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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에는 천하무적! 사랑은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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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1윤복현 조회수 905




싸움에는 천하무적! 사랑은 뜨겁게!



바로 내가 자유대한민국 코리아 사나이다~!



나는 6.25남침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신의 한수인 인천상륙작전 후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한 3사단 백골부대 출신으로



반공 자유 대한민국 수호의 첨병이자,



신인 허경영님의 수호자임을 자임하노라!



중국의 100만 대군의 침략을 격파한


유라시아 강군 코리아 기마군 상상도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그러나,


백성을 죽이는 명령은 절대 거부하고


백성을 죽이라고 명령한 넘을 쏴라!

아직도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종북세력이다


공개된 비밀문서들을 통하여


소련 스탈린의 승인과


중국의 군사지원을 받은 후에


위장평화공세를 펴면서


대한민국을 기습남침하였고,


김일성 3부자를 우상숭배케하여


백성을 노예화하고 굶주리게 만든


김일성 일당을 2천만 인민과 합세하여


백골을 만들어 버리겠다


대한민국공동체를 최우선하지 않고


자신의 지역과 자신의 집단의 탐욕을


앞세운 분열세력도 백골 만들어 버리겠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구해야 할


2천만 북한 인민들은 우리 동족이지만


소련과 중국의 힘을 빌어 대한민국을


기습남침하고 도발과 테러을


감행하였고 1960년대에도


중국 모택동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하며


남침도발을 획책했던 김일성일당은


우리 한민족이 절대 아니다





그 넘들은

 

자신들을 한민족-단군민족이 아니라


김일성 민족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진정한 군인정신 박정인 장군


- 육군 3사단(白骨부대) 사단장재직시의 박정인 장군

이 분은 육군3사단 사단장으로 재직시,

1973년 DNZ에서 작업 중인 아군에게

북괴군이 총격을 가해 아군에게 부상을 입히자

즉각 포대에 사격명령을 내려 북괴군 진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신 분이다.

북괴군과 김일성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셨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당시 작전권이 없는 상태에서의

박장군의 작전은 그대로 전설이 되어 버렸다.

사단장 이임식 때 부하들이 직접 5성 장군 계급장을 선물하였다.

박장군은 이 사건의 모든 책임을지고 전역을 하게 된다.

부하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박정인 장군의 계급장은,

분명 *5성 장군이며 정치권력에 찌들인 썩은 별 보다는 훨씬 나은게 아닐까......

(참고로 한국군 계급 체계는 이 당시나 지금이나 5성 장군은 없다.)

진정 예비역 육군원수 박정인 장군인 것이다.

이런 영웅호걸이 이순신 장군 이후 과연 몇 명이 있는가.....

- 6.25 한국 전쟁당시 중대장 시절의 박정인 장군

- 육군 3 사단 마크 (실제 3사단마크에는 가운데 白骨표식은 없습니다

국민들은 진정 이런 軍人을 원하는겁니다

젊으신 분들은 모르겠지만 40여년 전에

大韓民國 에 박정인 장군과 같은

훌륭한 軍人이 있었다는 걸 알았으면합니다.

TIP ;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신 네티즌 분들께서는

인터넷이나,그 밖의 서적을 참고해서 박정인 장군을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내용을 아시면 갑갑했던 가슴이 확 뜷리고

정말 大韓民國에 이런 軍지휘관이 있었던가...하실 겁니다.


DMZ 559 GP 포격작전
DMZ 포격사건

사단장으로 한참 지휘력이 발휘되는 1973년 2월 27일,
춘계 DMZ 표지판 보수작업 실시계획을 인민군측에 통보하였다.
이어서 28일에는 유엔군사령부에서 작업 승인지시가 내려 왔고
군단은 3월 7일과 8일 양일간을 작업일로 지정해 주었다.
그런데 인민군측은 도전적인 행위로 중앙분계선 바로 북쪽에
559 GP(감시초소)를 불법 설치하고 20여 회에 걸쳐 육성비난을 하면서
우리의 비위를 건드려 보려고 하였다.
다시 도전책의 하나로 인민군 559 GP 바로 남쪽에 있는
우리측 표지판 0654번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는 휴전협정 위반을 자행하였다.

나는 적의 심리전 시도를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어떤 함정을 만들고 있다고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공세적인 나는 그것들이 적의 함정임을 알면서도
우리 지역에 마음대로 드나 들며 우리의 표지판을 제거하는 따위를 내심 용서할 수 없었다.
특히 당시는 남북협상이 시작되어 상호 비방을 안 하도록 해서
쌍방 모두 방송을 중단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정보참모에게 우리측 표지판 보수작업을 명령하면서
문제의 표지판인 0654번은 남북협상중에 문제가 발생되면 안되니
일단 작업을 보류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당시 군단장이 3월 5일 사단을 방문하여
내가 신중론, 즉 적의 함정임을 설명하였으나
그는 0654번 표지판을 포함한 작업 강행을 지시하였다.
또한 군단 정보참모가 사단 정보참모에게 작업강행을 지시했다.
이리하여 3월 7일의 표지판 보수작업이 실시되었다.
그런데 이날 작업을 완료하고 귀대 도중
인민군은 아군 지역의 우리에게 기습사격을 가하여
황대위와 김하사 등 2명을 중상케 하는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다.

나는 보고를 받자 예상대로 적의 함정에 빠졌음을 인식하고
인민군에 대한 응징책을 준비시키는 한편 마이크로 적측에 사격 중지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사격으로부터 발생하는 사태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민군 측에 있다고 수차 경고하였다.
그러나 인민군은 나의 경고를 무시하였다.

나는 인민군에게 합법적인 응징을 하리라 마음먹고
관측기를 상공에 띄워 포병 관측장교로 하여금 표적인 559 GP를 관측케 하여
사단 포병에게 사격을 명령하였다.
155밀리 곡사포, 105밀리 곡사포는 즉각 불을 뿜어
인민군 559 GP를 강타하는 한편 우리에게 불법사격을 가하였던
적 보병 배치선에 포탄을 작렬시켰다.
그런 다음에 부상당한 황대위와 김하사를 안전지대로 구출하기 위해서
백린 연막탄을 발사하고 철수작전을 전개시켰다.
그런데 그 연막탄으로 말미암아 전지역에 불이 붙어
지뢰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하면서

적 보병이 도망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사격후 5분 만인 14시 20분, 한신 대장 후임
군사령관 최세인 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지휘관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그 현장에서 진두지휘해야 한다’는 평소 신념에 따라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나 대신 새로 부임한 참모장이 전화를 받았다.
군사령관의 전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상자에 구애받지 말고 과감하게 작전하라.」

군 사령관 전화통화 10분 후인 14시 30분,
군단에서는 군단장 지시라며 군단 참모장이 사단 참모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환자 구출을 위하여 무리하게 사격하지 마라.」

이 두 경우, 군단장의 지시는
부상자 황대위와 김하사를 버려도 좋다는 것이 아닌가?.
아니 우리 지역에서 적이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우리에게 사격하여 생긴 불상사인데
부상 장병을 구출하지 않아도 된다는 뉘앙스 풍기는 지시를 내리다니 될 말인가?.
나는 따를 수 없었다. 나는 정당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끝내 부상 장병을 구출, 후송하게 함으로써 포격작전을 끝냈다.

이날 밤 나는 김일성과 인민군을 골탕먹이기 위하여
사단내 전 트럭을 동원하여 라이트를 켠 채
DMZ 남한한계선까지 진출시켰고 부분적으로 중앙분계선 남단까지 진출케 하였다.
이 바람에 북한측에서는 난리가 났다.
김일성은 즉각 전군비상 및 동원령을 내렸고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다.

후에 이 사건을 계기로 유엔군 사령관은 전쟁방지를 위하여
해명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번 사건은 북한측의 휴전협정 위반으로 일어난 것이고
유엔군은 부상병 구출을 위한 자위적인 작전을 전개한 것 뿐이다.
전투할 의사는 분명히 없다.」


백골부대를 떠나면서

1973년 4월 3일, 마침내 나의 사단장직을 해임한다는 통보가 내려왔다.
나는 담담한 심정으로 상부의 명령을 대기하였다.
나는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상부의 어떤 결정에도 따른다’는 신조였기에
마음은 홀가분하였다.

그런데 군단장은 사단장 이취임식 석상에서
장병들에게 내가 육군 본부로 영전하여 간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 뜻이 무엇이었을까?

4월 6일 사단장 이임식에서,

「북진통일의 성업을 완수 못하고 국민의 군인으로서

국민에게 죄를 짓고 사단장직을 떠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백골 부대 사단 장병은 나의 의도를 받들어
북진통일의 선봉사단 임무를 기필코 완수할 것을 당부하며
백골 사단의 건승과 장병의 무운장구를 기원한다.」
라고 간단히 이임사를 하고 단상에서 내려오니 장병과

그의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내 마음 역시 눈물이 흘렀으나 꾹 참고 태연한 걸음으로 찝차에 올랐다.
군악대의 ‘이별의 곡’이 울리는 가운데 천천히 서울쪽을 향하여 움직였다.
나의 전속부관 이계복 대위는 찝차 뒷자리에서 울먹이면서,
「사단장님은 진정으로 팻튼 장군을 닮은, 조국을 사랑하는 장군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나를 위로하였다.
집에 도착하니 수행부관은
‘장군님의 별은 하나지만 맥아더 장군의 5성처럼 빛나는 왕별입니다’라고 말하며
어디서 구했는지 5성의 별판을 나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후일의 일이지만, 1985년 9월 20일
이산가족 평양 방문단의 일원으로
함경남도 도민회 이상순 회장이 평양에 갔을 때
정치보위부 고위간부가 찾아와,
「함경남도 신흥군 출신의 박가 성을 가진 요란한 사단장 요즘 뭘 하오?」
라고 질문하여 이 회장은 섬뜩한 생각이 들어 상세히 설명 안하고 태연하게,
「나는 사업가니까 군 관계는 전혀 모르오.」
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그 공산당 간부의 표정으로 보아 3·7포격사건으로
박정인 장군에 대해 상당히 원한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포격사건이 적측에 안겨준 충격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가히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예비역 준장 박정인 회고록 '풍운의 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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