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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통치목적은 백성들의 영원한 행복=영락(永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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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1윤복현 조회수 593





광개토태왕의 이름은 고담덕이다!



[삼국사기]기록에는 영리하고 대범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영리하다는 것은 학문에 능하고 상황을 분석하고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이고, 대범하다는 것은 비굴하지 않고, 옹졸하지 않고 관대하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이롭게하기위한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나다는 의미다. 이것이 여성들을 심쿵하게 하는 사내 대장부들의 마음그릇이며 인생의 길이라할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의 황후되는 여인 또한 미모만 아름다운게 아니라, 생각과 마음 역시 영리하고 관대하고 대범한 인물이라할 것이다.



그래야 신하와 백성들이 흠모할 수 밖에 없고, 국론이 하나로 모아질수가 있는 것이다.



영락(永樂)은 광개토태왕의 시호다.



영락(永樂)은 영원히 즐겁다.행복하다는 의미로 그 대상은 백성들이다. 백성들이 영원히 즐겁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 광개토태왕의 통치목적이였던 것이다.



한민족 정통사서[환단고기]


"태황께서 마니산에서 올라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하늘음악을 연주하셨다."



지구중앙국이였던 한국의 통치자들은 고대부터


인류의 대제사장들이였다. 태왕도 대제사장이다!



광개토태왕이 정벌하여 복속한 영역




천신신앙주의자이자,백성을 널리 사랑한


광개토태왕! 티벳(토욕혼)까지 정벌하였다!



- 다물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광개토태왕의 정벌루트를 추적한다


기존 사학계와 역사스폐셜 방송에서는 광개토태왕의 토욕혼 정벌을 잘 다루지 않는 것 같다. 토욕혼은 지나북부의 강자로 흥기하고 있던 북위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의 기록을 보자!


「8년은 무술년이었다. 정예부대를 백신(숙신)과 토욕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고 막구라성과 가태라곡을 쉽게 차지하여 그 곳의 남녀 300여명을 포로로 잡아 왔다. 그들은 이 때부터 조공을 바쳐 오게 되었다. 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愼土谷 因便抄得 莫0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口事」 廣開土王碑文 永樂八年條


백신과 토욕의 정확한 위치는 사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으나, 백신은 숙신을 지칭한 것이다. 숙신은 고구려 서천태왕 11년(A.D 280년) 10월에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달가의 역습을 받아 추장이 죽고 단로성이 점령당하여 6-7개소의 부락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 후 영락 8년(A.D 398년)에 고구려가 정벌한 백신은 동부여의 동쪽인 연해주 방면이다.


그리고 토욕(土谷)은 [위서(魏書) 토욕혼전(吐谷渾傳)]에 나오는 토욕혼(吐谷渾)을 지칭한 것이다. 이 토욕혼은 선비족 모용외의 일파였는데, A.D 4세기 초에 시조 토욕혼이 이복동생인 모용외와 사이가 벌어져서 모용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광개토태왕이 토욕혼을 정벌한 A.D 398년경에는 북위의 서쪽인 감숙성, 청해성 방면인 티벳지역에 있었다. 국내성에 티벳까지 정벌이 가능한 일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몽골초원에서 유럽까지 정벌에 나섰던 징기즈칸만 보아도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고구려는 기마국가다. 그것도 화살도 쉽게 뚫지 못하는 찰갑으로 무장하고 당시 최고의 명마라는 고구려의 말을 타고 달리던 기마국가였던 것이다. 몽골의 말은 하루에 500km를 달렸다고 한다. 모본태왕 때 한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고구려는 어양-북평-태원에 이르는 원거리를 단번에 달려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광개토태왕이 북위의 서쪽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한 것은 북위가 후연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수도를 성락(盛樂 : 내몽고 呼和浩特 부근)에서 평성(平城 : 산서성 대동)으로 옮기고, 후연의 유주를 압박하자, 북위의 배후에 있는 토욕혼을 정벌하여 북위를 포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백신을 정벌한 것은 동부여의 배후에 있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부여를 포위.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개토태왕은 토욕혼을 정벌한 그 해에 북위 수도에 고구려 기술자 40여만명을 정착시켰다. 이는 지나 북부지역을 고구려가 완전히 복속했다는 반증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정복군주로 상징되는 광개토태왕은 태왕직위 20년 동안 왜 그렇게 정복사업에 몰두했을까? 그것은 단군조선의 옛영토를 모두 회복하겠다는 고구려의 개국성조 고추모의 다물정신의 실현에 있었고, 모용선비족(전연)에게 미천왕의 시신이 도굴당하고 왕후와 태후가 인질로 끌려 갈 정도로 비참하게 고구려가 유린당하고 결국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자신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수모를 되갚고 다시는 그러한 비참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강한 고구려를 건설하기 위함이였다.




고구려의 魂 (혼) 만주벌판을 달리던 고구려인 들의 기상을 나타낸 곡으로웅장하고 스케일
큰 선율과말발굽 소리를 나타내는 듯한 강렬한 북소리가 인상적인 곡으로 처음은 무용음악이
였든 것을 실내악곡으로 재편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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