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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만주-요서-열도는 단군한국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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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9윤복현 조회수 620

한반도(마한)-만주(진한)-요서(불한)는

 

본래 단군한국의

 

직할 영토였다!

 

그래서 난하 이북까지

 

고구려가 회복하고자한 것

 

고구려 국시가 그래서 다물

 

다물=되찾다/입 다물어라!

 

 

 


<사료>


2년 봄에 왕이 장수를 보내어 한(漢)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侵襲(침습)케 하더니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 채동

(蔡彤)이 은의(恩誼)와 신의(信義)로써 우리에게 대하므로 다시 (한과) 화친하였다. 『삼국사기』권14「고구려본기」3 모본왕 2년



한 줄 밖에 안 되는 기록이지만,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북평, 어양, 상곡은 지금의 북경 인근지역이고, 태원은 산서성의 중심도시다. 고구려가 건국한 지100년도 안되었는데도, 저 먼 산서성까지 공략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강력한 군사를 보유했다는 것이 아닐까? 또한 이 지역과 고구려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증거일수도 있다.


은의와 신의로써 대하기 때문에 화친했다는 기록은 아마 삼국사기가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걸 감안해보면 한나라가 고구려의 공격에 놀라 애걸복걸하며 군사를 거두어달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 아마 고구려는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함으로써 한나라로부터 침공하지 말라는 의미로 막대한 보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고구려가 공략한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로 귀속되었을 것이다. 이는 태조왕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 사료>


3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城)을 쌓아 한병(漢兵)을 방비하였다.

『삼국사기』권15「고구려본기」3 태조왕 3년



이 기록은 고구려가 요서를 차지하여 그 곳에 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입에 대비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요서를 차지했다면 언제 차지했을까? 그건 앞서 모본왕 때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한 기사로 미루어보아 모본왕 때 요서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고구려는 태조왕-차대왕-신대왕으로 이어지는 내부 혼란으로 인해 요서지역을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 신대왕은 모본왕 때 구축한 요서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유주, 병주 원정을 감행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현도태수 경림을 물리치고 선비와 함께 유주와 병주에 진격한 고구려군이 이 지역을 차지했는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후한은 고구려가 유주, 병주 원정을 단행한 지 4년 후에 다시 고구려에 침입한다. 이 때의 침입이 4년 전 고구려의 침공에 대한 분풀이인지, 고구려에게 빼앗긴 유주, 병주를 되찾기 위한 것인지는 기록이 남아 알 길이 없다. 신대왕이 후한 깊숙한 곳에 위치한 유주, 병주에 원정을 나갔을 때 아마 후한의 영토 일부분을 잠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한은 만이의 반란, 농민들의 봉기, 환관 및 외척간의 다툼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잃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서는 국력을 신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후한은 절치부심 때를 기다리며 국력을 키우다가 4년 후에 고구려를 재침한 것이 아닐까?


172년 후한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삼국사기』 「명림답부 열전」에는 이 때 후한군을 이끈 장수가 현도태수 경림이라 기록하고 있다. 후한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고구려 조정은 어떻게 싸울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일부는 맞서 싸워 고구려의 저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구중앙국을 회복하여 한민족과 인류를 구하기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온 천신이 하늘권력을 세우게 되면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막을 내리고 고구려의 공식국호인


고려세계연방이 국호가 되고 국기와 애국가 가사도 바뀐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할 때


가장 당당하고 자주주권적이고 개방적이고


세계적인 중심국가로 우뚝 섰다. 당시 세계최강


수.당의 침략을 물리칠 정도로 가장 강하고


부유했던 고려(고구려)를 건국한 고추모나


국제무역국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을 보더라도!




높은 수준을 갖춘 문명대국 고구려



한민족 정통사서[환단고기/고구려국본기]"우리 문명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나무를 베거나 말에 먹이를 주는 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서적을 좋아하였을 뿐 아니라, 사통팔달한 거리에 각각 커다란 구조물을 설치하여 이를 경당이라 하고, 자제가 혼인하기 전 주야로 여기서 독서하면서 활쏘기를 즐겼다. 책은 『오경』과 『사기』, 『한서』, 범엽의 『후한서』, 『삼국지』, 손성의 『진춘추』, 『옥편』, 『자통』, 『자림』이 있었고 또 『문선』이 있어 이를 소중히 여겼다." 『구당서』 「고구려전」



위 기록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인들은 일반 평민들까지 서적을 좋아할만큼 대단히 학구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구려의 교육수준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높았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당 태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낼 때 사신으로 뽑힌 주자사에게 고구려의 학문수준이 매우 높고, 학문을 중히 여겨 고구려의 학문수준이 당과 동등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문화강국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또한 5호 16국시대 혼란을 피해 많은 중국인들이 고구려로 넘어왔다가 이후 남북조시대 들어서 중국이 안정되자 많은 귀화 중국인들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이들이 중국으로 건너가자마자 이들은 높은 벼슬을 받았다. 이는 고구려라는 입김과 함께 이들이 고구려에서 학문을 제대로 배워, 높아진 그들의 학문수준을 유감없이 발휘했음을 보여준다. 즉 당시 고구려의 학문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배움에 대한 높은 학구열... 이것은 고구려가 강력한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무한히 날고 싶다! 무한히 주고 싶다! 모두 품고 싶다!



무지에 갇히고 가두려는 옹졸한 자들은 거부하는




나의 기질은 자유혼 고구려다!





한류세계화는 한민족의 지구촌 경영에너지



송봉주 작사/작곡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 주기를


    나에게 넌 내 외롭던 지난 시간을
    환하게 비춰 주던 햇살이 되고
    조그맣던 너의 하얀 손 위에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의 약속이 되어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날을 기억하며
    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주기를


    나에게 넌 초록의 슬픈 노래로
    내작은 가슴속에 이렇게 남아
    반짝이던 너의 예쁜 눈망울에

    수많은 별이 되어

    원토록 빛나고 싶어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우 후회 없이 그림처럼 남아 주기를


    너에게 난 해질녘 노을처럼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되고
    소중했던 우리 푸르던 날을 기억하며
    우 후회없이 그림처럼 남아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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