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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국자는 온조가 아니라 부여왕 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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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0윤복현 조회수 842



백제 건국자는 부여왕 구태




〈삼국사기〉에는 백제 시조가 온조라고 전한다. 그러나 중국 기록인 〈주서 周書〉 백제전에는 "백제는 그 조상이 대체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란 이가 있어 대방고지에서 나라를 시작했다"고 하며, 또 "매년 4번 시조 구태의 묘에 제사지낸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수서 隋書〉에는 이를 좀 자세히 부연하고 있다.  구태는 백제 제8대 고이왕(234~285 재위)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태는 '구이'라고도 읽히는데 '구'와 '고'가 같은 음이고, '태'의 원음은 '이'로서 이와 같은 음이라는 것이다. 한편 부여계통의 인명이나 관명에 나오는 '태'는 '치'·'디'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고이왕


3세기 초에 요동에 있던 부여왕족 구태가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대방 옛 땅으로 와 건국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그렇다면 이 구태시조설과 해씨는 어떻게 연관되어있을까? 내 생각은 이렇다. 부여씨는 구태계 왕의 姓이고 해씨는 온조계(또는 비류계) 왕의 姓이다. 해씨가 원래 백제의 國姓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여씨가 백제 왕가의 姓으로 되어있는 반면 해씨가 大族 八姓의 하나로 되어있다는 것은 구태의 무리가 백제를 병합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백제의 王系는 개루왕-초고왕-구수왕-고이왕-책계왕-분서왕-비류왕의 순으로 되어있다. 나는 구태계의 王系가 구수왕(214~234)에서 시작하여 구수왕(구태)-비류왕(구수왕의 아들)-근초고왕(비류왕의 아들)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삼국사기는 구수왕을 초고왕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구수왕은 대방 출신의 왕이므로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백제의 世系를 一系로 만들기 위하여 조작해낸 기사라고 본다.


그렇지만 삼국사기 초고왕 40년 조에는 태백성이 달을 침범하였다고 하는 기사가 있어 초고왕 대에 뭔가 이변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구수왕 다음에는 고이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있다. 삼국사기는 이 고이왕을 개루왕의 둘째아들, 또는 초고왕의 외삼촌(母弟)이라고 했지만 고이왕은 재위 52년이라고 했으므로 연령상 그렇게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그를 비류왕의 외삼촌이라고 생각하며, 구수왕의 아들 사반과 비류가 나이가 어려 그가 대신 즉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이왕은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백제가 고대국가로 발전할 기초를 놓은 왕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구태계의 백제가 고이왕 대에 체제가 갖춰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백제의 王統이 구수왕 대에 구태계로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만 고이왕 이후 책계왕과 분서왕이 연이어 非命에 죽었다는 것은 이 왕통교체가 순조롭지만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며, 결국 근초고왕 이후에야 구태계의 왕권이 확립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백제의 王 중에는 비류-비류왕, 초고왕-근초고왕, 구수왕-근구수왕, 개루왕-근개루왕 등 同名異人의 왕이 네 사람이나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해왔는데 이것은 백제王統을 一系로 조작하기 위하여 구태계의 왕들에게 온조계의 왕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근구수왕의 경우는 좀 다르지만). 구태계는 근초고왕 이후 王統을 확립하였지만 온조계와의 화합이 왕권의 안정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이 구태계의 왕들은 자신의 이름을 아예 온조계 왕의 이름을 붙여 구태계가 온조계와 一系의 王統임을 강조했던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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