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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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소중화 노선때문에 망국 식민지로 전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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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9 윤*현 조회수 352 |
고구려 후손임을 자부하며 고구려 태왕들에게 제사를 지낸 청나라 황실 여진족이 고구려족이라는 사실조차 모른 얼빠진 소중화조선왕조가 오랑캐 취급해 결국 얻어 터지고 인조가 항복한 소중화조선 수렵생활을 하던 고구려족인 여진족을 조선왕조가 품고 강력한 기마군으로 무장하여 명을 도모했다면 조선은 그야말로 한민족사에서 지나대륙을 지배한 나라가 됐다! 더욱이 개방노선으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일찍 근대화를 실현했다면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됐을 것이다! 작금의 부패 무능 패거리 당쟁에 미친 정치꾼들처럼 결국 소중화 조선왕조 통치자들의 얼빠진 역사의식과 소중화 소국화 노선때문에 결국 망국과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 시장 개방 진취성의 고구려 노선으로 국가비젼을 삼아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훈 몽케테무르(1370?-1433)는 청태조 누르하치의 6대조로서 청대에 肇祖로 숭상되었다. 건륭기에 편찬된 관찬 사서인 『만주실록』(Manju i yargiyan kooli)에서는 그를 먼터무(Mentemu, 孟特穆)라고 기록했고 아래와 같이 그의 사적을 칭송하고 있다. “판차의 뒤 세대의 후손 都督 먼터무는 덕이 있는 자로 태어나서 그의 선조들을 죽인 원수의 자손들 40인을 그의 선조가 살았던 오모호이 들판의 오도리 성에서 해 지는 방향으로 1500里의 앞에 숙수후 강, 훌란 하다, 허투 알라 라는 곳에 계략으로 데려와서 절반을 그의 선조들의 원수라고 죽였고, 절반을 잡아서 그의 형제의 家産을 몸값으로 취하고 풀어주어 보냈다. 그 후 도독 먼터무는 그 훌란 하다, 허투 알라의 땅에서 그대로 거주했다. fancai amaga jalan i omolo dudu mentemu erdemungge banjifi ini nendehe mafari be waha kimungge niyalmai juse omosi dehi niyalma be ini mafai tehe omohoi bigan i odoli hecen ci šun tuhere ergi de emu minggan sunja tanggū bai dube de suksuhu bira, hūlan hada, hetu ala gebungge ba de jalidame gajifi dulin be ini mafari kimun bata seme waha, dulin be jafafi ini ahūn deo i boigon be jolime gaifi sindafi unggihe, tereci dudu mentemu tere hūlan hada hetu ala i ba de uthai tehe,,” 『만주실록』에 기록된 몽케테무르의 사적은 역사적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 그가 조선의 會寧인 오모호이(吾音會)로 이주하여 거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곳은 오도리와 다른 곳이었고, 그의 선조는 오모호이에서 살지 않았다. 또한 그는 누르하치의 초기 도성인 허투알라(興京)에서 거주한 적도 없고 그곳에서 그의 조상의 원수를 죽인 일도 없다. 몽케테무르의 위와 같은 신화화된 영웅적 사적은 청조의 개창자인 누르하치의 위업과 그 창업의 발상지인 허투알라를 『만주실록』의 편찬자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청 황실 조상의 최초 지도자인 몽케테무르의 사적과 직결시키기 위해 고안한 서술일 뿐이다. 미화되지 않은 몽케테무르의 사실적 행적을 상세히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은 청조의 관찬 기록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이다. 만약 『만주실록』의 편찬자들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몽케테무르의 행적을 읽고 참고했다면 『만주실록』의 그에 관한 기록이 사실에 가까워졌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만주실록』의 편찬자들이 조선의 왕도 보지 못하는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했을 리 만무하지만, 설혹 그랬다 하더라도 몽케테무르를 신화화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작업이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왕조의 개창자나 그 후손이 조상의 업적을 미화하고 신성화하는 것은 공식처럼 정해진 수순이었다. 만약 그 작업을 방해하는 사실의 기록이 있었다면 신성화 작업이 중단되거나 사실이 기록되는 게 아니고 사실의 기록을 없애거나 더욱 사실적으로 사실을 왜곡했을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몽케테무르에 대해 사실의 기록이 넘치는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 그의 행적을 살펴보자. 최초 거주지 오도리 몽케테무르의 행적이 기록에서 상세히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고려말기에서 조선초기에 걸쳐 吾音會(현재 북한의 회령) 지역으로 이주한 후이다. 그 전에 그는 오도리 부족을 이끌고 무단강(후르하江) 유역 일대를 이동하면서 거주했다. 그의 부족인 오도리의 원래 거주지는 송화강과 무단강이 합류하는 지역인 오도리였다. 오도리라는 부족명은 그 지명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오도리의 위치는 현재 송화강과 무단강의 합류지점의 서쪽 馬大屯 부근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 지역은 훗날 청대에 ‘세 씨족’ 혹은 ‘세 姓’이라는 의미의 만주어 ‘일란 할라(ilan hala)’로 불리거나 이를 한역하여 ‘三姓’이라고 불렸다. 현재 이 지역은 중국 흑룡강성의 依蘭縣인데, 이 ‘依蘭’은 만주어 지명 ‘ilan hala’를 한문으로 ‘依蘭哈喇’라고 음역하고 그것을 다시 축약한 것이다. 원나라는 이 지역에 오도리[斡朶憐], 후르하[胡里改], 타온[桃溫], 탈알련(脫斡憐), 패고강(孛苦江)의 다섯 萬戶府를 설치했다. 이 다섯 만호부는 원 말기에 이르면 두 개가 사라지고 오도리, 후르하, 타온의 세 만호만 남게 되었다. 세 개의 만호를 합하여 『용비어천가』에서는 한문과 한글로 ‘移闌豆漫이란투먼’이라고 적고 있다. ‘移闌豆漫이란투먼’은 ‘삼만’ 혹은 ‘세 만호’라는 뜻의 여진어 ‘ilan tumen’의 한자와 한글 음역이다. 이 가운데 후르하 만호와 오도리 만호가 훗날 건주여진의 주축이 되었다. 후르하 만호의 수장은 아하추(?-1411?)였고, 오도리 만호의 수장은 몽케테무르였다. 元代 송화강과 후르하강(무단강)의 합류지역에 설치된 다섯 만호부 지도출처: 譚其驤 主編, 『中國歷史地圖集』 第7冊, 1982. 『龍飛御天歌』 권7 제53장에서 이성계에 귀부한 여진인을 기록한 부분. 상단 마지막 줄에 ‘夾溫猛哥帖木兒갸온멍거터물’이 기록되어 있다. 하단 여섯째 줄에 이성계의 최측근이자 조선의 개국공신 李之蘭의 여진어 이름인 ‘古論豆蘭帖木兒고론두란터물’이 기록되어 있다. 몽케테무르는 『조선실록』에 童猛哥帖木兒 혹은 夾溫猛哥帖木兒라고 기록되어 있고, 『용비어천가』에는 한자와 한글로 ‘夾溫猛哥帖木兒갸온멍거터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갸온(夾溫)은 여진인 고유의 姓이고, 童은 중국의 영향으로 인해 만들어진 중국식 성으로 생각된다. 갸온(夾溫)이라는 성의 기원은 12세기 金代의 한문문헌에서 보이는 ‘夾谷’(발음은 갸구giagu)로 소급된다. 조선에서 몽케테무르의 성을 ‘夾溫’과 ‘童’ 이중으로 적었듯이, 金代에도 ‘夾谷’와 ‘仝’(同의 古字)이 같은 성으로 혼용되어 쓰였다. 이후 ‘갸구’ 혹은 ‘갸온’이 변화하여 명대 여진족과 청대 만주족의 성 가운데 흔히 보이는 기오로(gioro)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에서는 몽케테무르 일족의 성을 칭할 때 ‘夾溫’보다는 ‘童’을 더 많이 사용했다. 훗날 누르하치 시기에 조선이나 명에서 그를 칭할 때도 ‘童’이나 ‘佟’을 성으로 썼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청 황실의 성인 ‘아이신 기오로(aisin gioro)’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누르하치 이전에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다. 이 글에서 ‘猛哥帖木兒’를 ‘몽케테무르’라고 음역하는 이유는 이 이름이 몽고어 이름이기 때문이다. 猛哥, 즉 몽케는 ‘영원하다’는 의미의 몽고어이고, 帖木兒, 즉 테무르는 ‘쇠(鐵)’를 의미하는 몽고어이다. 몽케테무르의 家系에 대해서는 그가 죽은 후인 1438년(조선 세종20) 조선 함길도 도절제사 金宗瑞가 조사하여 조정에 보고한 기록에서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김종서에 의하면 몽케테무르의 부친은 童揮厚였고 그는 오도리 만호부의 수장이었다. 몽케테무르의 모친은 보가(甫哥)의 딸 야오거(也吾巨)인데 동휘후와 결혼하여 몽케테무르를 낳은 후, 동휘후가 사망하자 여진족의 관습에 따라 휘후의 배다른 동생 포기(包奇)와 결혼하여 어허리(於虛里)· 어사가(於沙哥)· 판차[凡察]를 낳았다. 包奇에게는 본처가 있었고 그 본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오사가(吾沙哥)· 가시파(加時波)· 요지(要知)였다. 여진의 형사취수제 관습 때문에 몽케테무르 형제들은 형제이자 사촌이고, 동시에 異母兄弟와 異父兄弟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몽케테무르의 아들은 童權豆, 童倉, 童奏羊, 童綽顔이었다. 이 가운데 둘째아들 童倉이 훗날 청대에 충샨(cungšan, 充善)이라고 기록된 사람으로 누르하치의 오대조이다. 기록에서는 몽케테무르가 우디거(兀狄哈) 부족과의 상쟁에서 패배하여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결국 이성계의 후원하에 오음회에 이주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우디거와 상쟁한 곳이 오도리 부의 최초 거주지인 오도리 지역이었는지, 그래서 이 상쟁으로 인해 오도리 부가 오도리 지역을 떠났는지, 아니면 오도리 부가 오도리 지역을 떠난 후 무단강 일대 어느 곳에서 우디거와 상쟁하고 더 남하하여 오음회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서술은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도리 부의 최초 거주지가 오도리 지역인 것은 알 수 있지만 몽케테무르의 최초 거주지가 그곳이라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원 말기에 오도리 지역에서 일어났던 오도리와 우디거의 충돌을 보면 몽케테무르의 최초 거주지가 오도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몽케테무르의 오도리 부를 오도리 지역에서 축출한 우디거는 훗날 명으로부터 海西女眞이라고 불린 후룬 우디거(忽剌溫兀狄哈)로 생각된다. 후룬 우디거는 원대에 吾者(斡者, 斡拙, 兀者)野人으로 불렸고 이들은 원에게 사냥용 매인 海東靑을 공납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어 있었다. 이 공납의 의무를 관리한 것이 원이 현지에 설치한 만호부들이었다. 해동청 공납의 노역은 매우 가혹했기 때문에 吾者野人은 1343년(원순제 至正3)과 1346년(至正6)에 반란을 일으켰고, 몽케테무르의 아버지인 童揮厚는 원의 만호로서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다시 말해 오도리 등의 만호부들은 현지의 친원세력이었고, 吾者野人, 즉 후룬 우디거는 반원세력이었다. 원의 쇠퇴는 곧 이 지역에서 만호부인 오도리와 후르하의 쇠퇴를 의미했고, 그 반대 세력인 우디거의 성장을 의미했다. 원의 쇠퇴와 멸망은 그 영향 아래 있던 동아시아 각지에서 권력의 원심적 경향을 유발시키며 새로운 권력들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권력이 성장하고 안정되기까지는 곳곳에서 혼란과 무정부상태가 지속되었다. 오도리 부의 이주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린 경우였다. 1368년 몽골이 중국에서 북방 초원으로 후퇴한 후 遼東은 신흥국 명과 북원의 세력이 충돌하는 전장이 되었다. 요동에서 원의 유신인 나하추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과거처럼 만주지역의 퉁구스계 여러 민족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십여년간 만주지역에서 명과 북원과 나하추 세력이 각축했고 거기에 말기의 고려와 조선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현지의 여진 등 퉁구스족들은 과거의 권력과 새로 태어난 원심적 권력들 사이에서 요동쳤다. 만주지역에서 원의 잔여세력들이 명에 투항하면서 명이 영향력의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370년대 말, 홍무 10년경부터였다. 오도리 부와 충돌하던 吾者野人(후룬 우디거)은 1384년(明홍무17) 다른 여진족보다 빨리 명에 귀부했다. 몽케테무르가 이끄는 오도리 부가 1385년 무렵, 혹은 그 이전에 본래의 거주지를 떠나 이동을 시작한 것은 새롭게 명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吾者野人(후룬 우디거)이 이전의 반란을 경험삼아 원이라는 배후세력을 상실한 채 고립된 오도리 부를 공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오도리 부가 이동한 것과 같은 시기에 아하추가 이끄는 후르하 부도 이동한 것으로 보아 후르하 또한 오도리와 유사한 상황에서 吾者野人에 의해 원거주지에서 축출된 것 같다. 吾音會 정착 몽케테무르가 이끈 무리는 오도리 지역을 떠나 남하한 후에도 계속 오도리로 불렸다. 오도리 부는 원거주지인 오도리를 떠난 후 상당 기간 동안 오도리와 두만강 사이의 일대를 전전했던 것 같다. 이때 오도리 부는 몽케테무르 인솔하에 단일하게 하나의 집단을 유지하면서 이동했던 것 같지 않다. 훗날 몽케테무르가 吾音會에서 거주하다가 일시 鳳州로 이주하던 때나, 더 훗날 그가 사망한 후에 그의 동생 판차와 아들 충샨이 무리를 이끌고 파저강 유역으로 이주할 때, 몽케테무르의 다른 형제들의 무리는 함께 이동하지 않고 두만강 유역에 잔류하여 계속 오도리로 불리며 조선의 변경민을 구성했던 것에서도 이들의 분산성이 잘 나타난다. 또한 몽케테무르가 이주하기 훨씬 전인 원대 초기에 오도리 부의 일부가 두만강 일대에서 斡東逸彦(odoli irgen, 오도리 백성)이라고 불리며 이성계의 고조부 李安社와 관계맺는 것에서 보이듯이 오도리 부의 이주는 한 시기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오랜 시기에 걸쳐 다양한 집단별로 진행되었다. 이런 점은 후르하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초기에 두만강변의 여러 지역에서 거주한 여러 집단의 오랑캐(兀良哈)는 오도리가 남하한 시기에 마찬가지로 북방에서 남하한 집단으로 생각되는데, 아하추의 후르하 부도 조선에서 오랑캐라고 지칭한 것을 보면 그들도 오랑캐의 일부였다. 또한 이들 오도리, 오랑캐와는 별도로 원래부터 두만강의 북쪽과 남쪽 지역에서 거주해온 여진인 집단들이 있었다. 즉 이 시기는 몽케테무르에 직속된 오도리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오도리 집단들과 아하추의 후르하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오랑캐 집단들이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으로 구성된 씨족이나 소부족 단위로 분산되어 남쪽으로 이동하여 두만강변에 정착하면서 원래부터 그곳에 살던 토착여진인과 혼재하고, 이들의 동쪽과 북쪽으로는 여러 집단의 우디거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여진의 여러 씨족과 부족들은 서로 충돌하면서 한편으로는 혼인을 통해 연합하기도 하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몽케테무르가 이끄는 오도리 부는 일시 두만강 바로 북쪽, 현재 중국의 훈춘 일대에서 거주하다가, 다시 두만강을 건너 남쪽으로 이주하여 조선의 동북 경역인 吾音會, 즉 현재 북한의 會寧 지역에 정착하여 거주하기 시작했다. 吾音會는 『동국여지승람』에서 胡語이고 斡木河(阿木河)의 다른 표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에 의하면 斡木河(阿木河)는 강 이름이 아니고 지명으로 보인다. 그러나 斡木河는 원래 풍산개로 유명한 豐山川의 하류로서, 豐山에서 會寧까지의 구간을 흐르는 강의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추측컨대 여진인이 이 강을 호수라는 뜻의 여진어 ‘omo’라고 불렀고, 이를 조선인이 한자로 음차하여 斡木河(阿木河)라고 쓴 것 같다. 그리고 강 이름을 지명으로도 쓰는 일반적인 관행으로 斡木河가 지명이 되어, 그것을 조선인은 吾音會라고 한자로 음차하여 썼던 것 같다. 먼 훗날 청대에 만주족은 조상의 거주지였던 오음회를 만주어로는 ‘오모호이omohoi’라고 쓰고, 한자로는 鼇莫輝, 俄漠惠, 鄂謨輝 등으로 다양하게 음사했다. 會寧이란 지명은 김종서가 육진을 설치하던 시기에 吾音會에서 ‘會’자를 취해서 만든 이름이다. 몽케테무르의 오도리 부가 오음회로 진입해서 정착한 시기는 확실치 않다. 『조선태종실록』 5년(1405년) 4월 을유조에서 몽케테무르가 ‘우리가 조선을 섬긴지 20여년’이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추산하면, 1385년(고려 禑王 11년) 무렵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혹자는 몽케테무르의 이 말을 과장이라고 보아 이보다 후의 시기를 오음회 진입 시기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몽케테무르의 말이 과장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조선실록』에서 그가 오음회에 정주하고 있다고 명확히 기술한 최초의 기록은 1399년(정종1)에 보인다. 오도리와 함께 三姓 지역을 떠난 후르하는 오도리와 수장 가문끼리 대대로 통혼하면서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한 집단이었지만 오음회로 이동하지 않고 다른 길을 택했다. 후르하 부의 수장인 아하추는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鳳州로 이주했다. 鳳州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 吉林省 海龍縣의 北山城子라는 설과 黑龍江省의 東寧縣이라는 설이 있다. 아하추가 일찍부터 명과 가까워진 것을 근거로 판단하면 두 지역 가운데 명과 거리가 가까운 전자가 더 유력하다. 아하추의 후르하가 봉주로 진입한 시기는 확실치 않다. 또한 봉주로 이주하기 전에 두만강 중하류역의 북방 어느 곳에서 일시 거주했으리라 추정되지만 그 역시 확실하지 않다. 후르하 부는 봉주로 이주한 후 1424년 아하추의 손자인 李滿住(1407?-1467)의 인솔하에 압록강의 지류인 파저강(婆猪江, 佟佳江이라고도 한다) 유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거주했다. 후르하의 수장 아하추는 원으로부터 수여받았던 직함과 마찬가지로 조선으로부터 후르하만호(火兒阿豆漫) 관직을 수여받았지만 오도리의 몽케테무르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조선과의 관계가 긴밀하지 않았고 일찍부터 명과의 관계가 밀접해졌다. 그 이유는 몽케테무르가 조선의 영향권인 오음회에 들어와 거주한 반면, 아하추의 후르하 부는 지리적으로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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