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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한 오스만 터키제국 창시자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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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8윤복현 조회수 1591








서방에서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왕가의 “카이(Kayì해.고=하+이=카+이)”씨는 바로 고구려 왕족 “해씨/고씨”이다. 곧 오구즈 칸과 코르쿠트 아타의 이야기는 멀리 서방에서 세워진 제국의 “오스만 칸”의 먼 선조로 그들은 바로 극동의 나라에서 서쪽으로 옮겨간 “고구려 왕족”이라는 놀라운 이야기이다.





터키가





















역사교과서에 고구려를 형제국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이러한 역사와 혈통적 배경때문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터키’ 하면 형제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불리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터키가 6·25 때 미국, 영국에 이어 1만 4936명이라는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721명 전사에 2,147명이 부상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또 전사했을까요? 라는 질문을 하면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건 궁극적인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지요.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릅니다. 세계가 대한민국을 ‘코리아(고구려 또는 고려)’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터키의 중학교 2학년 사회 교과서에도 "코리아와 우리 민족은 먼 옛날 중앙아시아에서 형제로 함께 살았다."라고 나옵니다. 물론, 터키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교육받은 고학력의 터키인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코리아’의 어원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영문표기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흐르는 대단한 형제 사랑이라 할 수 있지요. 


유전학이나 인류학적으로도 터키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몇 개 안되는 북방계 몽골리안 국가 중 하나이지요. 북방계 몽골리안 국가는 몽골, 한국, 일본, 에스키모 인디언, 북미 인디언, 헝가리입니다. 이중 헝가리는 터키와 함께 북방계 몽골리안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는 유럽국가이지요.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 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 후 터키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지닌, 자기 나라로부터 수천만 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의리와 애정을 받는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요?



역사를 배웠다면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突厥)’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을 겁니다. 220년에 수립된 ‘테오만 야브구’ (Teoman Yabgu = 흉노 = 匈奴) 왕국은 몽골과 함께 중국에서 흉노(匈奴)라 불리던 민족의 하나로, 6세기 중엽부터 8세기 중엽까지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활약했지요.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우리 한민족과 같은 우랄 알타이족으로 고구려 전성기엔 글안, 여진(숙신)과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돌궐인이 고구려의 기층(基層)민중에 속했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고구려가 멸망한 후(668년), 돌궐은 고구려의 유민(遺民)을 많이 받아들이면서 우리 민족과 특별히 긴밀해졌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대부분의 서민은 초기엔 당(唐), 후엔 신라의 지배를 받으면 한반도에서 살아갔습니다. 또 귀족계급 등 중상류층 가운데 일부는 당에 포로로 잡혀갔지요.

나머지 고구려 유민은 몽골, 글안, 돌궐 등 타민족에 섞여 살다가, 682년에 동돌궐이 올란바토르(현 몽고의 수도)에 「돌궐 제2 제국」을 수립할 때, 바로 여기에 참여합니다. 참여한 유민의 숫자가 전체 「돌궐 제2 제국」 인구의 절반인 20만 명이 넘었다니 돌궐 제2 제국은 고구려의 후예라 하여도 될 판이지요.

돌궐이 고구려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라는 역사적 사실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우선, 돌궐의 왕은 선우(單于) 또는 가한(可汗) 이라고 불리며 그 아래에 좌현왕(左賢王)과 우현왕(右賢王)이 있었습니다. 「돌궐 제2 제국」의 선우는 인구의 절반이 넘는 고구려 유민을 우대하여, 고구려 왕족의 일원이며 유민의 수장인 막리지 고문간(高文簡)이라는 사람을 고려왕(高麗王)으로 봉했답니다 (참고: 구당서 권 144 돌궐전, 상). 

즉, 좌현왕과 우현왕, 둘밖에 없는 것이 돌궐의 전통이었는데, 고구려 유민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 고구려 유민들을 통치하기 쉽도록 왕을 한 명 더 늘려 고구려 유민을 앉히고 ‘고려왕’이라 칭했다는 겁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돌궐은 특히 고구려 유민 가운데 여성을 뽑아 종교의 수장(首長)인 제사장에 임명합니다. 고조선 시대부터 제사장을 ‘단군’이라 호칭한 전통을 인정하여 돌궐말로 ‘탕구르’ 또는 ‘탱글리’라고 했다고 하니 이들은 우리와 건국기원을 같이한 셈이지요.

터키 민족은 중세기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아랍 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조상 전래의 ‘탕구르’ 신을 숭배하고 자연을 숭배하는 사상과 풍습은 아직도 지속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풍습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면이 적지 않습니다.


돌궐은 7세기에 ‘톤유크’라는 사람이 중앙아시아 ‘소그드’ 언어 계통의 문자를 만들어 역사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구려와 돌궐의 자세한 관련 내용이 고대 터키어로 기록된 돌궐 비문(碑文)들이 몽골 오르혼 강(江), 남시베리아 예니세이 강(江) 상류와 서북 몽골지방에 세워져 있답니다. 

특히 오르혼 강(江) 비문은 1893년 덴마크의 언어학자 톰센(Vilhelm Thomsen)이 현대 터키 어로 해독을 함으로써 터키의 기원과 고구려와 관계에 대해 수많은 논쟁을 종식했답니다. 그 이유로 터키의 역사책 가운데 고대사 부분을 보면 고구려와 흉노 그리고 돌궐족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고요. 

자신들의 조상이 고구려, 흉노, 돌궐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만약 그 비문(碑文)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제대로 해석되지 않았다면 많은 터키인은 자신들의 조상이 현재의 터키에서 수천 리 떨어진 몽골고원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을 겁니다. 
















 

고구려 상무정신으로 광대한 제국을 건설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흥망

수나라와 당나라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한 돌궐은 8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의 용병으로 남하(南下)하여 서방으로 이동합니다. 사라센은 이슬람교 창시자 모하메드의 후계자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에 걸쳐 이룩한 대제국이었지요. 용병에 불과했던 돌궐은 11세기 무렵, 사라센제국을 멸망시키고 셀주크튀르크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이는 서진한 터키족이 고구려기마정신이 흐르는 고구려유민의 나라였기에 가능한 일이였습니다.

하지만 셀주크튀르크 제국은 칭기스칸의 몽골에 패하여 몽골의 지배를 받습니다. 몽골의 지배를 받던 투르크는 13세기 말, 다시 ‘오스만 투르크(1299~1922)’ 제국을 세워 20세기 초반까지 무려 7세기를 이어옵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1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국민혁명으로 멸망하지요. 

동서양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갖고 있던 터키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편을 들다가 독일이 패망하는 바람에 많은 영토를 잃고 오늘날의 소국으로 전락했지요. 아랍과 발칸반도를 지배하며 강성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9세기 중반부터 쇠퇴하면서 주변의 소수민족들이 모두 독립하는 바람에 영토를 잃고 지금의 터키만 남게 된 겁니다.




오스만 제국의 창시자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


고구려-발해 왕의 19대손 칭기스칸과 오구즈칸 족보상에 있는 오스만
 
전원철 법학박사 북방유목민족사 연구가 기사입력 2016/05/01 [12:49]

7. 서방으로 간 고구려 종족에서 나온 투르크 종족의 오스만 칸 가문

방금 머나먼 극동에서 지구의 반대쪽으로 고대인들이 오고 간 역사의 예 몇 가지를 보았다. 그런데 나는 이제 오늘 특히 터키-조선민족 관계에서 매우 충격적인, 그러면서도 중요한 종족 이동의 결과를 하나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터키가 자랑하는 오스만제국을 세운 황제 “술탄 오스만”은 어쩌면 “고구려 왕족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 대제국 오스만 투르크를 세운 술탄 오스만은 고구려 왕족의 후예     © 편집부
   
  그 이야기에 앞서 잠시 <사국사>라는 중요한 사서를 지은 울룩 벡을 보자. 그는 아미르 티무르가 지은 “티무르제국”의 5대 칸이자 그의 여러 손자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할아버지 아미르 티무르는 오늘날의 인도북부와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터키, 남러시아 킵차크초원,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을 잇는 광대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때문에 소비에트시대의 스탈린조차 아미르 티무르를 극도로 숭배했다고 한다. 티무르는 몽골 4칸국의 하나로 오늘날 터키에 가까운 이란과 우즈베키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주로 활동한 사람인데, 차가다이 칸국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제2의 칭기스 칸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따지고 보면 속말말갈 가문의 팅기스 칸, 곧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의 19대 선조 대야발과 대조영 가문에서 태어나서 칭기스 칸의 3대 직계 선조가 된 투미나이 칸의 두 아들 카불 칸과 카촐리 바하두르 가운데 아우인 카촐리 바하두르의 8대손으로 태어 난 이이다. 그의 8대 선조대의 종조부에 해당하는 카불 칸의 손자인 칭기스 칸의 관점에서 보면 아미르 티무르는 종5대손이다. 그러므로 그의 뿌리는 물론, 고구려-발해인이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야지드와 싸워 그를 포로로 잡고, 한 때 오늘날의 터키를 정복한 적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바로 그 아미르 티무르의 가문에서 태어나 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활동한 한 손자 울룩 벡은 자신이 쓴 <사국사>에서 당시 터키의 위대한 제국 가운데 하나였던 오스만 제국의 창시자 “술탄 오스만(*오스만 칸)”의 선조가 바로 “오구즈 칸”의 후손이었다는 계보를 전하고 있다. 터키가 자랑하는 오스만제국의 창시자 “술탄 오스만”이 앞서 본 오구즈 칸, 코르쿠트 아타와 함께 오래전에 서방으로 옮겨간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라는 이야기이다. 

▲ 부르사에 있는 술탄 오스만(오스만 1세)의 무덤                                                                           © 편집부

  앞서도 인용했지만,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는 “코르쿠트 아타가 말하기를: ‘마지막 시대에 칸국은 다시 카이(Kayì)에게 주어질 것이다. 최후의 시대가 와서 부활이 일어날 때까지 누구도 손에서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 것은 오스만 가문이다.’” 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울룩 벡이 기록한 <사국사> 속의 그 오스만 칸의 계보는 바로 이 코르쿠트 아타의 예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사마르칸드의 울룩 벡은 오스만제국[코르쿠트 아타가 말한 그 “마지막 칸국”]의 창시자인 “술탄 오스만”이 고구려 왕족 “카이 씨”, 곧 “부여씨”임을 기록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쉽게 받아 들일 수 없는 이 결론은 그러나 우리가 좀 더 앞에서 살펴본 이야기들을 보면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투르크 종족의 선조라는 오구즈 칸은

1) 여러 사서에서 고구려-발해 왕의 제19대손 칭기스 칸의 족보 계보 상에 있다.
2) 따라서 오구즈 칸 자신의 이름의 고대소리와 같이 그는 “고구려 칸”이다.
3) 그런데 그의 신민인 “오구즈(고구려) 종족” 지도자의 하나인 코르쿠트 아타는 “바야트(부여) 씨”와 같은 “카이(해) 씨”인데,
4) 그의 이름은 ‘코르(고려)-쿠(가) 트(씨)’ 또는 ‘고려-굿’이다.

5) 그런데 오구즈 칸은 룸과 이란, 투르크멘 등지로 원정을 다녔다고 한다. 많은 병사와 백성들도 그를 따라 간 것으로 보인다.
6) 그렇다면 코르쿠트 아타 역시 그 때 서방으로 간 오구즈(고구려) 칸의 오구즈(고구려) 종족의 왕족, 수령이다.
7) 그런데 오스만 왕가의 “카이(Kayi)” 씨는 오구즈 칸(고구려 칸)의 큰 아들 “카이”의 후손이다. 
8) 또 오스만 왕가는 오구즈(고구려) 종족의 바야트(부여)-카이(해) 씨의 수령인 코르쿠트 아타와 같은 “카이(해)” 씨족이므로 그의 가계는 또 “바야트(부여)”씨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술탄 오스만의 “카이(Kayi)” 씨도 고구려 “해”씨와 같은 성씨이다.

9) 그러므로 그와 같은 씨족사람인 “바야트(부여씨)-카이씨 코르쿠트 아타”는 자신과 같은 씨족 출신인 “카이 씨” 오스만 왕가를 다음 세대의 투르크 종족의 나라를 차지할 합법적인 왕가로 예언한다.
10) 그렇다면 그 오스만 왕가의 계보가 “바야트(부여)-카이(해) 씨 코르쿠트 아타”를 통해 오구즈 칸과 고구려 왕가의 계보와 연결된다.
11) 그런데, 실로 오구즈(고구려) 칸은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의 웃대 선조 계보에 들어있음이 문헌사적으로 확인이 된다.
12) 또 <사국사>는 “술탄 오스만”의 계보가 “오구즈(고구려) 칸의 후손 계보”라고 전한다. 

  결국 사서와 전승에 따르면 이처럼 12가지 이상의 요소가 “오구즈 칸”, “바야트 씨-카이 씨의 코르쿠트 아타”, “칭기스 칸”, “오스만 칸”을 서로 이어주고 있다. 따라서 이 요소들을 기반으로 추론해 볼 때, 오스만 왕가의 “카이(Kayì)”씨는 바로 고구려 왕족 “해씨/고씨”이다. 곧 오구즈 칸과 코르쿠트 아타의 이야기는 멀리 서방에서 세워진 제국의 “오스만 칸”의 먼 선조로 그들은 바로 극동의 나라에서 서쪽으로 옮겨간 “고구려 왕족”이라는 놀라운 이야기이다.

▲ 동방에서 서쪽으로 간 훈족 아틸라제국의 강역.     © 편집부

  되돌아 보건데, 4세기 초 흉노 시대에 극동의 고향 땅에서 훈족의 수령 아틸라의 무리가 멀리 극서의 로마제국으로까지 이동해 민족대이동을 일으켰다. 만일 이 일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그보다 훨씬 후대에 벌어진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는 이러한 일도 당연히 절대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바로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전설과 역사로 기록한 것이 바로 페르시아어로 쓰인 <집사>의 <오구즈 사>, 위구르어로 쓴 <오구즈나마>, 투르크어로 적은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그리고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 등이 전하는 “오구즈 칸 이야기”와 “데데 코르쿠트 이야기”, 그리고 “오스만 술탄의 선조의 고구려 칸 계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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