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보수 논객 전원책 변호사가 진행하는고품격 시사 토크쇼 시즌 2
정치권의 정쟁 정략에서 벗어나 국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주는 정책을 분석하는
살아있는 정치 비평 프로그램을 지향한다.
진시황 때 중국은 비로소 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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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4 윤*현 조회수 605 |
15. La Luna - Sara
15. La Luna - Sara
동이족 출신의 진시황은
중국대륙을 통일한 후에
비로소 황제를 칭하였다!
그 전에는 만주에 천제국
단군한국(부여)가 존재했기
때문에 황제를 칭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호 역시 단군한국을
의미하는 '진'이라 칭했고,
고구려를 계승한 대조영도
국호를 큰나라 단군한국을
의미하는 '대진'으로 칭한
것이고, 고구려 황족 후손인
태무진도 자신의 칭호를
단군한국의 국호인 '진'에
진의 임금이라는 의미로
'진한'이라 칭한 것이다.
즉, 진(징기스)+한(칸)이다!
- 동방의인 코리아대한(윤) -
[학술자료]진국辰國 =신국=하나님 나라
단군왕검 천왕의 단국의
국호는 '한'=>'진'=>'부여'로
변경되었다! 단군한국의 진한眞韓은 달리 진한辰韓, 진국辰國으로도 불린다. 먼저 단군세기에는 진한의 기록이 두 군데 보이니 모두 진한眞韓으로 기록했다. 단군세기의 4세 단군 오사구 임인 19년의 기록인 “식달에게 명하여 람진변藍眞弁 3부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하나라를 정벌케 하다”와 6세 단군 달문의 임자 35년의 기록인 “진한眞韓이 나라의 중심을 세우니 다스리는 도리는 오직 항상 새로움이라.”의 기록이 그것이다. 그 다음 삼한관경본기에는 진한眞韓이 진한辰韓, 진국辰國으로 혼용되어 쓰였다.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상의 “진국辰國은 천제의 자손이 다스리는 곳”, 번한세가 하의 “진번眞番 이한二韓의 병사들과 더불어 협공”, 마한세가 하의 “진한辰韓이 스스로 무너졌다”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소도경전본훈에는 두 군데 모두 진한辰韓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땅에는 삼한三韓이 있으니 진변마辰弁馬 삼경지한三京之韓이다. 한韓은 즉 황皇이요 황皇은 즉 대大요, 대大는 즉 일一이다”라는 기록과 “‘저울대는 부소량’이라 함은 곧 진한辰韓의 옛 도읍을 일컫는 것”의 기록이 그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의 불후의 업적인 전후삼한고에서 전삼한과 후삼한을 이야기했으니, 전삼한은 단군조선의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린 것을 말하고, 후삼한이란 서기전 194년 번한의 기준이 망한 후, 삼한의 유민이 한수 이남으로 몰려들어 건국한 삼한을 말한다. 아울러 전삼한은 북쪽 대륙에 있었으므로 북삼한이라고 하고, 후삼한은 남쪽 한반도에 있었으므로 남삼한이라고 한다. 단재 선생은 단군조선이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린 이유를 삼신 사상 때문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족이 단군한국의 황권을 장악한 진眞국 단군한국 중기[BCE1285~BCE426]인 22세 색불루 단제 때에 이르러 단군 조선 초기[BCE2333~BCE1286]의 삼한관경제는 삼조선 체제로 바뀌었으니, 진한은 진조선으로, 마한은 막조선으로, 번한은 번조선으로 바뀐다. 삼한관경본기의 “삼한을 고쳐 삼조선이라 하였는데 조선이란 토경을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진조선眞朝鮮은 천왕이 스스로 다스렸으되 땅은 옛 진한辰韓 그대로였다. 정사는 천황으로 말미암았는데 삼한이 모두 한결같이 통솔되어 명령을 받들었다.”의 기록은 삼한 체제가 삼조선 체제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삼한관경본기 말한세가 하’의 “여원흥을 명하여 마한馬韓으로 삼아 막조선莫朝鮮을 다스리게 하고, 서우여는 번한番韓으로 삼아 번조선番朝鮮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를 통 털어 단군관경이라 이름하니, 이가 곧 진한辰韓이요, 역사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 일컬음이 이것이다.”의 기록은 삼조선 체제가 아직 과도기임을 뜻한다. 그 까닭은 위의 기록에서 삼한과 삼조선을 혼용되어 쓰여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한, 번한은 나라 이름이자 왕호임(한韓은 황제皇帝다. <소도경전본훈>)으로, 관경이 막조선, 번조선 체제로 바뀌면 왕호도 또한 막조선, 번조선으로 바뀌어야 할 텐데 아직 마한, 번한으로 불리우고 있음으로 이 것은 아직 제도가 미비 되었음을 뜻한다. 때문에 삼조선 체제는 22세 색불루 단군 때 처음 나왔으나 단군 조선 말기[BCE425~BCE238]인 44세 구물 단군 때에 비로소 완비 되었으니 소도경전본훈의 다음 기록은 그 명백한 증거가 된다. “삼조선이란 이름이 단군 색불루 때에 처음 나왔으나 그 때는 미비하였는데 단군 구물 때에 이르러 비로소 완비되었으니, 삼한이란 뜻은 분조를 두어 토경을 관리한다는 것이고, 삼조선이란 뜻은 분권을 행하여 토경을 관리하는 제도를 뜻한다.” 대진국大震國 광개토대제 때에 이르러 삼한을 통일하고 구환을 복속시켰던 고구려[BCE58~AD668]는 개화 27년 9월 21일에 수도 평양성이 함락됨으로 28대 726년 만에 망한다. 그 뒤를 이어 일어난 진국振國장군 대중상은 고구려의 동북쪽을 도모하여 동모산에 도읍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하니 연호는 중광이었다. 그리고 태조 고황제 대조영이 제위를 계승하여 국호를 고쳐 대진으로 삼고 연호를 세워 천통이라 하였으니, 진국震國은 곧 고구려의 후예를 뜻한다. 규원사화에서는 “고왕의 꿈에 신인이 금부金符를 주면서 말하길 ‘천명天命은 너에게 있으니 나의 진역震域을 통일統一하라’고 함으로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발해의 정식 국명은 대진大震이다. 진震의 뜻은 문왕 팔괘인 ‘건乾, 감坎, 간艮, 진震, 손巽, 이離, 곤坤, 태兌’ 중에서 진震 괘를 상징한다. 진괘란 벼락을 뜻하며 오행으로는 목木을 방위로는 정동방正東方을 상징한다. 대진국의 후예들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고 나라의 폭이 9,000리에 달하던 대진국[AD668~AD918]은 애제 13년에 이르러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홀한성忽汗城이 거란에게 포위되자 함으로 15대 259년을 끝으로 망하고 만다. 대진국 멸망한 원인으로 규원사화에서는 청평 노인의 말을 빌려“항상 하느님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내더니, 자손에 이르러 교만해지고 방자해짐에 점차 이를 폐지하고 도리어 유교와 불교를 섬기니, 나라가 드디어 쇠잔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자연재해설이 있다.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면 백두산은 총 세 번 화산 폭발하여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한철학에 있어서도 진震에는 지진地震이란 뜻이 있다. 대진국이 망하자 발해 황자 대광현을 비롯한 많은 무리들이 동족의 나라 고려에 투항했다. 그리고 그 뒤 발해의 옛 땅에는 대진국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니, 그 나라 이름은 정안국, 흥요, 대발해국이다. 정안국定安國[97?~97?]은 발해의 옛 땅 서쪽 변두리를 차지하고 세운 나라 이름이다. 흥요興遼[AD1029~AD1039]는 고려 16대 현종 원문대왕 20년에 대진국 태조 고황제의 7세손인 거란 동경장군 대연림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연호를 천경이라 하였다. 대발해국大渤海國[AD1116~AD1116]은 고려 16대 예종 문효대왕 11년 정월에 발해사람인 동경 비장 고영창이 요동 50여주를 점거하고 세운 나라 이름이다. 연호를 융기라 했다. 이 대진국의 후예들은 대진국의 부활을 동족의 나라인 고려 조정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고려는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결국 이 발해의 모든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것은 대진국 광성문황제 대흥 45년에 고구려의 후예인 치청절도사 이정기가 당에 대항하자, 군대를 파견하여 제나라를 건국하도록 도와 준 것과 극히 대조된다. 생각해 보면 대진국을 멸망시킨 글단契丹의 뿌리는 15세 대음 단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군세기에 “기미 40년(BC 1622]에 단군께서는 동생 대심을 남선비南鮮卑 대인으로 봉하셨다”고 하였으니, 거란의 뿌리는 또한 조선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리고 대진국의 백성이 되었던 여진女眞의 조상 말갈은 숙신의 후예이니 곧 신지씨의 후손이다. 규원사화에 “단군 왕검께서는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 땅을 주니 산하가 장엄하고 풍세가 강하여 속진국 또는 숙신肅愼이라 했다”고 전한다. 더불어 옛 일을 더듬어 보면 우리 고려의 북방에는 항상 거란과 여진의 두 북방 민족이 이웃하여 있었으니, 거란은 글단契丹이니 단丹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단檀과 동음임으로 단군의 후예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고 여진女眞의 여女는 고려高麗의 려麗와 부여夫餘의 여餘와 동음이며, 眞은 진한眞韓의 진眞과 일치하니 여진은 진한, 부여, 고구려의 후예라는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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