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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전원책의 이것이 정치다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진행하는고품격 시사 토크쇼 시즌 2
정치권의 정쟁 정략에서 벗어나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을 분석하는
살아있는 정치 비평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전원책의 이것이정치다 - 시청소감

전원책의 이것이정치다 - 시청소감
수나라 굴종 겁박에 선제공격으로 응답한 고구려 영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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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 윤*현 조회수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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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하나님은 불의와 부패와 침략과 도발에는 선한 전체를 살리기 위해 분노와 응징으로 심판하신다


미국의 b2스텔스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관련 이미지


순식간에 북괴 주요 핵개발.군사기지들을 제거할 수 있는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B2포함한 미국의 스텔스 폭격기


미국은 북괴를 경제지원하는 중공을 경제적으로 제거,분할시킴과 동시에 북괴를 순식간에 선제공격으로 제거해야 한다


불의와 부패에 저항하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불(핵공격/고증으로 증명)심판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고모부와 자신의 형을 무참히 살해하고 민생은 뒤로 하고 오로지 핵도발로 한반도와 세계를 위협하는 김정은을


두목으로 삼고 충성하는 광신도들이 불심판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면 이는 김일성일가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다


고구려 영양왕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고구려 영양왕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고구려 영양왕 요영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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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고구려 영양왕(嬰陽王)은 고구려 제 26대 왕으로 평원왕의 장자(長子)다. 평원왕 재위 7년에 태자가 된 그는, 재위 32년에 부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어려서부터 그는 의젓하고 풍채가 좋았을 뿐 아니라 총명하였다.

“내가 반드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보살필 것이다.”

태자 시절부터 이렇게 말할 정도로 영양왕은 자신만만하고 패기가 있었다.

그런데 영양왕 즉위 당시 중국에서 강국으로 떠오른 것은 수나라였다. 우문씨(宇文氏)의 북주는 부병제를 통해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황제는 오만이 지나쳐 폭정을 일삼았다. 당시 북주의 건국공신 양충(楊忠)에게는 ‘양견(楊堅)’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공적 덕분에 북주 최고의 귀족인 주국(柱國)에 올랐다. 고구려의 국상과도 같은 자리였다. 아버지 양충이 건국공신으로 수국공(隨國公)이란 칭호를 받았는데, 그 아들 양견도 그것을 세습하였다.

양견은 자신의 딸을 선제(宣帝)의 비(妃)로 삼아 황실의 외척이 되기도 하였다. 마침 선제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정제(靜帝)가 즉위하였으니, 나라의 권력은 이미 양견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결국 양견은 찬탈이나 다름없는 형식으로 외손자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581년에 즉위하고, 국호를 수(隋)로 정하였다. ‘수국공’의 ‘수(隨)’ 자에서 주(走) 자를 떼어내고 새로운 글자 수(隋)가 탄생한 것이다. 즉 달아날 ‘주’ 자이므로 ‘사라진다’는 뜻이 되어, ‘황권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 획을 떼어버리고 나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수문제 양견은 돌궐을 제압하고 서량(西梁:‘後樑’이라고도 함)을 멸하였으며,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나라까지 멸망시켜 천하통일을 완수하였다. 수문제가 중국을 천하통일한 다음 해인 590년에 고구려에서는 영양왕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고구려로서는 승승장구하는 수나라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을 통일하였으므로 수나라가 다음의 공격 목표로 삼을 만한 나라는 고구려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자 시절부터 수나라가 건국에서부터 이웃나라를 하나하나 정복하기까지 일련의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영양왕은, 자신이 즉위하자마자 수문제가 사신을 보내 자신에게 충성을 하라고 겁박한 것을 보고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문제가 은근히 자신을 떠보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영양왕도 재위 2년에 답례로 수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 또한 영양왕으로서는 수문제를 떠보기 위한 전략에 다름 아니었다. 영양왕 재위 8년까지 고구려와 수나라는 서로 사신을 왕래하는 외교관계를 지속하였다. 사실 이것은 두 나라가 서로 견제하면서 정보 탐색전을 벌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양왕 재위 9년에 고구려는 말갈(靺鞨:후의 여진족=청)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수나라의 요서(遼西) 지방을 침략하였다. 수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할 기미를 보이자, 영양왕이 선제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려는 전략이었다. 당시 수나라의 영주(營州) 총관이었던 위충(韋冲)이 고구려와 맞서 싸웠다. 이때 영양왕은 크게 싸우지도 않고 군사를 퇴각시켰다.

사실 영양왕이 수나라의 요서 지역을 선제공격한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수나라와의 싸움은 인구수나 군사력으로 볼 때 고구려가 감당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영양왕이 먼저 수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영양왕은 수나라를 선제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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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사정을 살펴 보건대 영양왕이 선제공격한 것은 수나라 군사를 끌어들이기 위한 낚싯밥과도 같은 것이었다. 수문제의 약을 올려 화가 나서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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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는 평야지역에 있었고 고구려의 경우 산악지대가 태반이었다. 고구려의 적은 군사로 강대한 수나라를 쳐서 평야지역에서 적의 대군과 격전을 벌인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산악의 요새를 활용한 산성 전투밖에 없었다. 영양왕이 노린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결국 수나라는 보급병을 포함한 200만 이상의 인류전쟁사에서 최대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략해 왔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의 보급를 끊어 버리면서 바다와 산성에서 수나라를 막아냄으로써 결국 지나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의 멸망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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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수 멸망 후에 다시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안시성에서 화살을 맞고 한쪽 눈을 잃고 병사하기 전에 고구려를 다시는 침략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다. 고구려가 망한건 태종 이세민 이후 당나라의 침략보다는 당의 침략을 막아낸 연개소문 사망이후 자식들간의 권력내분에 의해 무너진 것이다. 고로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내분과 분열이 망국의 근원이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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