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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세민 추격 장안성에서 항복받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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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5윤복현 조회수 1086




태양(천신)새=봉황




무궁화(천신)새=봉황
















-



이세민이나 김일성처럼



나쁜 인간들은 스스로



탐욕과 착각에 빠져 선차적으로



문제를 만들어 상대를 괜히



자극하거나 침략.도발하는 인간들!





기회를 주고 관대하게 대해도



반성하지 않고 개선하지 않



대적하면 징기스한처럼



쑥대밭을 만드는수 밖에 없다!



김정은의 운명일 수도 있다!



그것이 불의에 대한 공의다!



몽골사신을 뜨거운 물에 데워죽인



호라즘에 대한 쑷대밭이 대표사례!



징기스한이 쑷대밭을 만들 때는



상대가 징기스한의 호의를



시하고,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고



오만하고 분수를 몰라서다!






수없이 고구려에 대적한 당나라는



결국 연개소문에게 죽사발 당했다!




당나라는 본래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를 수없이 침략하여



약탈했다가 고추모 아들인



유리태왕 때 정벌당하여



고구려에 굴복하여 고구려의



용병생활을 했던 선비족이



훗날 중국 북부지역으로 남하하여



선비족 중 탁발씨가 지나대륙을



통일하여 건국한 나라로써 사실



탁발씨 나라는 초기에 고구려의



귀족이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던



고구려의 제후국 수준의 나라다.



그런데 지나대륙을 통일한 후에



부모의 나라나 마찬가지인 고구려를



침략한 것이다. 하늘에 태양은



둘이 될 수 없다는 천하관을 가지고!




동북공정과 식민사관에 대응하는 해법은 바른 민족사


중국인들에게 두려움의 전설이 된 연개소문


-이세민을 쫒던 지역에는 연개소문에 대한 설화가 가득하다-


설화는 실제 역사적 사실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중국에서는 당태종을 추격하는 [연개소문]에 대한 경극이 유명하다.


이것은 당시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추격하여 장안까지 입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자체가 당시 장안의 소문과 화제가 되어 후대까지 입으로 전해졌음을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감추어진 역사서인 [한단고기]의 가치는 실로 중요하다 할 것이다!!

[한단고기]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추격하여 장안까지 입성했음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단고기『태백일사』에는 이후 상황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연개소문 은 당군의 뒤를 계속 추격하여 요동성을 회복하고 당 장안 인근 용도성(桶道城)2)에 일군을 보내 당태종을 계속 추격하자 궁지에 몰린 당태종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애걸하였다. 그리고 649년 당태종이 52세 나이로 숨을 거둘 때, ‘파요동지역(罷遼東之役), 다시는 고구려를 정벌하지 말라.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는 유언을 남겼다.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는 당시 고구려군의 장안 입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막리지는 추정국, 양만춘 등 수만 기를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치고 피리 부는 취악대를 앞세워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민과 더불어 약정(約定)을 하였는데,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江左)의 전 영토가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신라계 김부식이 민족자주노선인 묘청의 난을 평정하고 편찬한 중국사대주의 역사서인『삼국사기』에서도 “고혜진이 마침내 장안에 이르렀다(惠眞竟至長安)”고 하여 고구려 장수 고혜진에 의한 당 본토공략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실은 ‘중국을 위하여 수치를 숨긴다’고 하는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의 역사기술로 모두 숨겨놓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연개소문 이 657년에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 이 사망하자 연개소문 의 큰아들 남생과 그 밑의 남건, 남산간의 권력싸움 등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 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하자 신라와 당은 이를 틈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 의 묘소가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峯山)에 있다고 하였다




연개소문에 쫓긴 이세민은 항복조건으로 산서, 하북, 산동지방등 중국의 동북지방을 고구려에 할양하기로 약조했다. 이는 과거의 배달제국과 대조선제국(고조선)의 터전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고구려군이 점령한 지역을 그대로 인정한 것일수도 있다.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은 이를 수락하고 철수했는데 어차피 연개소문은 장안을 급습해 중국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는데에 1차적인 목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빠른 기병으로 군대를 조직해 장안을 덮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당나라의 영토할양은 잘 지켜지지 않은 것 같고 이로 인해 고구려는 이후도 여러번 당나라 정벌을 감행했으니 그것은 '여련거사 보담'의 아래 시에서도 드러난다.



고구려 대장 개소문이여


순식간에 장안을 짓밟았구나


만약 올해에도 진격해오지 않는다면


내년 8월엔 군사를 일으키리라!

우리나라의 3대 '군신'으로 을지문덕, 연개소문, 이순신을 꼽는다한다. 중국사상 최고의 황제라 칭하는 당태종 이세민을 굴복시키고 중국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연개소문은 과연 '전쟁의 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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