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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공주가 백제로 시집가서 신라 안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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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6윤복현 조회수 751

 

 

 


역사 속 사랑 이야기



미인 싫어하는 남자들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서동이 선화공주를 사랑했다면 단순히 미모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아름다왔기 때문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참고로 지금은 토착 한국인의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한반도에 유입된 초기 신라 김씨족은 얼굴은 매우

이국적인 모습이였다고 생각된다. 신라공주들이

유득히 이뻤던 이유는 신라 김씨왕족이 본래

백인과 황인의 혼혈화가 많은 중앙아시아

감숙성지역에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유입된 사람들이

때문인데, 여성들의 경우 백인과 황인이 혼혈된 경우

피부가 곱고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아름다운 여인들이

많은 이유가 될 것입니다. 고구려왕들도 그랬지만

백제왕들과 귀족들은 신라공주와 결혼하고 싶어했다한다.


백제당시 열도는 백제의 좌현왕이 다스린 지역이다.

그러니까 일본서기에 기록된 소위 천황들은

백제가 다스린 시기에는 모두 백제에서 임명된

백제대왕의 명을 받아 통치하는 백제 좌현왕들이다.

일본에 백제문화가 강하게 스며든 이유이기도 하다.

단적인 예로 근초고대왕이 손자인 일본왕에게 보낸

칠지도가 고고학적 유물이다.왜왕에게 하사한 상국의

선물이 칠지도인 것이다. 당시 근초고대왕의 아들인

근구수대왕이 좌현왕을 해야 하지만,고구려와의

전쟁을 지휘하고 중국 동해안 지역 정벌전쟁에

나서야 했던 상황에서 근구수대왕의 아들이 당시

열도의 좌현왕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궁화


중앙의 왕을 중심으로 좌-우현왕을 두는 통치제도는

본래 3한국연방으로 통치하던 단군한국의 통치제도로

유라시아 역사를 바꾼 흉노제국도 단군한국에서 분가후

단군한국의 좌-우현왕 통치제도를 가지고 있었다.이들

흉노왕족이 바로 신라 김씨왕조를 열었던 김씨족이다!


백제왕족이 일본의 왕노릇을 하던 시절에 일본의

무역을 독점한 소가씨는 백제귀족의 후손으로

당시 일본왕들을 4명이나 교체할 정도로 실제

일본권력을 장악한 실세였는데, 이 소가씨 시조

인 목라근자의 아내 역시 신라여인이였다.


참고로 신라 김씨가 김씨왕조를 열었던 이유도

고구려 왕과 고구려를 방문한 김씨였던 신라왕비와의

스캔들 때문이였습니다. 군사력이 강한 고구려가 신라왕비인

김씨의 요청을 듣고 신라왕을 김씨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미인들이 왕들을 움직여 역사를 바꾸기도 했다.




신화나 설화는 설령


각색이 되었다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




"대범한 자가 미인을 얻고 역사를 만든다."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백제왕과 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서동은 우리나라 고대사에서 만나는 맹랑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서여(마)를 캐서 내다 팔아 홀어머니를 모시는 처지에, 더욱이 백제 사람으로, 신라 공주 선화가 어여쁘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꾀어 내려가는 출발부터가 맹랑하다…"




서동요(薯童謠)


선화공주님은(善化公主主隱)

남 모르게 짝 지어 놓고(他密只嫁良置古)

서동 서방을(薯童房乙)

밤 몰래 품고 간다.(夜矣卯乙抱遣去如)



백제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청년시절 마장사를 하면서 신라 진평왕의 따님인 선화공주가 이쁘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로 가서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서동요..



듣고 보니, 정말 동요를 맹랑하게 지었지요? 시집도 안 간 처녀를 이렇게 몹쓸 처자로 만들었으니 어떤 부모인들 가만히 있겠습니까. 노발대발 했겠지요. 서동의 이런 행각은 파파라치 수준이랄 수 있겠죠. 요즘 같아서는 명예훼손이니 뭐니 해서 한바탕 떠들썩했겠지만….



신라왕궁에서 선화공주는 쫓겨 났고, 서동과 살게 되지요. 금보기를 돌같이 했다는 서동이 황금문화때문에 금이 많이 필요했던 신라 진평왕에게 금을 바치자, 진평왕이 서동에게 호의를 가지고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게 되고..서동이 결국 백제왕이 되었다는 삼국유사 내용입니다. 백제왕의 자식에 금도 많은 서동요를 신라왕이 싫어할리도 없고 자신의 공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거부할 수는 없었겠지요.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고 하죠. 백제 무왕이 된 서동왕자와 신라 선화공주 사랑 이야기는 대표적인 이야기 중 하나죠. 이들의 사랑은 속으로 '저런 날도둑놈이…' 할망정, 입가에는 미소가 드리워지니까요. 사랑은 웃음 짓게 하나 봅니다.



 

그런데,신라를 맹렬히 공격하게 되는 왕 역시 백제무왕 때부터다. 신라와 백제가 앙숙이 된 이유는 고구려 남하를 막기위한 백제신라 동맹 과정에서 백제의 숙원인 한성회복전쟁과정에서 신라가 고구려와 야합하여 한강지역을 차지해 버림으로써 동맹을 배신한 신라와의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목이 잘릴 정도로 처참하게 전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무왕 시기에 장인의 나라인 신라를 맹렬히 공격하게 되고 무왕의 아들인 의자왕 시기에는 신라의 성을 무려 100여개나 빼앗을 정도로 신라는 전멸위기에 몰렸다. 만약 의자왕이 계속 밀어 부쳤다면 신라는 망국위기에 빠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의자왕은 나이가 먹어서인지 전쟁을 중지하고 피로를 푸는 시간을 보내게 되면서 아니러니하게도 무당으로 위장한 신라에서 보낸 미인계에 빠져서 충신들을 죽임으로써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하게 된다.



이 의자왕이 무왕과 선화공주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만약 의자왕이 신라에 대한 맹공을 중지한 이유가 외할아버지의 나라인 신라를 멸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드는 대목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신라가 망국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게 된 요인도 백제로 시집간 선화공주의 덕이 아닐까 싶다.



부여, 서동공원 궁남지에서 '사랑은 맹랑하게 해야 미인을 얻는다'는 깨달음(?)을 느끼고, 부디 사랑도 얻으시길 바랍니다.


배를 타고 한 바퀴 돌아도 사랑이 샘솟을 듯...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634) 궁 남쪽에 못을 파고 이십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을 상징한 것이란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이 연못은 백제 무왕 때 만든 왕궁 정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나요. 연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신선사상을 표현한 궁남지는 우리나라 정원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라더군요. 백제가 삼국 중에서도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가장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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