二十八歲, 崩. 子, 達音立.

 

을묘년은 두홀 임금의 원년이다. 비류후가 큰 자라를 바쳤는데 길이가 한 길이 넘었다. 속진후가 용가가 되었다. 처음 흘달 임금 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빈(빈)·기(岐) 지역으로 나아가 거처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상나라 탕왕이 일어나니 마침내 점차 물러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빈천한 백성으로서 농사짓고 누에치는 것을 생업으로 하던 자들은 여전히 그 땅에 흩어져 살면서 오랫동안 풍속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즈음 남후가 자못 강성하여 차츰 제후들을 부리고 거느리게 되었는데, 고죽군(孤竹君)을 몰아내고 도읍을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奄瀆忽)에 거처하였다. 그곳은 은나라와 매우 가까우므로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빈(빈)·기(岐) 사이로 나아가게 하여 그 유민들과 더불어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우고 '여(黎)'라고 이름 짓고 여홀(黎忽)에서 다스리게 하니, 이에 마침내 은나라의 제후 및 서융(西戎)의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거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남후의 위세가 점차 번성하여 졌으며, 임금의 명령 또한 항산(恒山)73)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달음(達音)이 임금이 되었다.

 

癸未歲, (王)[壬]儉達音元年. 娶靑丘侯之女阿施氏爲后, 賢而有德, 國人慕之. 蓋馬侯獻靈艸. 昔, 夫餘民有遁居于알견兪之地, 遂與其民雜處, 頗習其俗, 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 人謂之貊. (後)[復]漸遷徙, 處於奄慮北西之地, 遂爲藍氏之民. 在位十四歲, 崩. 子, 音次立.

 

계미년은 달음 임금의 원년이다. 청구후의 여식 아시씨(阿施氏)를 취하여 황후로 삼으니, 어질며 덕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였다. 개마후가 신령스러운 풀을 바쳤다. 옛적에 부여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다시 점차 옮겨와서 엄려(奄慮)의 북서쪽 땅에서 살게 되어 마침내 남후의 백성이 되었다.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1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음차(音次)가 임금이 되었다.

 

丁酉歲, (王)[壬]儉音次元年. 先是, 王室頗微, 諸侯漸强, 及音次卽位, 有仁德, 國人咸慕. 於是王道復興, 而諸侯相率來朝. 在位十九歲, 崩. 子, 乙于支立.

 

정유년은 음차 임금의 원년이다. 이 보다 앞서 왕실이 자못 쇠약하고 제후들이 점차 강성하여 졌으나, 음차가 즉위하자 어진 덕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였다. 그리하여 왕도가 부흥하게 되었으며 제후들은 서로 좇아와서 알현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을우지(乙于支)가 임금이 되었다.

 

丙辰歲, (王)[壬]儉乙于支元年. 在位九歲, 崩. 子, 勿理立. 

병진년은 을우지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물리(勿理)가 임금이 되었다.

 

乙丑歲, (王)[壬]儉勿理元年. 仁而好勇. 時, 諸侯已强而猶尊(王)[壬]儉, 時常朝覲. 藍侯.儉達, 與靑丘侯.句麗侯.루진侯, 率兵伐殷, 遂深入其地, 淮岱之間, 莫不響應. 諸侯乃定淮岱之地, 乃立薄姑74)氏於靑州之地曰奄國, 盈古氏於淮北.徐州之地曰徐國, 互相聯盟而援結, 殷人莫敢當者. 盖, 海岱.江淮之地, 爲東人占居者已久, 及至殷道之衰, 而藍侯與諸侯進攻. 於是濱海之民, 皆以其州欣迎其師也. 自蚩尤氏撤退以後, 復見斯時之盛矣. 雖然, 諸侯亦稍輕王室, 雖外修其職, 不甚崇戴焉. 在位十五歲, 崩. 子, 丘忽立.

 

을축년은 물리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은 어질면서도 무도(武道)의 용맹을 좋아하였다. 이때의 제후들은 이미 강성하였으나 여전히 임금을 존중하여 때를 맞추어 항상 알현하였다.

 

남후인 검달(儉達)이 청구후·구려후·속진후 등과 더불어 병사를 거느리고 은나라를 정벌하여 마침내 그 땅의 회대(淮岱) 사이로 깊이 들어가게 되니 반가이 맞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75) 제후들이 이에 회대의 땅을 평정하고 박고씨(薄姑氏)를 청주(靑州)76)의 땅에 세워 '엄국(奄國)'이라 이름하고, 영고씨(盈古氏)를 회수(淮水)의 북쪽 서주(徐州)77)의 땅에 세워 '서국(徐國)'이라 이름하고는, 서로 연맹하여 원조하고 단결하니 은나라 사람들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였다.

 

무릇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아온지 오래 되었는데, 은나라의 도가 쇠퇴해지자 남후가 제후들과 더불어 공격하여 들어간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바다를 인접한 곳의 백성들은 모두 그들의 마을을 바치며 흔쾌히 군사를 환영하였던 것이다. 치우씨가 물러난 이후 다시 이 때에 번성함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제후들 역시 조금씩 왕실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으니, 비록 겉으로는 맡은 일을 처리하였지만 마음으론 받들지 않게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지 1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구홀(丘忽)이 임금이 되었다.

 

庚辰歲, (王)[壬]儉丘忽元年. 蓋馬侯.買올入爲龍加. 在位七歲, 崩. 子, 余婁立. 

경진년은 구홀 임금의 원년이다. 개마후 매올(買올)이 들어와 용가가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여루(余婁)가 임금이 되었다.

 

丁亥歲, (王)[壬]儉余婁元年. 루진侯移治達婁忽. 藍侯立鮮牟國於殷.淮南之地. 在位五歲, 崩. 子, 普乙立. 

정해년은 여루 임금의 원년이다. 속진후가 달루홀(達婁忽)로 옮겨 다스렸다. 남후가 은나라 회수의 남쪽 땅에 선모국(鮮牟國)을 세웠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보을(普乙)이 임금이 되었다.

 

壬辰歲, (王)[壬]儉普乙元年. 藍侯遂總(師)[帥]諸侯, 朝覲者, 遂稀. 在位十一歲, 崩. 子, 古列加立. 

임진년은 보을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가 마침내 제후들을 총괄하여 거느리게 되니 임금을 알현하는 자가 드물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고열가(古列加)가 임금이 되었다.

 

癸卯歲, (王)[壬]儉古列加元年. (王)[壬]儉初立而國用不敷, 鳳加收畿內之貢, 僅得充用, 民亦有, 輸穀助用者. (王)[壬]儉與諸加謀曰: 「昔, 我皇祖肇基立業, 爲萬世後孫之範. 今, 王室衰微, 諸家浸(疆)[彊], 方外諸侯, 殆無奉命者. 雖, (坼)[坼]圻內之民, 懷列聖之化, 猶表忠虔, 惟予凉德, 不可以致化立威, 欲讓於有德, 則遍觀聖裔, 又無其人. 予欲, 避居於唐莊京, 入阿斯達, 以安奉先聖之神靈.」 諸加悽愴而從之. (王)[壬]儉乃奉祭器, 遜居于唐莊京, 遂宅于阿斯達. (坼)[坼]圻內民, 從來者甚衆, 皆宅于唐莊京. 於是國遂除, 在位三十歲.

 

계묘년은 고열가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이 즉위한 처음에는 나라에 쓰이는 것이 두루 충당되지 못하자 봉가(鳳加)가 기내(畿內)78)의 공물을 거두어 근근히 쓰임에 충당케 하였으며, 백성들 역시 곡식을 보내어 그 쓰임에 도움을 주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제가와 더불어 의논하여 말하기를 「예전 우리 황조(皇祖)는 나라의 터전을 열고 위업을 세워 만세 후손의 모범이 되었다. 지금에 왕실은 쇠미하니 나라의 제후들은 점차 강성해지고, 나라 밖의 제후들 중 명을 받드는 자는 거의 없게 되었다. 비록 기내의 백성들이 열성조의 교화를 가슴에 품고 여전히 충성과 공경을 나타내고 있지만, 오로지 내가 덕이 두텁지 못한 탓으로 지극한 교화로 위엄을 세우지 못하는 까닭에, 덕이 있는 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자 열성조의 후예들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또한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나는 당장경으로 거처를 피하여 아사달에 들어가서 선성(先聖)의 신령(神靈)들을 편안히 받들어 모시고자 한다」 하였다. 제가는 슬퍼하며 뜻에 따랐다. 임금은 이에 제기를 받들고 당장경으로 피하여 거처하다가 마침내는 아사달에 자리를 잡았다. 기내의 백성들 가운데 임금을 좇아 온 자가 매우 많았는데, 모두 당장경에 집을 정하였다.

 

自檀儉神人開創鴻業, 歷四十七世, 一千一百九十五年. 檀君旣徙居阿斯達而國人猶推尊之, 諸侯亦無敢逼者. 或曰, 朴氏.白氏, 皆其後裔, 而赫居世亦出於檀君之後云, 今文獻無徵, 未知其確矣. 自後, 諸侯頗以武力相競, 獨藍侯者出諸家之右, 時常役率군后, 以行國政, 是爲列國焉.

 

이로서 나라는 마침내 없어지니, 임금으로 있은 지 30년이요, 단검신인이 큰 위업을 처음으로 펼친 때부터 역년이 47世에 1,195년이다.79) 단군이 이미 아사달로 옮겨 거처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받들어 존중하였으며, 제후들 역시 감히 핍박하는 자가 없었다. 혹은 말하기를 박씨(朴氏)와 백씨(白氏) 등이 모두 그 후예라고 하며, 혁거세(赫居世) 역시 단군의 후손 가운데에서 나왔다고들 하지만, 지금의 문헌에는 증빙이 없어 그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 그 후로 제후들은 자못 무력으로 서로 경쟁하였는데, 유독 남후만이 제후들의 강성함 가운데에서도 뛰어나서 항상 모든 제후들을 거느리고 국정을 행하게 되었기에 이로서 열국(列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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