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쇼 정치다 프로그램 이미지

시사 매주 월~금 오후 5시 20분

시사쇼 정치다

정치 토크 맛집!
시원하게 속을 풀어드립니다.

시청자의견

시청자의견
탄핵당한 윤관은 역사의 승리자
  • 페이스북
  • 트위터
  • 이메일보내기
  • URL복사
2017.10.17윤복현 조회수 474



대한민국의 국제적 국호는 고려.즉 코리아로써


미래를 위한 국시 역시 고구려처럼 다물이어야 한다!


여기에 반대한 세력은 반민족 반국가세력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중-러 군사방패노릇하며 북 2천만 한민족을 


노예삼고 있는 북괴를 제거하고 북진해야 하는 이유다


고려는 고구려의 공식 국호다(중원 고구려비문 내용)


왕건은 고구려 계승의지를 가지고 국호를 고려로 정했다


여진족은 고구려의 말갈족으로 훗날 중국대륙을 지배한


청을 건국하였다. 왕건의 고려당시 고려인 김행이 규합한


여진은 강성해져 고려를 자주 침략하게 되었다.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고려를 제압해야하는 이유도 있었다!



고구려의 국시가 단군한국의 모든 영토회복과 민족통합이듯


왕건의 고려 역시 고구려회복이였다. 그러한 차원에서


여진족을 정벌하고 북진한 윤관이야말로 진정한 고려인이다


또한 청을 정벌하고 중국대륙을 도모하자던 조선시대


윤휴 역시 윤관을 계승한 진정한 고구려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윤관은 탄핵당했고, 윤휴도 역시 음해당해 죽었다


윤휴는 병역을 기피한 양반층도 병역의무를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고,윤관처럼 신분차별없이 무예가 뛰어난 인재들은


장교.장군으로 키워서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농업을 증대하여 전쟁에 대비한 군량미 확보를 주장했다!




현재 대한민국에 팽배해 있는 갑질.음해의식이 증명하듯


다물주의적이고 대국적인 인물들은 음해하여 죽이는 못된


민족성은 오리지날 한민족성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추켜


세워주고 키워주고 뜻을 이루도록 돕는 민족성이 진짜다!




고려를 침략한 여진족을 정벌하고 고려영토 넓힌 윤관을


끝까지 보호한 고려 예종과 탄핵요구한 고려 고관 대신들


윤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여진정벌이 끝나자,윤관은 오연총과 함께 왕우의 명을 받들어 개경으로 귀환하고 있었다. 그가 귀환하자,최홍사 등 대신들은 윤관과 오연총이 여진정벌 실패의 책임을 묻고자 왕우에게 윤관,오연총을 처벌할것을 간언하였고,왕우는 윤관과 오연총을 봐주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윤관과 오연총의 부월을 거둬들여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왕우는 여론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고,신기군을 사열하던 날,신기군을 위로하기 위하여 윤관과 오연총을 배제하며 말했다.

 “동계 전투에서의 패배는 장수의 잘못이니 내가 어찌 너희의 노고를 잊겠는가?”

시간이 흘러 1109년 11월,윤관에 대한 성토가 잠잠해질때 쯔음,대신들은 윤관에 대한 공격을 다시금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간의대부 이재와 김연은,대궐 문에서 엎드리면서 왕우에게 윤관을 처벌할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윤관 등이 함부로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키고도 싸움에 져서 나라에 해를 끼쳤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하옥[下吏]하도록 하소서.”

하지만,왕우는 윤관과 오연총을 처벌할것을 별로 원치 않았고,심후를 보내 윤관의 처벌을 불허했다.

 “두 원수(元帥)가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내었으며, 옛날부터 전쟁에는 이기고 지는 것이 있는데 어찌 죄라 하겠는가?”

그러나 이번엔 최홍사마저 나서서 윤관을 처벌할것을 간언했고,계속해서 윤관에 대한 처벌 상소가 늘어나자 왕우는 윤관의 공신칭호를 박탈하고 관직을 그만두게끔 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이상의 처벌이 없자,1110년 5월,최홍사,김경용 등 대신들과 간관들은 왕우에게 윤관,오연총이 여진정벌에 실패한 죄를 묻기를 다시한번 청했다. 왕우는 최홍사의 청을 듣지않고 내전으로 들어갔고,최홍사 등 대신들은 중광전 동자문 앞에서 해질때까지 윤관과 오연총 등을 처벌할것을 요청했지만 왕우는 듣지 않았다.

그러자 최홍사는 파업을 결심해 윤관의 처벌을 요청하는 대신들과 함께 수십일간 출근을 하지 않았고,궁궐이 텅텅 비자 왕우는 평장사 이오,중서사인 이덕우 등을 숙직시키면서 좋은 말로 최홍사 등을 달래니 그때서야 최홍사 등 대신들은 다시금 출근을 했다. 이후에는 윤관 처벌 논의는 사그라들었고,1110년 12월,왕우는 윤관을 수태보 문하시중으로 복직시켰고,윤관은 이를 사양했지만 왕우는 윤관을 격려하며 말했다.


윤관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경복대 이인철 교수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과


현장 답사를 근거로 추정한 윤관의 동북9성 위치와 고려의 국경선이다.



(중략) 경이 여진(女眞)을 정벌한 것은 선왕[先考]이 남긴 뜻을 받들고, 〈그것을〉 본받으려는 과인을 생각한 것이었다. 직접 칼과 화살을 무릅쓰고 적의 성채에 깊숙이 들어가 적의 목을 베고 포로로 잡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리고 100리의 땅을 개척하고 9주의 성을 쌓아 국가의 오래된 수치를 씻었으니, 즉 경의 공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랑캐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 배반하거나 항복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그 남은 무리들이 의지할 곳이 없는지라 추장이 항복하고 강화를 청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좋은 기회라 여겼고 짐 또한 차마 할 수 없어 결국 그 땅을 돌려주었다. 해당 관청에서 법에 따라 자못 논핵(論劾)하여서 갑자기 그 직책을 빼앗았으나 짐이 끝내 경을 허물하지 않은 것은 맹명(孟明)이 다시 강을 건넌 것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지금 짐이 경에게 주는 것은 경의 옛날 관직이었으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짐의 이와 같은 마음을 알고, 속히 와서 직무를 맡도록 하라.”

그러나 윤관은 대간들의 빗발치는 탄핵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했던것일까,문하시중에 임명된지 6개월만인 1111년 5월,윤관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파평 윤씨 집안의 자제로써 과거에 급제한 이래로 걸출한 능력을 보여줘 당대를 대표하는 엘리트로 자리매김하고,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정벌에서 크게 활약해 동북9성을 세우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일이 서투르고 장기적인 계획을 짜는데 부족한 면모를 보여줬고,그 부족한 면모로 인해 여진정벌의 실패,그리고 여진정벌 실패로 인한 빗발치는 탄핵까지. 그는 파란만장한 생을 뒤로한채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댓글 0

(0/100)
  •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