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진행하는고품격 시사 토크쇼 시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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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정치 비평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중국의 하.은.주는 단군한국을 섬기며 조공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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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5 윤*현 조회수 311 | |||||||||||||||||||||
단군한국과 당시 중국 왕조들의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스스로 '북극성'이라 칭한 단군왕검 천왕의 주요 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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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정통사서 『환단고기/ 단군세기』는 고조선이 초대 단군 때부터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조선의 강역을 논하면서 잠시 소개하였듯이, 순임금 때 중국은 국가의 존망이 달린 대홍수를 당하였다. 그 전에 고조선의 도움으로 보위에 오른 순은 9년 동안 계속된 물난리도 고조선의 도움으로 해결하였다. 그 결과, 순은 정치적으로 더욱 고조선에 예속되었다. 고조선은 회수와 태산 지역의 제후들을 평정하고 그곳에 설치한 분조分朝를 순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였고, 현 산동성 교남시의 낭야성60)에 감우소監虞所(우순의 정치를 감독하는 곳)를 설치하여 순으로부터 분조에 관한 일을 보고받았다. 이로 볼때,『 서경』에 기록된“ 사근동후肆覲東后”라는 구절은‘ 순임금이 동방의 천자를 알현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우禹가 세운 하나라(BCE 2205~BCE 1766)도 고조선에 예속되었다. 우는 아버지 곤이 치수에 실패하여 순임금에게 처형당한 후 그 뒤를 이어 치수사업을 맡아보던 관리(司空)였다. 순을 대신하여 참석한 도산회의에서 우는 고조선의 태자 부루에게서 오행치수법이 적힌 금간옥첩을 받았다. 이 비법으로 홍수를 해결하고 인심을 얻어 나중에 순의 왕위를 물려받아 하나라를 열었다. 하나라는 마지막 군주 걸桀에 이르기까지 내내 고조선을 상국으로 모셨다. 하나라에서 상나라로 중원의 왕조가 교체되는 데도 고조선의 힘이 작용하였다. 상나라의 초대 임금인 탕이 하나라 임금 폭군 걸을 정벌하고자 하였을 때, 13세 흘달단군이 처음에는 걸을 지원하였으나 걸의 포악한 정치가 개선되지 않자 결국 탕의 손을 들어 주었다.65) 상나라는 동북방을 존숭하였다. 그래서 상나라 말기의 도읍지였던 하남성 안양시 은허 유적의 궁전, 성벽, 무덤 등은 모두 동북방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상나라의 동북방에는 모국인 조선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의 상나라는 고조선을 문화의 조국으로 받들었으나, 12대 하단갑 때부터는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22세 무정 단제 이르러서는 급기야 고조선의 변방을 침범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21세 소태 단제와 22세 색불루 단제가 상나라를 쳐서 대파하였다. 패전을 거듭하던 상나라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결국 멸망하였다. 상나라 다음으로 550년 동안 중원을 지배한 주나라는 일반적으로 한족漢族이 일으킨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창건자인 문왕과 무왕은 그들의 시조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이족 출신이다. 상나라 군대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던 주나라가 창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동이족의 지원을 받은 덕분이다. 주나라 건국을 도운 동이족,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강태공이다. 무왕이 나중에 강태공을 산동반도 지역에 있는 제나라에 봉한 것도, 동이족 출신인 그를 주 왕실에 비협조적인 그 지역 동이족을 다스릴 적임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문왕과 무왕 이후 주나라는 앞선 왕조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에 조공과 방물을 바쳐 예를 표시하였다. 요컨대 단군한국은 지구천제가 다스리는 천상국이었으며, 하·상·주 중국 3왕조는 모두 고조선에게 정치적 지배를 받았다. 조선왕조 세조는 왜 [한민족 사서] 수거령을 내렸나? http://m.blog.naver.com/roqur21/220776745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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