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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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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지역의 총독은 한국단제의 임명을 받은 부단제인 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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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윤복현 조회수 674


단제한국의 서토는 단제의

임명을 받은 부단제 번한이

다스린 불한국으로 이 불한국이

훗날 기자의 후손이 다스린

기자조선이고 위만이 빼앗은

위만조선의 땅인 것이다!

단제왕검부터 번한을 통하여

중국지역을 관리감독하였음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한민족 정통사서[환단고기]<태백일사>




번 한 세 가 (상)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희대를 평정하셨다. 산을 뚫고 길을 내시니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더라. 단군왕검은 제요도당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형제가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공경스럽게 효도를 앞세우게 되었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게 미치니 단군황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초청하여 도산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인 우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우를 낭야성에 두어서 이로써 구여분정의 뜻을 정하였다. 바로 <서경>에서 말하는 바의 '동순하여 망제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를 찾아뵙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단제한국)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에 한번씩 이르른다. 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에 조근하기를 네번씩이었다.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고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이라 하고 부를 험독에 세우게 되었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치두남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에 요중에 열두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영지,탕지,용도,거용,한성,개평,대방,백제,장령,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치두남이 죽으니, 아들 낭사가 즉위하다. 이해 경인 3월 가한성을 개축함으로써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사성이라 하니 번한의 낭사에 세워진 때문이다.

갑술년에 태자 부루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동안 낭사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순도 역시 사악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희와대 지방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에게 가로대,

 
" 나는 북극 수정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 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거종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 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은 삼륙구배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 천제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하리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을 받으니 대저 오행은 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9려를 도산에 모으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공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이 그것이다.

낭사가 죽으니 계묘년에 아들 물길이 즉위하였다. 물길이 죽으니 갑오년에 아들 애친이 죽위하였다. 애친이 죽으니 아들 도무가 즉위하였고 도무가 죽으니 계해년에 아들 호갑이 즉위하였다. 정축년에 천왕께서 순시하사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번한이 사람을 보내 문상하고 병사를 보내 경예하도록 했다. 호갑이 죽으니 단군 달문의 기축년에 아들 오라가 즉위했다. 갑신년에 하나라왕 소강이 사신을 보내 새해 인사를 올렸다.

오라가 죽으니 병술년에 아들 이조가 즉위했다. 이조가 죽으니 단군 아술의 병인년에 동생 거세가 즉위했다. 거세가 죽고 신사년에 아들 자오사가 즉위했다. 자오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들 산신이 즉위했고, 산신이 죽으니 무자년에 아들 계전이 즉위했다. 경인년, 명을 받아 삼신의 당 단을 탕지산에 세우고 관리들의 집을 옮기게 하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이다. 계전이 죽었다. 정사년 아들 백전이 즉위했고, 박전이 죽은 뒤 을미년에 중제 중전이 즉위했고, 그가 죽자 신묘년에 아들 소전이 즉위했다. 갑오년에 장군 치운을 파견하여 탕을 도와 걸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에 묵태를 파견하여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했다. 소전이 죽고 갑자년에 아들 사엄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동생 서한이 즉위했다. 서한이 죽으니 정축년에 아들 물가가 즉위했고 그가 죽은 뒤 신사년에 아들 막진이 즉위했다. 막진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진단이 즉위했다. 이해 은나라 왕 태무가 찾아와 서 특산물을 바쳤다. 그가 죽으니 계유년에 아들 감정이 즉위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소밀이 즉위하였다. 계사년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이 이에 사죄하였다.

소밀이 죽자 아들 사두막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죽으니 계부 갑비가 즉위했다. 갑비가 죽고 경신년에 아들 오립루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아들 서시가 즉위했다. 그도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안시가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아들 해모라가 즉위했다. 해모라가 죽고 단군 소태 5년 우사가 조정(단제한국의 중앙국-진한)으로부터 번한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22대 색불루 단제의 할아버지)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에 뛰어났기 때문에 제(단제)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라 때에 은나라왕 무정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매 고등이 이를 듣고 상장 서우여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에 이르매 병사를 보내 불지르고 약탈한뒤 돌아왔다. 서우여는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번한세가 (하)

단제 색불루는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역하였다. 은나라왕 무정은 사시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을 삼았더니 서우여는 몰래 좌원에 돌아와 사냥군 무리 수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단제께서는 몸소 삼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이에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서우여가 이에 따르므로 단제께서는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4년 기해에 진조선은 천왕(22대 색불루 단제)의 칙서를 전하였는데 가로대 "그대들 삼한은 천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다. 이때부터 백성들에게 예의,누에치기,베짜기,활쏘기,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금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하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는 그 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며,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하고,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키며,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장遁 태형으로 다스리고, 사기치는 자는 훈계방면하나 스스로 속죄하려 하면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면하여 주지만 백성들이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서 결혼도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문을 닫거나 잠그는 일도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올리니 어릴고 경망하는 풍속이 가득했다.

병신년에 서우여가 죽고 정유년에 아락이 죽위하더니, 그도 죽었다. 정축년에 솔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갑자년에 임나가 즉위하였다. 신미년에 천왕의 조서로써 천단을 동교에 설치하고 삼신께 제사지내다. 무리들이 둥그레 모여 북치며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았다.

진정으로 천단을 쌓고 삼신을 축수하세

황운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인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임나가 죽으니 병신년에 동생 노단이 즉위하였다. 북박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노일소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그가 죽으니 기유년에 아들 마밀이 즉위했다. 마밀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모불이 즉위했다. 을해년에 감성을 두다.

모불이 죽으니 정해년에 아들 을나가 즉위하였다. 갑오년에 주나라 왕 하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을나가 죽으니 정묘년에 마휴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에 동생 등나가 즉위했다. 이극희가 말씀올려서 소련,대련의 묘를 세워 삼년상의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이에 따르다. 등나가 죽으니 무술년에 아들 해수가 즉위하였다. 임인년에 아들 물한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에 제사지내게 하였으니 묘는 상춘의 주가성에 있다.



해수가 죽으니 기묘년에 아들 오문루가 즉위하였고, 그도 또 죽었다. 정묘년 아들 누사가 즉위하더니 무인년에 천자를 찾아 뵙고는, 태자 등올과 작은 아들인 등리가 별궁에서 한적하게 기거하고 있음에, 태자 형제들에게 노래를 바쳤다.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을 공경할지니라.

항상 터럭 같은 일로서

골육의 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요.

말도 오히려 같은 여물통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줄을 만드나니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세언일랑 삼가 듣지 마소서

누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들 이벌이 즉위하였다. 병신년에 한수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 기미년에 상장 고력을 파견, 회군과 합쳐 함께 주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벌이 죽으니 을축년에 아들 마휴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은 뒤 병진년에 아들 다두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춘년에 아들 나이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미년에 아들 차음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불리가 즉위했고, 그도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여을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갑술년에 엄루가 즉위했다. 무인년,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죽으니 아들 감위가 즉위했고, 그가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술리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무오년에 아들 아갑이 즉위하였다. 경오년에 천왕은 사신 고유를 파견하시어 먼저 한웅,치우,단군왕검의 삼조의 상을 나누어 주시더니 이를 관가에 모시게 하였다.

아갑이 죽고 계유년에 고태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아들 소태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마건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고 병진년에 천한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병진년에 아들 노물이 즉위하였고, 그도 죽으니 신사년에 아들 도을 이 즉위했다. 계미년에 노나라 사람 공구는 주나라에 가서 노자 이이에게 예를 물었다. 이의 아비의 성은 한이요, 이름은 건이니 그의 선조는 풍의 사람이라, 뒤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부터 이리저리 돌아 아유타에 이르러 그 백성을 개화시겼다. 도을이 죽고 병신년에 아들 술휴가 즉위했다. 그가 죽자 경오년에 아들 사양이 즉위하였고, 지한이 죽고 계묘년에 아들 인한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신사년에 아들 서울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병오년에 아들 가색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경진년에 아들 해인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이라 했는데 이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다. 신사년에 아들 수한이 즉위했다.



임오년에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 와서 안촌골을 공격했다. 또 험독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의 사람 기후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음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번 2한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의 남쪽에서도 싸우려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년에 수한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매 이에 기후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아였다. 이 해 연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니 기후도 역시 명을 받아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처음에는 번한성에 머무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이 즉위했다. 기욱이 죽고 신미년에 아들 기석이 즉위했다. 이 해에 각 주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기묘년 번한이 교회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을유년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기석이 죽고 경술년에 아들 기윤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bc 172)에 아들 기비가 즉위하였다. 처음 기비는 종실의 해모수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려 했으니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생각컨대 기비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이 즉위했는데 정미년(bc 146)에 떠돌이 도적인 위만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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